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쉬운 논술 - 혁신판
한효석 지음 / 한겨레에듀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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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논술이 교양의 영역을 넘어 학문의 영역이 되고, 이제는 그 영역마저 넘어 기술과 도구의 영역마저 침범하였다. 삶을 살아가며 필요한 기본 소양으로서의 교양이 아니라 연구와 학습이 필요한 어딘가로 멀어졌을 뿐 아니라, 사람을 평가하는 도구이자 사회를 살아가는 기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논술이라는 영역은 이미 그토록 구체화되고 형식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인가는 의문이 남는다.

저자의 논리에 전반적으로 수긍하며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 책을 이루는 기본 골격이 아주 튼튼하다. 먼저 논술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행위’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이전에 요약이라는 ‘타인의 글을 읽고 그것을 간추려 간단히 하는 행위’를 짚는다. 그것은 논술과 다른 영역의 것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요약을 익숙히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만 자신의 논리구조 역시 탄탄하게 만들 수 있음을 저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문장을 공부한다. 좋은 문장이란 무엇인지 밝히고, 문장을 명료하게 만드는 법과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담는 법을 소개한다. 예컨대 외국어에서 파생된 표현은 지양하고 주어와 서술어를 호응시키며 쓸데없는 관형어나 논술에서 불필요한 개인적 표현을 삼가자는 것들이다. 이 주장, 혹은 가르침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예시와 연습문제를 통해 구체화되고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학습된다.

다음에는 중심생각을 뒷받침하는 방법, 즉 유치하지 않게 근거를 제시하고 그 근거를 이루는 문장들을 어지럽지 않게 배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저자가 목표한 주 피지도층은 고등학생(혹은 중학생 고학년까지를 포함하는 듯 하다)인데, 저자는 친절하게도 일일이 예시를 들며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치한 문장들과 엉터리같은 문장배열을 보여준다.

그리곤 단락을 만드는 구조법을 제시한다. 한 단락에는 한 가지의 주장이 존재하며, 그 주장을 일관성있게 서술하는 것이 중요함을 먼저 이야기한 뒤에 그 서술을 효율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대립과 동의를 활용할 것, 전환구를 잘 이용할 것, 형식 단락을 제대로 만들 것 등이다. 주의사항도 빼놓지 않는다. 논거를 확대 해석하지 말 것, 한 단락을 추측으로만 채우지 않을 것, 결론 단락과 서론 단락을 제대로 만들 것 등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즐겁게 읽었던 ‘구상과 개요짜기’는 흥미롭다 아니할 수 없다. 글의 뼈대를 짜는 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이를 실제로 어떻게 진행해야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연구도 충분히 들어있다. 개요짜는 중요성이야 아마 누구나 인정할 것이지만, 이것에 대한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의 경험치와 연구결과에 따라 효과적으로 개요를 짜는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나누고, 이에 대한 중심문장을 만드는 방법과 그 순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것들을 수정하고 보충하는 방법까지 이야기하니 책의 카피처럼 ‘1주일만에 논술을 끝낸다!!’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논술이라는 것을 이렇게 형식화 하고, 무엇은 좋은 문장이며 무엇은 틀린 문장이고, 이런 서술형식은 상투적이고 이런 것은 도전적이라고 지정해놓는 것이 과연 논술이라는 영역에 유익할지 다시 생각해본다. 예컨대 이 글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은 의도적으로 이 책의 저자가 ‘틀린’ 문장이라고 지적한 문장형식을 다수 사용하고 있으며 ‘기피해야하는’ 논리형식을 따르고 있다.

물론 평가도구로써 논술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기준이 존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논술이라는 영역이 기술과 도구의 영역이 되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일상적이다. 제안서, 보고서 등의 공적인 부분에서도 논술은 적용되지만 대화와 소통의 영역에서도 논술이 적용된다. 이러한 사적 영역에서의 논술은 우리에게 더욱 일상적이고 빈번하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하다. 그러므로 학생에게 ‘문학적 표현은 논술문장에 사용되어선 안돼’라던지, ‘사람이 아닌 사물은 문장의 주어가 될 경우 틀린 문장이 되며, 논술에서 평서문 외의 문장형식은 사용해선 점수가 깎인다’ 라는 가르침은 약간 거리껴진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며 이런 교수법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내용을 대부분 수용하되, 저자의 취향이 묻어나는 일부 주장들(문학적 표현은 삼가라, 주어는 항상 감추거나 인물로 한다, 평서문 외의 문장은 옳지 못하다)은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수정해야겠다고. 논술은 이제 도구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절대적인 기준이나 취향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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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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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멋진 문장을 구사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쓰는 게 아니다. 읽는 사람이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써야 잘 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표현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을 내면에 쌓아야 하고, 그것을 실감 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글귀에 마음이 끌려 책을 선정했는데, 과연 글쓴이는 여기서 지적한 주장과 뒷받침, 그리고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놓았다.

