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 광대
권리 지음 / 산지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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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래부터 식탐이 많은 편이다. 어려서는 가난했고 형제들이 많아서 주식이든 간식이든 정확히 1/n으로 나눠지는 음식량에 만족하지 못했다. 자라서는 일찍 집을 떠나 혼밥에 익숙해지고 내가 차리지 않으면 다 맛있는 게 됐다. 음식에 까탈스런 편도 아니고 섬세한 미식가적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두루 잘 먹는 게 최고라고 여겼다. '복스럽게 잘 먹는다'는 말은 한때 나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게 진짜 내 장점 중의 하나인 줄 알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읽은 <폭식광대>는 먹는 걸 좋아하는 내게 음식과 먹는 행위 모두에 다분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먹성 좋은 내가 보기엔 너무나 폭력적인 이야기였다. 음식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잠깐 안을 들여다 보자. 네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기기묘묘한 소설집을 위해 작가는 13년을 별렀다고 한다. 그만큼 이 세계에 대한 시선도 독특하다. 피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와 장 콕도 감독을 떠올리며 시작되는 <광인을 위한 해학곡>은 그 비틀기가 대단히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해파리>와 <구멍>에서도 작가는 비정상적인 현상을 통해 불연속면처럼 어긋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비유적으로 그려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역시 표제작인 <폭식광대>였다. 38kg에 불과한 남자가 보여주는 거대 먹방의 세계는 온갖 빨리 먹기, 많이 먹기 대회를 접수하고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창자의 진액까지 다시 게워낼 수밖에 없는 고달픈 남자의 일상과 등을 맞대고 있다. 결국 그는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본의 아니게 타인의 삶을 위협하게 되고 사자후 같던 그의 목소리는 콘크리트 가운데 사장된다. 죽어서조차 박제인간으로 전시상품화된다. 세상은 인간이 가진 불안과 두려움에 안심의 콘크리트를 부어버림으로써 끊임없이 소비하는 생활이 가져올 불편하고 노골적인 세계에 대한 가림막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혀, 고래, 수프, 도둑과 실처럼 고독했을 개인의 감정 따윈 애시당초 언급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음식에서 맛을 음미하지 않고 시각적으로 현혹하여 보여지는 것, 그 자체에 탐닉하는 현대인들은 모두 폭식광대의 무리에 해당될지 모른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온갖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만(폭식) 정리되지 않은 채로 반입된 정보는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뒤엉켜버린다(소화 불능). 적재적소에 갖다대지 못하고 우두망찰하는 현대인. 하지만 낯선 타인 앞에선 그 정보가 다 자신의 것인 양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다시 쏟아내는(구토) 우리가 바로 폭식광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추천해주신 분의 멘트는 이러했다. '작지만 무겁고, 재밌지만 슬프며, 이상하지만 외로운...책'이라고. 나는 여기에 더할 말을 한 마디도 더 찾아내지 못하리란 걸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게걸스럽게 책을 읽어도 산출이 안 되는 내가 폭식광대로 화하는 지점.

카프카의 <단식 광대>를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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