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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시 - 개정판 ㅣ 에디션 D(desire) 2
제임스 발라드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영화로 먼저 접했을때 그들의 변태적 욕구가 잘 이해가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정도의
느낌과 자극적인 성적표현에 충격이 있었다. 제임스 발라드 (작가와 이름이 같다) 라는 인물의 성격과 그가 느끼는 삶의 기쁨의 표출?을 인정하며 그가 하는 행동과 말, 생각들이 신기했다.
삶의 의미를 육체적 욕망에서밖에 느끼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책을 접하면서 영화와는 다른 또다른 충격에 빠졌다.
첫 문장에 다 나와있다. 본, 사고, 죽음.
어제, 본은 자신이 낸 마지막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우리가 알고 지내는 동안 본은 여러 차례 충돌 사고를 자행하며 죽음을 예행 연습해왔건만, 이번엔 유일무이한 진짜 사고였다. -p9
본은 흉터가 발산하는 신비로운 에로티시즘에 대해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계기판은 피로 물들고 좌석벨트는 똥칠로 범벅이 되고, 뇌 조직이 터져서 엉망이 된 선바이저와 같은 도착된 모습에서 성욕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본은 사고 차량을 보면 언제나 달아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펜더가 복잡하게 찌그러진 기하학적 모습에서, 라디에이터 그릴이 예상치 못하게 뒤틀린 모습에서, 마치 기계 펠라티오라는 정해진 행위를 하듯 계기판이 그로테스크하게 돌출되어 운전자의 가랑이 사이로 뚫고 들어간 모습에서 전율을 느꼈다. 한 인간의 은밀한 시간과 공간은 칼과 젖빛 유리가 거미줄처럼 뒤얽혀 영원히 굳어버렸다. -p15-16
대량생산과 과잉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꿈과 희망이 미래가 아닌 현재의 욕망에 소멸되어가는 극한을 자동차라는 매개를 통해 표출한다. 작가의 상상이 곧 주인공의 상상이 되고 그 둘은 하나가 되어 인간의 극한을 보여준다.
내가 아내에게 본 애기를 하면서 우리 둘의 몸이 내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속으로 본의 모습을 완성하는 요소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보았다. 차에서 내리려고 한쪽 엉덩이에 몸무게를 싣는 순간 낡은 청바지 안을 가득 채운 그의 단단한 엉덩이, 핸들에 앉아있으면 삼각 치골이 거의 드러날 듯하 얄팍한 뱃가죽, 축축한 사타구니를 뚫고 핸들 아래쪽 바지 속에서 뿔처럼 반쯤 발기되어 불쑥 솟은 그의 남성, 코에 묻은 미세한 점 같은 먼지를 털고 찌그러진 문짝 위를 닦는 모습, 내게 담배 라이터를 건네줄 때 보인 왼쪽 검지가 긁힌 자국, 클랙슨 양각에 닳아서 해진 푸른 셔츠 겉으로 보이는 발기된 유두, 우리가 앉은 시트 사이에 묻은 정액 얼룩을 긁다가 부러진 엄지손톱. -p157
차를 탄 다부진 그의 몸에 홀딱 반한 나는 폭력과 흥분이 손짓하는 시스템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폭력과 흥분은 고속도로와 교통 정체, 훔친 자동차와 본이 분칠한 성욕이 결합된 것이다. -p 231
고개를 돌리자, 고가도로 콘크리트 벽에 햇빛이 반사되어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정육면체가 만들어졌고, 그 단단하고도 차가운 표면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하얀 진입로는 본의 몸 일부처럼 보였고 나도 그의 몸을 기어 다니는 파리떼 중 하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광채를 내는 표면에 타 죽을까 봐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정수리에 손을 대고 물컹물컹한 뇌 조직이 도망가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었다. 느닷없이 빛이 사라졌다. 본의 차가 다리 아래로 드리워진 어둠 속에 파묻혔다. 모든 것이 또다시 칙칙해졌다. 공기와 빛도 소진됐다. 도로에 발을 내딛으며 차가 있는 곳에서 멀어지자, 본이 불안하게 나를 붙들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말뚝을 따라 잡초가 무성한 폐차장 입구로 걸어갔다. 머리 위 고가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은 모터가 달린 난파선처럼 움직였고, 차체 도장은 헤지고 탁했다. 운전자들은 운전석에 뻣뻣하게 앉아, 아무 의미 없는 옷을 입힌 마네킹을 실은 공항버스를 추월했다. -p272-273
이들의 뒤틀린 욕망과 권태에 약간의 동정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한낱 인간의 욕망을 이렇게 멋지게 글로 묘사한 작가가 대단해보였다. 읽는 내내 숨이 막히고 어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