먼저 글쓴이가 주장하는 ‘잘 쓴 글’이란 다음과 같다. “멋진 문장을 구사하는 것보다는 읽는 이에게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글”이다. 이것이 글쓴이의 주장이다. 이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가치 있는 내면 키우기”, “정확하고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 기르기”가 그것이다. 나는 후자에 해당하는 글쓰기 서적은 종종 만난 적이 있으나, 전자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본 일은 거의 없는 듯 했다.

논술이라고 하면 흔히 시험을 생각한다. 정보가 압축되어있는 한 편의 글을 읽고, 주어진 문제의식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논리 있게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일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때의 글쓰기는 수동적이고 지루하고 힘든 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일종의 부담감과 중압감마저 생기기 마련이다. 글쓴이가 마지막 장에서 ‘시험을 위한 글쓰기’를 언급하며 지적했듯, ‘시험을 위한 글쓰기’는 일상생활에서의 ‘좋은 글쓰기’와는 매우 다르다. 시간이 제한되고, 글자 수가 제한되고, 주제와 영역이 제한되고, 심지어 글쓰기의 도구마저 제한되기도 한다. 이런 제한된 글쓰기가 즐거울리 만무하다. 또한 이러한 논술을 위해 단기간에 일종의 기술을 습득한다고 하면, 그런 훈련이 달가울리도 없고 오히려 글쓰기와 멀어지는 역효과가 나기 쉽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시험이라는 것은 어떤 인물의 능력을 평가하고자 하는 것인데, 글쓰기를 잘해서 평가를 좋게 받으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시험 때문에 글쓰기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니.


그래서 나는 저자의 ‘좋은 글쓰기’ 방법을 옹호한다. 특히나 가치 있는 내면을 키우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글을 많이 읽어야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글을 많이 읽어도 좋은 글을 쓰지 못할 수는 있지만, 글을 많이 읽지 않으면 절대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글을 자주 써야만 글을 잘 쓸 수 있다. 따라서 글쓴이는 ‘가치 있는 내면 키우기’와 ‘글쓰기 근육 단련’을 크게 강조한다. 그냥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습득한 효과적인 방법과 자신의 독서경험에서 추출한 ‘전략적 독서목록’까지 첨부하였다. 책을 읽노라면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글쓰기를 잘 하기 위해 글읽기의 즐거움과 흥미를 먼저 알려주는 책이라니, 여타 논술에 관한 책보다 더 본질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는 구체적인 ‘좋은 문장 만들기’ 강의에 들어간다. 이 부분은 다른 많은 논술책들이 지적하는 바와 거의 그 내용이 같다. 한자어와 외래어의 오남용을 피하고, 일본어 및 영어의 번역투의 말을 피하며, 되도록 복문보다는 단문을 사용할 것 등이다. 다만 여기서 글쓴이의 특징적인 주장이 있는데, 바로 ‘말하듯이 쓰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학적이고 허영심에 가득한 글은 결코 좋은 글이 될 수 없으며, 읽는 이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적절한 정의나 다른 용어로의 환원 없이 사용한다면 소통하는 글쓰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글쓴이는 좋은 문장 평가도구로 아주 손쉬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을 읽어보았을 때에 읽는 흐름대로 이해가 되고 단어들이 입에서 엉키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말하는 듯이 쓴 문장이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기준으로 글쓴이의 문장을 읽어보니 마치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문장의 구조가 단순하고 말하는 듯 한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글쓴이는 ‘글쓰기는 축복입니다’ 라고 주장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나는 글쓰기에 대해 설명하며 이토록 친절하고 편하게 글쓰기를 친구처럼 여기게 만들어주는 책을 그동안 보지 못했다. 누군가의 선생이 되어 글쓰기를 가르친다면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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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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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어번 더 봤다. 이번 명절에도 혼자 의자를 꺼내놓고 앉아 이 소설을 읽었다. 조금 더 인생을 살아가면 좋은 점이, 타인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전보다 조금씩 쌓여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더 풍성하게 들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든 책이든, 두 번을 읽고 세 번을 읽을 것. 정성일 아저씨가 주는 교훈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메타포인 스푸트니크는 소련이 발사한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주인공인 뮤와 스미레의 대화 속에 서로의 어휘를 잘못 이해하여 등장한 이 인공위성은, 러시아어로 ‘여행의 동반자‘ 라는 뜻을 갖고 있다. 83키로의 차가운 쇳덩이가 우주의 암흑 속에서 지구 중력장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고 유영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 소설의 주제를 아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로, 여느 하루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과 같이 고독하며 음악과 소설을 좋아하고 홀로 바에서 술을 마시며 종종 낯선 여성들과 잠자리를 하는 평범한(사실 전혀 평범하지 않다) 남자다. 허나 이 소설에서 다른 점은, 이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화자의 각별한 친구인 ‘스미레‘와 그녀의 최초의 사랑을 쟁취해 간 연상의 여자 ‘뮤‘다.

