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늙어버린 여름 - 늙음에 대한 시적이고 우아한,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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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늙어버린 여름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김영사

 


 

늙음에 관한 시적이고 우아한, 결코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늙음에 대한 깊고 명료한 접근”

 



 

 

지금까지 살면서 ‘늙음’ 그리고 ‘죽음’ 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나였기에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머지 않아 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작가님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고향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다문화 가정 속에서 성장하여 1960~70년대 젊은 시절의 다양한 투쟁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페미니즘 학자, 이중문화 학자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페미니스트, 여성문학, 다문화 정체성 등에 관하여 가르쳐왔다.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여름 갑자기 찾아온 ‘늙음’ 이라는 몸의 변화로 생각지도 못한 노년의 삶을 맞닥들이게 된다.

 

늘 하던 요가 수업에서 아사나 동작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던가, 시력이 서서히 떨어져 백내장이라는 질환을 얻고 망연자실 하는 모습이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제일 연장자가 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하고, 디지털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서서히 퇴화되는 몸을 인식하게 시작한다는 것. 어쩌면 이 시대는 젊은 사람들에게 맞춰진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쟁으로 개척해 온 현재의 노년들은 투명인간으로 취급받고, 방치되어진 채 죽음을 맞는다는 건, ‘늙음’ 이라는 인생의 흐름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찬란하게 살다 어둠속으로 가라앉는 노년의 삶을 상상하니 ‘늙음’ 을 마주한 순간 더한 슬픔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늙어버림' 을 통해 작가님의 살아온 삶을 만날 수 있었다.
가족과의 이별과 슬픔, 애정 결핍들. 기억하고 싶지 않을 모든 순간들을 과거속으로 집어 넣었고 회상하고 추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온다. 시크하고 당찬 커리우먼이었지만 내면에는 마주할 수 없는 두려움이 쌓여있었다. 그러나 ‘늙음’ 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매정하게 생각했던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당당하고 멋있던 전남편의 늙음을 알게 된 후, 조금 더 사랑해주고 관심을 주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느낀다. 
아마 자녀가 있었다면 늙음을 이토록 힘겹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남에게 투명인간 취급이 되버리고 양보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에 조금은 더 인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작가는 ‘늙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느끼는 모든 과정들이 혼란스럽게 느끼지만, 결국 받아들임으로 곁에 남은 친구와 문학을 통해 ‘늙음’ 으로 인해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해 고민하며, 성찰하는 과정을 그려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새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갖고 개척하며 살아가달라고 당부하는 메세지가 담겨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우아하고 지적인 문체들이 인상깊었고, 독자인 내가 ‘늙음’ 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약하고 닳아버린 나,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세월이 나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협적인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토록 믿고 있던 나 자신에게 이보다 더 큰 수모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도 몰라보게 된 몸과 세상 앞에서 점점 더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겁 많은 노파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p.25)

 

 

나는 ‘두려워하기’ 를 시작하게 될까 봐 두렵다. 지금껏 그런 감정 따위에 져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늙는다는 두려움, 병드는데 대한 두려움, 어울리지 않는 이들과 동생하느니 차라리 홀로 고독한 편이 더 좋다고 큰 소리치던 나였는데, 독신으론 남지 않으려 정서적 타협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우습게 알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이제는 고독이 두렵다.   (p.24~25)

 

 

게다가 ‘좋았던 옛날’ 이 실제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젊었을 때는 틀림없이 내가 하는 일, 내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나와 함께 잠시나마 동질감을 가져보고자 애쓰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훨씬 너그러웠다고 감히 확신한다.   (p.52)

 

 

디지털 혁멱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또한 내가 노화로 가는 여정을 가속화했다. 나는 마흔 줄에 접어들고 나서야 처음으로 컴퓨터를 장만했고, 그 때문에 생소한 컴퓨터 언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P.60)

 

 

늙은이가 되어버린 이후로, 나는 벌써 오래전에 비교적 평온하게 돌아가신 내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젊은 시절을 온통 두 분에게 반항하는 데 바쳤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전엔 알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는데 도움이 된다.    (P.125)

 

 

스무 살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서른이 되자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마흔이 넘자 청소년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 커플의 어려움 등을 화제에 올렸고, 쉰 줄에 들어서자 리프팅을, 예순이 되면서는 퇴직과 각종 계획(여행, 자원봉사, 요가 등) 이 수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p.151)

 

 

그렇지만 내가 확신하는 한 가지는, 우리 앞엔 아직도 순수한 웃음,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 아무도 쓰러뜨릴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연대의식, 늘 함께한다는 암묵적인 동조 의식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운명이 우리를 영원히 떼어놓기 전까지는.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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