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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ㅣ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 본 서평은 황금가지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읽기는 하루 만에 읽어 놓고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하지... 하고 2주간 고민하다가 결국 제가 느낀 그대로를 작성합니다. ㅋㅋㅋ...)
황금가지에서 출간 몇 주 전부터 카페 및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길래 재미있어 보여서 기대작 리스트에 올려 두고 줄거리를 찾아 읽었는데, 서평단 신청하면서 너무 줄거리를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었을 책인데, 줄거리를 너무 많이 알고 봐서 재미가 반감된 감이 있다. 그래도 덕분에 약간 더 분석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책 줄거리와 함께 홍보문구를 읽었는데, “헝거게임과 트와일라잇과 해리포터를 잇는 판타지 대작”이라고 소개하는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판타지 대작... 이라는 말은 동의하는 바이나, 본인은 헝거게임과 트와일라잇을 ‘잇는’ 판타지 대작이 아니라, “헝거게임과 트와일라잇을 ‘합친’ 판타지 대작”에 가깝다고 본다. 진부한 책이라고 비판하자는 뜻은 아니다. 진부한 요소가 많아 보인다는 뜻은 뒤집어 말하자면 흥행했던 책들에 있던 요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헝거게임에서 핍박받는 민중들이 불합리한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체제 전복’ 요소와 평범한 아이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영웅으로 뽑혀 이 세계를 구하게 된다는 ‘평범한 영웅’ 요소, 트와일라잇에서의 삼각관계 구도(칼/킬런/메어 세 사람이 흡사 에드워드/제이콥/벨라를 연상시킨다)와 모든 뱀파이어(여기에서는 은혈)가 초능력을 한 가지씩 지니고 있다는 설정.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특이한 건 이 뻔해 보이는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야기임에도 소설 자체는 재미있다는 점이다(그리고 사실 이 요소들이라는 것도, 본인이 먼저 헝거게임과 트와일라잇이라는 구체적인 작품명을 들었기에 연관시킨 것이지, 원래 장르소설을 읽을 때 어떤 요소가 있는지 까지 신경써가며 읽는 타입은 아니기에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더라면 별 생각 없이 읽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선 세계관이 새롭다. 흔히 신분 사회에서 평민들이 신분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귀족 피랑 평민 피가 따로 있냐”고 하는데, ‘레드 퀸’에서는 정말로 귀족 피랑 평민 피가 따로 있다. 귀족의 피는 은색, 평민은 붉은색. 은색 피를 가진 은혈들은 가문별로 사용할 수 있는 초능력을 하나씩 지니고 있어, 적혈들 위에 군림한다. 이 ‘은색 피’에 대한 묘사도 세심하게 하고 있다. 화가 나면 일반적으로 “얼굴이 붉어졌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은혈이니까 얼굴에 피가 몰리면서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뭐랄까, 신선하다.
첫 페이지를 펼치면 여름날 장터의 풍경이 세밀한 필치로 묘사된다.
“…지금 같은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이런 번잡스러움은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내가 있는 그늘 속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지만, 오전 작업으로 온통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에서부터 풍기는 악취는 거의 우유 썩는 내를 연상시킬 수준이다. 공기는 열기와 습기로 일렁거리고, 심지어 어제의 폭풍이 만들어 놓은 물웅덩이들조차 뜨끈뜨끈한 상태로 끈끈한 기름이 만든 무지개 줄을 그리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날의 가판을 접는 중이고…”
왠지 모를 데자뷰를 느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메밀꽃 필 무렵’의 도입부와 비슷하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한국을 대표하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비슷하다고 데자뷰를 느꼈다는 것 자체가, 본인이 무의식중에 표현력이 매우 뛰어난 작품임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원문이 어땠는지는 읽어 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아마존에 올라와 있는 베스트 독자 서평 중에 “표현이 진부하다”는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원문보다도 번역가 김은숙님이 매끄럽고 예쁜 한국어 표현으로 번역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번역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소설에서 모든 문장이 ‘~한다’로 끝난다. 즉, 현재형이다. 원문을 존중한 번역인 듯하나, 독자 입장에서는 그 ‘~한다’체가 거슬려서 소설 몰입에 방해받는 느낌이었다. 번역가님의 재량을 발휘해서 ‘~했다’로 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전자든 후자든 간에, 놀라운 표현력이었다.
귀족 사회 내에서의 갈등과 대립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결국은 이것도 표현법에 대한 칭찬이 되겠지만, 첫 페이지에서 느꼈던 표현의 훌륭함은 말하자면 묘사의 훌륭함이고,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구성에서의 훌륭함이다. 헝거게임과 비슷한 요소가 있다고 앞부분에서 언급했었는데, 이 부분이 헝거게임과의 차별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헝거게임에서는 대부분 주인공 캣니스가 평민이기 때문에 평민들의 일상이 잘 드러나는데, 메어는 평민층(적혈)임에도 불구하고 초능력을 각성하여 은혈이자 제2왕자비로 계급이 바뀌면서 귀족 사회의 모습을 서술하게 된다. 더욱 인상 깊었던 점은 은혈들의 사치보다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과 집안 간의 갈등을 자세히 묘사한다는 점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은혈들이라 해서 열악한 환경에 놓인 적혈들보다 처지가 낫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일깨워, 메어를 따라 적혈을 지지하면서도 모든 은혈들을 완전한 악으로 규정할 수는 없게 한다. 전형적인 권선징악 스토리는 탈피한 셈이다.
이것까지 얘기하면 줄거리를 죄다 얘기하는 셈이 될 것 같아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이 있었다. 본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어서 많이 놀랐는데, 생각해 보면 1권과 2권 전체에 걸쳐서 복선이 깔려 있었는데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싶다. 복선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자연스러운 전개여서였을까. 사실 이 반전만 없었더라면 그렇게 높은 평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마지막 반전으로 본인의 평도 한 단계 올라갔다. 딱 한 가지만 더 힌트를 주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정말 입체적이고, 현실성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착한 인물과 나쁜 인물을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 절대.
본인은 출판사 황금가지의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블랙로맨스 소설은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순수 판타지나 순수 로맨스는 좋아하는데 판타지로맨스는 뭔가 유치한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각관계가 있다고 할 때 내심 불안했는데, ‘레드 퀸’은 판타지로맨스보다는 순수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레드 퀸: 적혈의 여왕’이 1부라는 걸 감안했을 때 이 사각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는 블랙‘로맨스’소설에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베스트셀러 판타지소설’ 정도로 생각하고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일장일단이 분명 존재하는 ‘레드 퀸: 적혈의 여왕’이지만,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겠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추천하겠다. 장점이 단점을 커버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한계로 약간의 단점이 보이는 것 같은데, 다음 소설부터는 얼마나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줄지 앞으로의 작가의 행보가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가 이번에 정말 대작 계약을 딴 것 같은데, 앞으로도 많은 좋은 외서들을 소개해 주길 바란다. 기다리는 독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