이 소설에선 인물들간의 역학관계가 좀 중요하다. 화자인 나는 스미레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그녀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에는 관심이 없다. 성욕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화자인 나는 스미레에게 용암과 같은 끓어오를 성욕을 느끼지만, 그는 그녀에게 친구사이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종종 그가 담당하는 학생의 어머니와 한달에 두어번 잠자리를 가지는 것으로 성욕을 해소한다. 그러나 그런 여자친구들에게 그는 사랑을 느끼진 않는다.

스미레는 평생에 걸쳐 소설을 써야겠다는 열망 외에 다른 욕구는 느껴본 적이 없는 여자다. 그것은 마치 들풀이 언젠가 꽃을 피우듯 당연한 것이었고, 나무의 뿌리가 땅속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과 같이 그녀가 생존하는 것에 필수적인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연상의 여인 뮤를 만나며 나와 스미레의 일상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스미레는 인생 최초로 너무나도 격렬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녀가 뮤를 사랑하게 된 것에 그녀의 성별은 문제가 없었으며, 그녀의 사랑에도 그녀의 성별은 하등의 가치를 절삭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한) 이 소설의 첫 문단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이 특별한 것이었다.

˝22세의 봄, 스미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바람 같은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쓰러뜨렸고, 하늘 높이 감아 올려 철저히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건너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붕괴시키고 한 떼의 불쌍한 호랑이들을 포함한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성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를 통째로 모래로 묻어 버렸다.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17년 연상으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장소이고 모든 사건이 끝난 장소였다.˝

스미레는 뮤에게 격렬한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알 수 없는 본인의 성욕까지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뮤는 14년 전 어떤 기묘한 일을 겪은 뒤로 사랑과 성욕에 대한 모든 감정들을 박탈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성욕을 느끼지 않는 종류의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나와 스미레와 뮤 사이에는 단순한 삼각관계라고 할 수 없는 묘하고 중의적인 화살표들이 서로 어긋나고 있는 셈이다. 이 어긋난 감정의 파편들이 소설을 이끈다. 앞서 말한 스푸트니크, 그 외롭고 처연한 차가운 쇳덩이가 이 소설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스미레의 문장이 그들의 관계를 적절히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다른 궤도를 따라 항해하는 외롭고 고독한 선장들이다.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로 쏘아올려진 라이카와 같다. 우리는 선원이 없는 작은 쇳덩이의 고독한 표류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말과 같이 우리는 먼 바다에 흘러들어가 하나가 되는 강의 하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고독하다.


2.

이 소설은 전형적인 하루키식 이원론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내가 읽은 바로는(그리고 기억하는 바로는), 노르웨이의 숲 이외에 정확한 리얼리즘 소설을 하루키가 쓴 적은 없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소설에서 하루키는 이세계와 저세계를 양분하는 이원론적 세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곳에 고립되는 일련의 사건을 겪고 두 개의 세계를 감지하게 된다. 그리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본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분이 너무나 순식간에 교체된 것을 이해한다. 그 사건 이전과 이후의 인물은 전혀 다른 인물이 되는 것이다. ‘양을 쫓는 모험‘이나 ‘1Q84‘와 같이 이곳이 아닌 저곳의 세계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소설 속의 주요 무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신비적인 관점에서의 저세계로 묘사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소설의 저세계는 후자다. 저세계의 모습이나 그곳으로 사라져버린 무언가를 소설속 주인공들은 어렴풋이 감지할 뿐, 그곳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거나 통행할 수는 없다.

