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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평점 :
아기들도 깊이 잠들기 전 어른들처럼 하루 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 하나보다. 단잠에 빠진 것 같다가도 배냇짓을 하는지 시익 웃거나 잔뜩 울상을 지으며 잠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아기를 재워 눕힌 다음 한동안은 옆을 지키며 깨어나려는 아기의 가슴을 토닥여준다. ‘엄마 여기 있어.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푹 자’라고 안심시키는 말과 함께. 박완서 작가의 책은 나에게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 가슴 한 켠을 지그시 보듬어주는 따뜻한 위로.

박완서 작가는 오로지 책으로만 접했다. 마음먹으면 영상쯤이야 쉽게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제껏 작가님의 책들을 항상 내 상상 속 톤과 억양으로 읽어왔기 때문에 오랜 시간 내게 익숙한 목소리를 잃고 싶지 않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어김없이 가장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적으로 표현했다. 치사하고 치졸한 인간 내면을 솔직하다 못해 적나라하다 싶게 나열한다. 때로는 자조적이고 때로는 담백해서 더 가슴을 파고든다. 작가님 본인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감정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비오는 날 추적한 바닥에 나앉은 가련한 몰골의 거지에게도 차마 편견의 덧을 벗길 수 없었던 이유, 그럼에도 기차에서 결혼사진을 들고 구걸하는 거지에게는 기꺼이 지갑을 열었던 작가의 마음은 하나다. 넉넉한 마음씨를 지향하지만 막상 여관방을 잡겠다는 손님을 굳이 붙잡지 않는 작가의 마음도 하나다.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의 감정들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박적골에서 사탕을 사들고 오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박완서, 코고는 남편 옆에서 전등을 켜놓고 글을 써내려가는 젊은 박완서, 손주에게 줄 선물을 사러 취미에 없는 백화점 나들이를 감행한 노년의 박완서를 언제든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종이 위 활자에서는 소소한 삐침조차도 생생하게 살아있고 나는 그런 그를 묵묵히 떠올려볼 수 있다.

박완서 에세이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책을 펼친 내게 현실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아’라며 위로받는 기분이다. ‘소설은 이야기’라는 것 외 다른 정의는 필요 없다. 그는 내게 평생 바뀌지 않을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리뷰어스클럽의 서평단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