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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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나는 시코쿠의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가져간 책이 그 책에 바쳐진 헌사들에 비해서 그다지 뛰어나게 재미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무렵, 결국 핸드폰에 항상 담겨 있는 몇 권의 책들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하루 중 정해진 쉬는 시간은 일과 후를 제외하면 점심을 먹은 뒤(대체로 오후 1시 쯤이다)부터 세 시 쯤까지 였으므로, 그 시간에 툇마루에 누워 뒹굴거리며 읽을 적당한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던, 그리하여 이내 내용 전체를 외울 지경이 되었던 소설을 다시 열었다.

나는 내가 뒹굴었던 툇마루의 오래된 방충망을 떼어내 집 근처 저류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이던 경치 좋은 물가에 앉아 땡땡이라는 아주 근사한 단어에 대해 명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사한 단어 덕택에 이 아름다운 곳에서 이 책을 또 읽을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세풀투라의 노래를 듣던 세희의 모습을 묘사하던 첫 장에서부터, 그리고 짜장면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장면들은 내가 읽을 수 있는 소설들 중 가장 서정적이고 너무나도 사적인 문장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겪었던 첫 사랑, 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어쩐지 첫사랑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이야기가 결국 미성숙한 청춘들의 보편적이랄 수 있는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재현과 서연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정확하게 첫 사랑이라는 주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왜 첫사랑일까? 이 소설이 불러일으켜내는 나의 기억이 그 부분에 닿아있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문장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재현과 세희가 서로를 상처주면서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생의 어느 한 기간을 함께 보냈다면 그것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인정하는 부분에서.

나는 꽤나 이상한 방식으로 첫 연애를 관통해 왔다. 그것은 모든 더위를 녹여버릴 만큼 뜨겁기도 했고, 세상 모든 낙엽들을 쓸어버릴 만큼 매몰차기도 했으며, 사막의 모든 오아시스가 절멸해버린 것만큼 황폐하기도, 세상 모든 언어의 수사들이 시들어버릴 만큼 황홀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당시 내게 어느 친구가 권유했던 존 레논의 노래처럼, 세상은 그녀를 알게 된 후로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하늘은 더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고, 내 눈과 마음은 그 모든 것들을 향해 새롭게 열려졌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도 이내 끝이 나고야 말았고, 나는 상처 준 마음에 오래도록 신음했고, 자책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따라서 소설의 주인공이 내뱉은 이토록 간단하고도 명확한 그 문장은 내게 많은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 문장은 내게 첫 연애의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꽤 괴로운 일이기도 하면서 마음이 젖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시간은 비선형적이다. 그것은 어느정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삶을 통해 수없이 재구성해본 사람들이라면 십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는 통로가 있고, 우리는 때로 여러 방법을 통해 그 통로의 틈새를 통해 이전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것은 동시적이며 통시적이다. 현재와 동시에 과거가 나란히 따라가는 인생이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을지도 모른다. 김연수는 그러한 시간의 성질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 소설 속에 차용하여 구성상의 특징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는 수 많은 시간의 책갈피가 있으며, 그 시간의 책갈피는 결코 시간의 순방향을 따르지 않는다. 책갈피의 이름들 역시 너무나 사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연애를 기억하고 반추하는 방식과 같다. 개개인의 이야기에 이름 붙여진 책갈피들의 이름은 얼마나 엉뚱할 것인가. 거리의 칼국수집 간판, 낯익은 머나먼 도시의 이름, 오래된 가수의 남들은 모르는 노래의 제목 같은 것들. 이 소설 속 책갈피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7번 국도‘라는 모티브에 관여한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책갈피들을 통해 ‘나‘와 재현과 서연과 세희의 이야기들을 동분서주하다보면 어느새 아쉽게도 소설이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라면, 약간의 허무주의와 그럼에도 불구한 희망에 대한 송가, 혹은 매일 이별하는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들의 성장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건 하지 않겠다. 세희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가장 아름답다. 그 안에는 신비주의적인 성찰과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 대한 아득한 애정, 상실을 딛고 일어선 단단한 자의 아름답고 견고한 모습들이 들어있다. 나도 그렇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편지였다.

이 소설 속 곳곳에는 그들의 시간 만큼이나 이 책을 읽어온 나의 시간까지 함께 들어있다. 그들의 책갈피의 이름들과는 별개로, 나만의 키워드와 나만의 기억법으로 이 소설 곳곳에 나의 기억들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이 건강하게 미래로, 무엇이 나오든 단 하나가 아닌 모든 것을 열망하는 미래로 향했으면 좋겠다. 이만큼 애정을 갖고 오래도록 지켜본 허구의 존재들이 또 있을까. 이런 문장들로 내가 이 소설에 갖는 애정들이 다 표현되었으면 좋겠다. 어서 김연수가 새 작품을 내어 주었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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