이 소설 속 저세계는 여러 부분에서 주인공들의 결정적 순간들을 낚아챈다. 스미레가 어릴 적 키웠던 고양이가 사라져버린 소나무라던지, 뮤가 기이한 사건을 겪었던 스위스 어느 마을의 관람차 안이라던지, 비현실적인 음악의 출처를 찾아 쫓아가던 화자가 겪었던 순간의 세계같은 것들이 저세계의 알 수 없는 정체를 조용히 암시한다. 그 세계는 달이나 거울과 같은 것들로 묘사되지만, 무엇도 그것을 정확하게 나타내지는 못한다. 다만 그것은 우리들이 삶의 시간을 주워담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상실의 순간들과 관련되어있다. 하루키에 의하면 우리가 상실한 것들은 저세계로 보내지게 되며, 우리는 그 순간 더이상 이 전의 자기와는 같지 않은 다른 자기가 된다. 뮤가 자신의 성욕과 배란과 생리와 사랑과 삶에의 의지를 저세계로 보내버리는 순간이라던지, 스미레가 뮤를 향한 강렬한 욕구를 저버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구애하지만 실패한 뒤 육체까지 홀연히 사라지는 과정같은 것들이 그렇다. 다만 화자는 스미레를 찾는 과정에 그 세계의 문턱에 발을 딛을 뿐이다. 화자는 특유의 침착성을 발휘해 의식을 집중하여 자신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화자 역시 결국 그리스에서 겪은 일련의 일들로 인해 자신의 무엇인가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섬을 빠져나오는 배 안에서 인식한다. 그에게서 스미레라는 존재가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그녀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무엇인가가 영영 저세계로 가버렸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돌아온 자신의 장소에서 자신의 제자와 제자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 역시 이전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3.

이 소설은 결국 상실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좀 썡뚱맞을 수 있는데, 연인의 의미가 결국 그렇다. 그리워하는 사람. 이 두가지는 나의 인생에서도 내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제였다.

나는 내가 갖는 결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어느순간 성년이 된 후로부터, 나는 내가 무언가가 결여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에 걸쳐 찾았으며, 결국 찾은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고, 나는 누구에게나 그런 결핍과 상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싶다. 내게 존재하는 결핍과 내가 겪은 상실에 인과관계가 있을까? 각자의 독립된 사건들에 인과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것이 인생을 산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겪은 상실의 순간들이 내 존재를 결정하는 주요한 사건들이었다는 사실이 이젠 조금씩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대상들은 동시에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저세계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 역시 이제는 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2012년의 초여름이 미치도록 그립다. 그때 보았던 모든 것들과 들었던 소리들과 잡았던 감촉들과 맛봤던 음식들과 마셨던 맥주들 나눴던 대화들을 몽땅 온전히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순간을 다시 겪고 싶다. 모든 것을 제외한 하나를 원하던 그때의 그 마음과, 그 아름다웠던 밤들과, 내가 도달한 그 정상에서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다시 재생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자리에 박제되어 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은 이제 저세계로 가벼렸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립다고 이야기하는 모든 대상들은 영원히 그리울 것들에 불과하다. 나는 그 때와 같은 격렬한 더위를 매년 여름이면 다시 느끼고, 원한다면 그 장소에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으며, 내가 그때 사랑했던 누군가는 아직도 이 세계 어딘가에서 다른 순간에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같은 계절에 같은 장소를 같은 동행인과 같이 찾는다 한들, 그것들은 모두 저세계로 떠나버린 모든 허깨비의 허상과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지난 겨울에 너무나 깊게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던 대상은 더이상 이 세계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 역시도 그때 이후로 껍데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4.

하지만 소설속 인물들은 여전히 자신이 딛은 세계를 건강하게 살아간다. 무언가 결여된 인간들이 세계 어딘가를 걸어다닌다는 사실은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때와 다른 인간이 되었지만 그 인간으로서의 삶 역시 살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한 화자는 자신의 불륜생활을 정리한다. 뮤는 더이상 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꺼내놓고 살아간다. 그리고 스미레는... 어느날 갑자기 도착한 전화에 화자는 안도한다. 스미레는 ‘나야, 돌아왔어‘ 라고 너무나 일상적인 어휘로 자신의 상황을 전한다. 이것은 꿈인가. 화자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나야, 돌아왔어‘ 라고 말한다는 것. 그것으로 소설은 정리된다.

내게도 그런 전화가 왔었다. 너무도 태연하게, 일상적인 어휘로, 비가 와서 내 생각이 났었다고 말했었나. 그것은 꿈이었나. 내가 그리워한 모든 것은 그 세계에 묶여있다. 나는 영원히 그곳에 가 닿을 수 없다. 그 사실을 문득 되새길 때면 나는 모든 강물이 흘러들어 하나로 합쳐드는 바다의 경계에 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독하다. 내가 이 소설을 몇번씩 읽는 이유는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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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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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은 기억과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낯익은 듯한 풍경 속에서, 그리운 사람 혹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먼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꼭 천천히 읽어주세요.”


