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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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와 많이 닮았다. 생김새도 사투리도, 앉아있을 때 몸을 좌우로 흔드는 버릇도. 같이 살기 훨씬 전부터 나는 할머니가 좋았고 함께 있을 수 없는 지금도 물론 사랑한다. 엄마가 가끔 할머니한테 톡 쏘는 말을 할 때 난 할머니를 보호하고 싶었고, 할머니가 장롱 속에 내 인형을 숨겨놓고 버렸다고 거짓말 했을 땐 다시는 같이 안 잘 거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방에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할머니가 우리 집 어딘가에 있다는 게 든든했고, 쓰레기 무단투기로 벌금 고지서가 날아왔을 때 할머니가 기죽어하던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학교에 다녔던 이야기와 도박 빚을 갚기 위해 땅 문서를 훔쳐 도망갔다는 큰삼촌 이야기를 무한 반복할 때, 할머니가 해 준 음식에 머리카락 보이는 날이 잦아질 때 늙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싶었다.

    

 

소설 속 할머니들은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희한하게도 나의 할머니를 봐 온 시선과 감정선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처해진 상황만 다를 뿐 할머니는 다 똑같다는 듯이.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해 볼 수 있었던 <어제 꾼 꿈>, 할머니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낼 때 지은 표정이 생각났던 <흑설탕 캔디>, 늙어감에 대한 모든 잔상이 아른거렸던 <선베드>, 진정한 유산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 <위대한 유산>, 딸 둘 엄마 둘의 여행이 인상 깊었던 <11월행>, 가까운 미래 노인이란 이름으로 허용되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 <아리아드네 정원>.

 

가끔 딱딱한 세상을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나이 듦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이 든 사람들의 고집과 아집이 세대 간 거리를 넓히는 경우도 많지만 보이지 않게 삐거덕거리는 사회 곳곳에서 나이 듦이라는 무기로 윤활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내가 후자일 수 있을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노인이라고 다 같은 모습이 아니다. 내가 어떤 모습의 노인이 되고 싶은지 상상해보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책 속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어딘가 모르게 외롭다. 가족이 있지만 외롭고, 가족이 곁에 없어서 외롭다.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의지는 때때로 내 의사와 상관없이 표출되고, 그 의지는 또 때때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 좌절되기도 한다. 세상이 점점 자신들을 배제하는 느낌이 서글프고, 급변하는 환경을 따라가기가 버거워 소통은 일방적으로 흘러갈 때가 많아진다. 이 와중에 유연하기가 쉽지 않다. 노인으로 사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언니에게 할머니는 나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늦게 깨달았다. 나에게 쏟은 애정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음을. 사실과 상관없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할머니의 모습이 답답해 한껏 열 내던 내 모습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나이가 되고 나니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가 안쓰럽고 애처롭다.

 

책 덕분에 오랜만에 실컷 할머니 생각에 젖어있었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은 날이다. 지금은 없는 번호라는 안내멘트가 나오는 할머니 방 전화번호를 괜히 눌러봤다가 마음이 안 좋아졌다.

할머니가 세상에 태어나고, 할아버지랑 결혼해줘서, 아빠를 낳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말을 할머니가 잊지 않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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