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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비틀 ㅣ 킬러 시리즈 2
이사카 고타로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평점 :
나도 신칸센 어딘가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느낌으로 600페이지가 넘는 대장정을 마쳤다.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신칸센에 탑승하게 된 사람들. 그 중에는 누군가의 지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업자’도 있고 아들을 위험에 빠뜨린 장본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아버지’도 있다. (또 그 뒤에는 아버지의 아버지도 등장한다.)
어마무시한 두께의 책을 질리지 않게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 중 한 두 사람에 대한 탐구만 이루어져도 충분하다. 나의 선택은 나나오와 왕자였다.
불행의 여신이 늘 곁을 맴도는 나나오는 사사건건 의도와 다른 결과를 맞이하지만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맺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위기에 닥친 횟수로 따지면 그가 살아남을 확률은 현저하게 낮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끝을 살아서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한 몸처럼 따라 다니던 불행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일생이 행운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예고 없이, 하지만 충분히 짐작가능하게 다가오는 당혹감과 위기상황에서 늘 순발력 있게 상황을 모면해왔다. 그런 것들이 내공처럼 쌓였기 때문일까. 신칸센에서 어떤 위급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져도 그러려니, 빠르게 인정하고 재치 있게 대안을 모색한다. 그래, 불행하다고 죽으란 법은 없지.
왕자를 볼 때는 늘 BGM처럼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마지막 회 까불이 대사가 생각났다.
‘까불이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라는...
늘 의심의 범위에서 간단히 벗어날 수 있을 어린 나이와 모범적인 외모를 무기삼아, 죄책감도 인간적인 감정도 없이 잔인함과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는 모습이 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어딘가에서도 존재할 것만 같다. 왕자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간심리를 연구한 결과들을 내세우며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지’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비웃고 자신만의 삐뚤어진 가치관을 정당화한다. 상대방의 약점을 건드려 그들이 굴복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사이코패스. 그것이 14살이라는 나이로 표현되어 조금은 극단적인 설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든다.
그 외 밀감과 레몬의 티키타카도 이 소설의 재미다. 문학을 좋아하는 밀감과 만화 ‘토마스기차’를 거의 머리에 새기고 사는 레몬의 대화는 철학적이면서도 우리의 일상 그 자체다. 인생작이 따로 있나. 자신의 상황과 감정에 찰떡같이 공감할 수 있는 책 속 구절이나 만화 캐릭터가 나 대신 세상을 더 넓게 바라봐준다면, 그리고 꼭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라면 그게 바로 언제든 꺼내어 써먹을 수 있는 살아있는 교훈 아닐까.
신칸센에서 내리고 싶어도 차마 내릴 수 없는 그들의 사정과 환기 시켜주고 싶을 만큼 답답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갇힌 그들의 결단이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마리아비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