때로 무언가를 기억하고자 하면 힘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분명 내가 겪었던 일이고 내게 있었던 일이었을 텐데도 기억 속 장면들은 대부분 어떤 프레임 속의 사진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진 속 장면들을 손을 뻗어 더듬어가며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 사진은 초점이 아주 엉터리로 맞춰져 있어 군데군데 얼룩처럼 읽어낼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인상이 흐릿한 채, 그에 대한 감각만이 남아 아주 아련하게 저장되어 있다. 우리는 그런 기억 속 사진들을 들춰보며 과거를 추억한다. 그래서 모두는 오류를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 날의 정확한 시간, 그들의 이름, 나눴던 대화, 호흡한 공기, 그 날의 냄새 같은 것들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렴풋한 감각과 감정밖에는 없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이런 기억의 오류들을 넘어서 어떤 순간들을 기억하고자 자신들의 기억과 연관된 것들을 수집하여 한 방에 모아두었다고 한다. ‘분더캄머‘라고 불린 그 방에는 온전히 담길 수 없는 무엇들이 각자의 기억들을 아로새긴 채 조용히 숨죽여 존재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둡고 조용한 방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게 그 단어를 알려줬던 사람의 기억이 내겐 ‘분더캄머‘라는 단어 자체로 남아있기 때문에.

작가의 말처럼 나는 이 책을 참 오래도록 천천히 읽었다. 짧고 명료한, 그러나 독창적인 문장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책은 다분히 감각적이다. 이 책은 계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장소에 대해 오래도록 설명한다. 꽃과 나무, 벌레와 구름과 하늘과 눈송이 같은 것들을 순서 없이 계속해서 묘사하는 이 순수한 문장들은 기묘하게도 이 책의 장소인 봄의 정원을 넘어 다른 장소 속에 나를 끌어 넣는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하지. 책은 너무나 명료한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만 나는 오히려 엉뚱하게 내 기억 속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다니. 아무튼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이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주인공 다로와 니시, 그리고 어느 순간 화자로서 갑자기 등장한 다로의 누나인 나. 이들간의 관계 속에서 이렇다할 사건은 없다. 연립빌라에 사는 다로는 같은 빌라에 사는 니시가 옆집인 물빛의 집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니시는 자신이 그 집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그 집을 배경으로 찍은 어느 신혼부부의 사진집인 ‘봄의 정원‘을 본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로는 우연한 계기로 주변인에게 그 사진집을 얻게 되고, 그 사진들 속에 담겨진 부부의 일상을 조용히 들춰본다. 그리고 다로 역시 그 물빛의 집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 지 알고싶어진다. 이 책은 다로와 니시의 일상, 그리고 다로에게 남겨진 기억, 사진집 ‘봄의 정원‘에 담겨 있는 젊은 부부의 단면들이 구름 흘러가듯 계속해서 쉬지 않고 천천히 흘려보낸다.

그리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니시와 다로는 그 집의 현재 주인과 친해져 그 집의 현재를 보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곤 모두 떠난다. 니시는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 고향으로, 물빛의 집주인 역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고향으로, 도쿄의 그 공간은 곧 사라진다. 연립빌라의 마지막 주거자인 다로마저 떠나고 나면, 그 건물은 곧 헐리고 새로운 것들이 들어설 것이다. 사라진 것들을 덤덤하게 이야기하지만 어쩔 수 없이 쓸쓸하다. 다로와 니시가 물빛의 집의 현재에 대해 궁금해 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이 책은 기묘한 소설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모든 감각적 문장들을 통해 소설 밖 이야기들까지 소환하여 나를 쓸쓸하게, 혹은 추억짓게 만든 기묘한 소설이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도 이 책이 계속해서 나의 기억과 감각을 자극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 때문이다.

˝ 안주도, 맥주도 이제 다 떨어지고 없었다. 눈으로 뒤덮인 거리는 고요했다. 눈이 아니어도 이 거리는 고요한지도 몰랐다. 하얀 결정 덩어리는 온기를 빨아들였다. 집도 나무도 전깃줄도 아스팔트도 공기도 밤도 온도가 낮아졌다.˝

++ 스마트폰이라던지, 네비게이션 같은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문득 소설의 장소성과 시간성이 환기되었다. 이것 역시 신선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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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과 학습혁명 - 뇌과학에서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
테리 도일 지음, 강신철 옮김 / 돋을새김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1.

