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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장수연 지음 / Lik-it(라이킷)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아주 긴 라디오프로그램 한편을 눈으로 읽었다. 정수연 작가가 빼곡히 적어둔 사연을 보고 내 경험과 추억들을 떠올리는 시간들이었다. 이래서 라디오를 듣는 거지. 당신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사연 속 단어하나, 문장하나가 내 마음에 반사되면 때론 따뜻한 햇빛도 되고 때론 그늘도 되어주니까.

작가는 라디오의 전성기가 확실히 지금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나는 전성기라는 단어가 현재와 공존하기 힘들다는 작가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사회경제학적인 관점에서는 라디오가 다양화 된 플랫폼들 사이에서 파급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매체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라디오를 접하는 청취자 입장에서는 생각이 좀 다르다.
라디오의 전성기는 지나지도 아직 오지 않은 것도 아닌 누군가의 인생에 가장 깊이 와 닿는 그 순간순간이 아닐까. 목소리와 음악만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축하하고 같이 고민을 나누는 매일이 누군가에겐 기쁨이고 선물이기에 그 역할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전성기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집으로 비유한다면, 초대석 코너는 거실이고 매일코너는 그보다 안쪽에 있는 안방이나 주방이다. 손님이 다녀가는 공간을 보기 좋게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오래 머무는 곳을 아늑하고 단정하게 가꾸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매일코너가 중요하다. 삶에서 일상이 중요한 것처럼. 매일매일 하고 있는 일이 삶을 구성하는 진짜 요소다.」_65p
코너 뿐만 아니라 라디오 자체가 매일의 힘을 싣고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청취자들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초단위로 숨을 고른다.
요즘 속보를 실시간으로 접하려고 라디오를 켜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일상의 백색소음 같은 느낌으로 라디오를 찾는다. 그러다 언뜻 귀에 꽂히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웃고, 익숙한 멜로디에 노래를 흥얼거린다. 라디오로 인해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되, 혼자인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게 한다.
라디오는 어쩐지 애틋한 맛이 있다. 어릴 때는 타이밍 맞춰서 녹음버튼 누르는 그 손맛을 아직도 기억할 만큼 나의 사랑스러운 스타를 기억하기 좋은 기회였고, 커서는 외근 가는 차 안에서 상사와 격 없이 웃을 수 있는 매개체였다.
비 오는 날 택시기사님에게 “지금 나오는 노래 제목이 뭐라고 했어요?”라고 물었던 적도 있다. 아직도 그 노래를 들은 위치를 지날 때면 그 날의 날씨와 그 때의 내 마음이 떠오른다.
이 책으로 인해 라디오의 세계와 나의 내면을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었다. 아마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반 정도 내민 수준이겠지만. 일부러 다시 찾아듣지 않는 이상 재방, 삼방 없는 라디오의 맛. 향수와 새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라디오가 오래 우리 곁에 머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