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1.
내가 가진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어째서 타인은 타인일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개인은 타인에게 그토록 무관심한가? 2014년의 그날을 어째서 누군가는 사건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사고에 불과하다고 하는가? 나는 그것에 분노하는데, 이 분노는 개인적인 것인가, 혹은 정당한 당위적 분노인가?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은, 계간 문학동네의 2014년 겨울호를 읽고 난 뒤였다. 류보선 평론가는 그의 글에서 바디우와 조르조 아감벤을 인용하며 세월호의 사건적 성격을 밝히고, 우리 세대는 더이상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만일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시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윤리에 크게 동의하며, 그가 인용한 바디우의 윤리학과 아감벤의 책들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2.
바디우는 먼저 현대의 윤리를 해체한다. 그 윤리의 기반을 밝히고, 그 기반의 허구성을 증명하며 윤리적 체계의 모순을 드러낸다. 바디우에 의하면 현대의 윤리학은 인간의 동물적 피해와 타인의 윤리학에 기대고 있다. 전자인 동물적인 인간의 피해자적 성격으로 윤리를 규정하는 것은, 악으로부터 선을 규정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예컨대, 인간이 입을 수 있는 동물적인 피해들을 규정한 뒤 그것을 행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살인은 악이고, 폭행 역시 악이며, 기타 모든 악행은 이처럼 피해자적 성격에서 규정된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살인하지 않는 것, 폭행하지 않는 것, 추행하지 않는 것 등으로, 이미 규정된 악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가? 인간은 동물적인 존재로서만 정의되며 그것으로부터 선이 정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가?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동물적이지 않은 ‘불사의 존재’로서 거듭날 수 있는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 불사의 존재란, 이전까지 존재했던 자신의 모든 행동방식, 존재의 방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주체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존재가 주체로 거듭날 때, 그 과정을 바디우는 진리라고 말한다.

타인의 윤리학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행위를 윤리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윤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며, 나 역시 지금까지 동의해온 개념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이 역시 윤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타자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자를 규정할 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비-타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개인적인 기준이 아니며, 이미 정해져 있는 상징질서의 존재, 바로 서양남성으로서의 자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자를 인정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네가 이슬람교도가 아닌 한, 너의 인종이 흑인이거나 황인종이 아닌 한, 네가 일정 이상의 부를 누리며 특히 나와 같이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한- 나는 너를 존중한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디우에 의하면 인간의 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그것을 존중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어떠한 윤리도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을 강조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모순이 발생한다.

“주장되는 것이 윤리적 원칙들, 인간의 피해자적 본질이라면, 주장되는 것이 권리가 보편적이고 시효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비행기로의 여행시간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가? ‘타자에 대한 인정’은, 그 타자가 바로 우리의 손에 닿는 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것일까? (...46p)”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진정한 윤리적 준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디우는 존재를 주체로 환기시키는 진리의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윤리는 사건과 관계되며, 사건이란 존재를 주체로 환원하는 것, 즉 모든 의견과 대립하며 지금까지 존재했던 자신의 존재방식 자체를 뒤바꾸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동물을 뛰어넘는(그렇지만 동물이 그 유일한 담지자인) 주체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이미 주어진 것’속의 그 일상적 기입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잉여적 부가물을 사건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진리가 문제삼아지지 않는(오직 의견만이 문제삼아지는) 다양태적 존재를 사건과 구분하다.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54p)”

이 과정은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일 수도 있고, 사회적 혁명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사랑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우리의 우주관을 뒤엎은 일대적 사건이며, 우리가 지난 겨울 겪은 촛불혁명 역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한 크나 큰 사회적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디우는 ‘사랑의 만남의 영향 아래 내가 그 만남에 실질적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나의 상황에 ‘거주하는’ 나 자신의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고 하며, 개인적 의미의 사랑 역시 사건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공백에서부터 발생했으며, 이것은 잉여적 부가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은 ‘잉여적 부가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방식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윤리적 준칙은 어떻게 도출되는가? 그것은 사건의 성격과 관계되어 있다. 사건은 필연적으로 모든 의견에 대립한다. ‘-한편으로는 진리들의 윤리학이 의견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그리하여 전적으로 비사회적으로 된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라고 바디우가 밝힌 바 있듯, 사건은 본질적으로 공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존재를 주체로 환원시키는 무엇이기에 존재에게 주어진 모든 의견들에 대립하는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존재는 사건을 거부한다. 아니, 존재를 넘어 우리를 지배하는 윤리학은 이러한 진리의 과정 자체를 필연적으로 밀어낸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윤리학은 모든 의견들이 옳다고 말하며, 인간의 피해자적 본질로부터 윤리를 도출하므로, 도저히 주체적인 성격의 윤리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가 사건을 마주했을 때 가져야 할 준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충실성에 대한 충실함’이라고 표현되는, “계속하시오!”라는 준칙이다. 우리 사회는 지속해서 존재에게 사건을 사건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의 과정에 대해 회의하게 되며, 충실성에 위기를 맞는다. 사회는 오직 하나의 윤리인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훼손된 이미지에 따라 시험에 부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준칙에 따라 계속해야 한다. 그것이 윤리다.

3.
이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2014년 그날 이후로, 사건으로 존재했어야 할 그 일을,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훼손된 이미지들에 결합시켜 시험에 부쳤는가. 세월호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세월호 유족들이 시체장사를 한다-와 같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그 훼손된 이미지들. 우리는 그러한 시도들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세월호는 사건에서 사고로 전락하는 듯했으나, 결국 또다른 사건, 즉- 지난 겨울의 촛불혁명을 통해 새로운 대체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지난 겨울을 통과하는 동안, 지금까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멈추지 않았고, 그 사건에 대한 윤리적 준칙을 준수했다. 우리는 사건을 사건으로 명명했고, 그 결과로써 새로운 질서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내 질문, 어째서 사건을 사고로 전락시키려는 자들이 존재했는가? 그들에 대한 나의 분노는 윤리적인가? 에 대한 답변은 이미 이루어졌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들을 부정하는 사건을 거부하며,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바디우는 궁극적으로 말한다. ‘당신이 결코 두 번 믿지 않을 것을 사랑하라.’ 이것은 ‘당신이 항상 믿던 것만을 사랑하라’는 의견의 준칙과 반대되는 진리의 준칙이다.

내가 요즘 항상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운동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한 점에 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은 지도를 완성하는 순간 자신이 하려했던 작업의 의미를 잃는다. 해안선은 요동치고 땅은 깎여나가며 길은 언제나 새롭게 돋아난다. 그는 결코 완벽한 지도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지도제작자의 모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역시 언제나 변화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도 변화한다. 그렇다면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의견으로 구성된 윤리의 준칙이란 지도제작자의 완성된 지도와 같은 것이다. 어떠한 윤리를 절대적인 준칙이라고 주장해도 그것은 결코 진리를 담지하지 않는 불완전한 윤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은 신뢰가 간다. 그의 윤리학은 절대적인 동시에 운동하는 무엇이다. 모든 윤리는 개개인이 겪는 진리의 과정 속에 있으므로, 그 진리의 과정에 따라 윤리의 양태는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의 준칙은 오직 하나, “계속하시오!” 그것이 윤리의 모방과 같은 ‘시뮬라르크’로 의심될 지라도, “계속하시오!”, 그것이 끊임없이 사회의 거부로 훼손된 이미지들에 부쳐질 지라도, “계속하시오!” 오로지, 그것이 진리임을 믿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계속하시오!”에 따라, 충실하는 것이 운동하는 윤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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