‘뇌과학과 학습혁명’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책의 표지에 적혀있는 것과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배움을 얻는다’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학생들의 능동적인 학습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이러한 학습법을 ‘학생 중심의 수업’이라 명명하고, 자신의 노하우와 연구결과, 그리고 임상적인 결과 및 사례들을 통해 어떻게 학생 중심의 수업이 더 효과적이고 실제적으로 사용될 것인지 이야기한다.

총 12장에 걸쳐 장구한 학습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 책은, 더 작게 나누어보자면 뇌과학애 대한 이야기와 학습전략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 학습방법에 대한 신뢰의 호소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을 각 장에 걸쳐 구분해 놓았으니,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장에서는 ‘뇌 기반 학습이 시작되었다’라는 제목으로 최신 뇌과학의 연구결과를 요약하여 이를 어떻게 학습에 응용할 것인지 설명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사실 뇌과학의 세부적인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뇌과학이 어떻게 그동안 가져왔던 교수들의 학습에 대한 경험적 관념을 깨트리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비중이 높다. 예를 들면, 난독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과거에는 이것이 뇌의 시각처리 영역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현재 뇌과학은 이것이 청각처리 영역과 관련된 것임을 밝혀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경과학의 연구결과로 인해 독해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에 대한 새로운 교육법들이 등장한다고 덧붙인다. 이어서 신경가소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본격적인 학습과 뇌과학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의 두뇌는 사용할수록, 즉 공부할수록 점점 성장한다고 한다. 뇌세포들이 새로운 가지를 만들고 더 많이 생성되는 이 현상을 과학자들은 ‘신경가소성’이라고 말한다. 이 신경가소성은 효과적인 학습방법을 연구하는 교육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데, 타고난 두뇌가 학습능력을 결정한다고 믿어온 수많은 경험적 지식들을 단번에 깨트리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것에 집중한다. 신경가소성은 뒤의 학습전략에 대한 내용에서도 주요하게 등장한다. 아니 이것이 이 책의 대부분의 논조의 중심근거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 2장 이후의 내용을 살펴보자.

2장부터 11장까지는 본격적인 효과적 학습방법에 대한 조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이 부분을 각 장의 제목부터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2장 <학생들을 스스로 공부하게 만드는 전략>, 제3장 <학교 밖 사회에서도 도움이 되는 학습>, 제4장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제5장 <학생들을 이해하고 신뢰 쌓기>, 제6장 <학습 통제권과 선택권의 공유>, 제7장 <강의는 강연이 아니라 토론이다>, 제8장 <모든 감각을 활용한 수업>, 제9장 <패턴을 반복하면 공부가 쉬워진다>, 제10장 <반복과 정교화를 통한 장기기억 학습법>, 제11장 <몸을 움직여야 뇌도 움직인다>
대부분 제목만 살펴보아도 그 장의 내용이 유추가능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뇌과학이 반영된 부분은 신경가소성에 대한 것들이며, 그 외 상당부분의 논거는 임상적 결과이거나 사회학적 실험인 경우가 많다. 이러이러한 학습방법을 도입했더니, 학생들의 학습수준이 몇퍼센트 증가했다, 라는 식의 서술이 많다는 이야기다. 2장에서는 학생들의 능동적인 학습이 학습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학생들에게 수동적으로 주입시키는 교육방법은 학생들의 뇌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당연히 사용할수록 성장하는 뇌의 신경가소성을 고려한다면 지양해야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서는 ‘여러번 시험보기’, ‘온라인 환경을 구축하여 스스로 수정하고 복습하도록 하기’, ‘보고서 재작성과 재시험보기’, ‘퀴즈 시행’ 등을 이야기한다.

3장에서는 실질적 교육에 대한 실천적인 이야기들이 진행된다. 실질적 학습이란 학생들로 하여금 현실사회의 문제를 다루는 상황을 다루게 하여 개념과 관계를 의미있게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즉, 교육내용이 현실세계와 연결되어 실제적인 현상 혹은 경험과 연계될 수 있는 상황에서 사용해볼 수 있는 교육방법이라 할 수 있다. 교수는 해당 상황을 가상으로 제시하여 학생들에게 문제해결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지금은 상당히 보편화된 보상 및 강화에 대한 뇌과학을 이야기한다. 즉, 이러한 능동적이고 유의미한 활동을 거쳤을 때 그 성취감이 학생들에게 큰 보상으로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것 역시 신경가소성과 연결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해당 과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뇌의 사용이 전반적으로 활발해진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실질적 교육에 대한 다양한 사례 및 설계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인 지식교육이 아니라, 실제로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학생들에게 공부설계법을 알려주며, 피드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라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2장과 중복된다.

