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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ㅣ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사카 고타로는 정말로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한 치의 어그러짐 없이 퍼즐처럼 모든 요소를 계산하고 치밀하게 집필하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허투로 쓰이는 캐릭터,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는 느낌. 그러면서도 자신이 전달하려고 하는 바를 그야말로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폭발적인 감동을 준다기보다는, 결말을 읽으면 잔잔하게 '그래,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게 이사카 월드의 매력이다. 잔기술 없이 충실히 자기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느낌.
더구나, 이번 작품은 '일본 서점대상'까지 수상해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밤의 피크닉><도쿄타워><한순간 바람이 되어라>까지, 일본 서점대상은 나에게 must-have book이었다. 이래저래 이 책 <골든 슬럼버>는 나에게 놓칠 수 없는 책이었던 셈이다.
책은 '온 세상이 추격하는 한 남자'라는 부제가 설명해주듯,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든 한 남자에게 3일 동안 일어난 일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1부/ 사건의 시작, 2부/ 사건의 시청자, 3부/ 사건 20년 뒤, 4부/ 사건, 5부/ 사건 석 달 뒤.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4부/ 사건'이 이 이야기의 중점이다. 사실 처음 1부와 2부, 3부까지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었다(3부까지라고는 하지만, 전체 책에서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진 않는다). 책 띠지에 적혀 있는 것처럼 그야말로 오락소설에 그치는가 싶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고타로는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등을 잔잔한 깊이로, 특유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작가인데 조금 성향이 바뀌었나 싶어서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기도 했다. 또 고타로 하면,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데도 각별한 재능이 있는데 3부까지는 캐릭터의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초반부는 '고타로'라는 이름에도, '서점대상'이라는 이름에도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초반부 잠시 잠깐 일어났을 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런 걱정은 모두 사라지고 점점 몰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까지 읽은 다음에는, 초반부의 사소한 이야기들도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감동의 폭을 더 깊게 만든다. 역시 서점대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의 면면을 살펴보면, '향수'라던지 '휴머니즘'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는 어린 소년과 노수학자의 우정이, <밤의 피크닉>에는 학창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도쿄타워>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가,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에는 청춘과 열정에 대한 응원이 있다'. 아무래도 '서점대상'은 그 상의 성격상 대중적이면서도 휴머니티한 성격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을 텐데, <골든 슬럼버> 역시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이야기가 너무 좋다. 초반에는 드러나지 않던 캐릭터들의 매력도 본격적인 이야기로 돌입하면서부터 속속 드러나기 시작하고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결말이 가까워질수록, 과연 고타로, 과연 서점대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총리 암살 범인으로 몰린 아오야기. '그냥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그야말로 소시민에 사람 좋은 캐릭터다. 그리고 그에게는 대학시절을 함께 나눈 세 명의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사회에 나와서 조금씩 거리감이 생기고, 자신의 생활에 열중하다 보니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마음속 깊이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은 아오야기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 또 자기 나름대로 아오야기를 돕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작은 노력들이 퍼즐처럼 작용해 아오야기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초반에 등장하는 대학친구 모리타가 말했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습관과 신뢰'가 아닌가 싶다. 시간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이런 습관을 가진, 이런 생각을 가진,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어주는 것.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모함한다고 해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을 믿는 마음. 그게 바로 아오야기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고타로는 '국가는 개인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 '감시사회가 왜 위험한가' 같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보다는 '나를 나이게 하는 것, 그리고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과 같은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메시지를 더 전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정밀하게 계산된 플롯, 그리고 세상을 보는 건강한 시선, 그게 바로 고타로다. 마지막에 작가노트를 보니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을 만나 취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작가정신'이야말로 고타로로 하여금 대중과 소통하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꾸준히 펴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닐까.
때때로 '니가 그럴 아이가 아닌데' 혹은 '너라면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와 함께한 시간을 믿고, 나를 알아봐주고, 나를 신뢰해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겉모습이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아무리 오랜 시간 떨어져 있는다 해도 그때도 여전히 나를 알아봐주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 믿음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