5장은 학생들과의 신뢰관계를 구축하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캐롤 드웩의 마인드세트에 대해 꽤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긍정적 마인드와 부정적 마인드이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고 믿는 학생과 고정적이라고 믿는 학생이 있다면 전자의 그룹이 더욱 학습능력이 좋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도 신경가소성이 사용된다. 꾸준히 사용한다면 우리의 뇌는 성장할 수 있다는 과학적 논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관계주도형 수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생들과의 관계형성이 그들의 학습능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인데, 이를 위한 방법으로 ‘학생을 자신의 자식처럼 대하기’, ‘학습선택권을 부여하기’, ‘일대일로 대화하기’ 등을 말한다.

6장에서는 학습 통제권과 선택권의 공유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학생들에게 학습 통제권을 주는 것이 학습능력에 효과적이라는 것인데, 이에 대한 논리는 ‘통제권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라는 문장으로 짧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야기는 5장에서 말한 ‘학습선택권을 부여하기’와 중복된다.

7장은 토론의 중요성에 대한 글이다. 토론이 강연 일변도의 강의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에 대한 근거로 ‘직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면 직장생활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등을 말한다. 그 후 토론에 대한 실제적 실천방법과 평가방법 등을 이야기한다. 이 부분은 시중에서 말하는 토론에 대한 대중서적과 다르지 않다.

8장은 다중감각 학습을 강조한다. 우리의 감각은 따로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용하며, 이를 이용하면 정보가 더욱 쉽게 저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강의자의 발화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볼 수 있는 텍스트가 함께 있는 것이 효율적이며, 이것이 이미지와 함꼐 등장한다면 더욱 좋다는 이야기다. 될 수 있다면 영상감상이나 체험학습 등의 것들을 병행하면 좋다. 비슷한 논지에서 일종의 게임을 활용하여 강의한다면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9장은 패턴을 만들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을 말한다. 우리의 뇌는 전체 개념을 서로 연관시키고 그들 간의 유사성, 차이점, 관계 등을 찾는다는 존 레이티의 말을 인용하였다. 예를 들면 기하학적 문양이나 긴 숫자나 문자 등을 외우는 데에는 스스로의 패턴을 덧입혀 기억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원소주기율표나 영화의 장르같은 것들도 패턴을 설명하는 것에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부터 일반적인 패턴의 기억법과는 다른 것들이 설명되고 있다. 비교와 대조, 원인과 결과 등을 패턴을 활용한 교수법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약간 의아하다. 뇌과학과는 다른 분야에서 설명 가능한 교수법으로 이해한다.

10장은 반복과 정교화를 통한 장기기억 학습법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에 대한 최신 뇌과학적 분석을 간단히 요약하며 시작한다. 새로운 경험이 습득되면 새로운 뉴런 연결이 생성되고 이것들이 변화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해 기억이 저장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충분한 휴식이 기억저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망각에는 간섭과 저장실패, 동기화된 망각 등이 작용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한 스트레스가 학습과 기억을 방해한다는 것 역시 주요하게 다룬다. 이러한 과학적 토대를 근거로 장기기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배운 정보와 기술을 반복하고 정교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힌다.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학습하게 하며 학습 내용을 누적해 퀴즈를 풀도록 한다던지, 복습하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 등이 이의 주요한 실천 방법이다. 일부 8장에 중복되는 내용들이 나온다. 학생들이 스스로 실천해야할 방법으로는, ‘공부하는 데 주의를 집중하라’, ‘벼락치기 하지 마라’, ‘공부 습관을 바꿔라’ 등이 있다.

11장에서는 운동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서술한다. 하지만 대부분 8장과 중복된다. 다만 이 장에서 사용되는 뇌과학적 근거는 다중감각이론에서 사용된 것과는 달리 호르몬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이 운동할 때 발생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이 뇌의 각성상태, 집중력, 학습에 동기화되는 능력, 학습에 대한 긍정적 태도 형성 등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적당한 운동과 병행한 학습은 효율을 증대시킬 수 있다. 학생들의 토론 시 벽에 해당 내용을 붙여놓고 걸어다니며 토론하게 하거나, 스트레칭을 유도하는 등의 방법으로 실제 교육현장에 적용할 수 있다.

12장은 아마 저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확신할 때 학습혁명은 시작된다’는 제목의 이 장은, 저자의 논리에 저항하는 다른 교수들에 대해 지적하는 일침과 같다. 저자는 경험에 근거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보수적인 교단을 비판한다.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분명 확실해진 학습방법이 존재하고, 과거의 잘못된 방법들에 대한 증명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교단은 관성적으로 이전의 교육방법이 옳다는 판단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교수와 학생들에게 있어 새로운 학습방법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하며 자신의 논조를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글을 마무리한다.


2.

이 책은 저자의 강력한 학습방법에 대한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내용은 분명 효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은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효율적 교육법이기도 하다. 이런 희미한 기시감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 학습지도에 크게 활용될 만한 몇몇 주장들이 눈에 띈다.

크게는 학습방법과 교수의 자세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학습방법으로는 다중감각을 활용한 학습법이나 반복학습이론 등을 활용할 수 있다. 신경가소성과 기억에 대한 뇌의 저장과정을 사용한 이 이론들은, 학습능력이 부진하거나 학습량에 비해 성취도가 높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일 수 있다. 교수는 이를 적용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멀티미디어 활용, 체험학습의 활성화, 발표와 토론의 적용 등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복습과 상호가르침을 사용해 반복학습을 무리없이 교육현장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중감각 활용에 덧붙여 운동법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 중 스트레칭을 시키거나 휴식시간을 늘리는 등의 방법은 학생들의 주의력을 재고함과 동시에 도파민 등의 호르몬을 통한 학습효율 증대를 기대해볼 수 있다.

교수의 자세로는, 학생과의 유대감 형성과 학생중심교육의 실천 등이 있을 수 있다. 저자가 한 장을 할애하여 설명했듯이, 학생과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학생에게 학습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은 효율적인 학습과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저자가 말한 실천법 중 학생을 자식처럼 대하기, 일대일로 대화하기 등을 사용한다면 학생과의 신뢰감과 유대감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학생에게 학습선택권을 부여하여 그들에게 통제권이 있다는 인식을 조성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능동적인 학습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학습지도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가 갖춰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결국 학생 중심의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이러한 교육적 방법론 그 자체를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운동과 학습의 관계를 교육환경에 적용하여 스트레칭을 시키거나 걸으며 비평하기 등을 적용할 때, 학생들에게 그러한 시도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효과가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운동과 학습의 상관관게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면 그들이 하는 행동이 더욱 능동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논리는 이 책 곳곳에서 다양한 실천방법과 함께 발견할 수 있다. 교육방법론을 교수 혼자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용받는 학생들에게도 알게 하는 것이 학습에 효율적이라는 발상은 흥미롭다. 이러한 부분 역시 학습지도시 크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그러나 책 자체에서 보이는 저자의 논리구조는 생각보다 엉성할 때가 많았다. 토론을 중요시해야한다고 가르치는 부분에서 그가 첫 번째 논리로 이야기한 부분은 학생들이 취업했을 때에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면 취업상황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일반화이며, 과학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오류는 ‘뇌과학과 학습혁명’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있게 뇌과학을 통해 학습에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처럼 시작했지만, 실제로 뇌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와있지 않다. 이 책의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학습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목차만 보아도, 1장과 12장을 제외한 총 10장의 이야기가 모두 학습방법과 그 이론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중간중간 뇌과학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들은 깊게 설명되지 못하고 항상 중간 어느 지점에서 부유한다. 다양한 과학자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것들의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지 못한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내용은 결국 저자가 뇌과학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학습과 교육에 관한 전문가라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뇌과학과 학습에 대한 교양서적이 아닌, 학습과 교육의 방법론에 대한 전문서적이다. 그러므로 실제적 교육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뛰어난 이론들은 다양하게 논의되지만 실제로 뇌과학 분야에서 그것이 어떤 논리로 증명되고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는 그 논리가 빈약하다. 이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더욱 불편한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 저자는 꽤나 상당한 확신을 갖고 이러한 학습방법을 설명한다. 이는 제목의 ‘혁명’이라는 단어와 제12장의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저자는 굉장히 교조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학습방법을 설명하는데, 대부분 명령문으로 소제목이 구성되었다는 점이 유의미하다. ‘~하라’ 라는 식의 어법은 자신의 논리구조를 설득하려는 자의 글에서는 매우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문장들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학습방법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에게서는 효과적인 실천자들이 나타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앞서 말했듯 대단히 효율적인, 경험적이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학습방법론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논리가 불편한 이유다.

심지어 저자는 동료 교수들이 자신의 교육법을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그들이 몰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사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학습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려하지 않아서 관성적인 반발을 보이는 것 뿐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는 이미 경험적으로 익혀진 학습법에 다른 이름을 붙여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그의 저술태도는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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