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대표작 2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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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산다. 그들은 전 존재를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드린다. 그들은 처절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잊고 예수만을 바라보며 그의 길을 따른다.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의 부르심 앞에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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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예배 -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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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기독교적 찬가. 삶이 지리하고 멸렬하게 느껴질 때 일독을 권합니다.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던 삶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가지런히 정렬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이 실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필치도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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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이길보라 저자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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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에 실린 스물한 편의 글은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강도로 나를 시험했다. 때로는 감성적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 또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이길보라가 제출한 시험 문제는 이렇다: 당신은 공감한다고 얼마나 착각하는가? 작가의 시험에 직면하여 나는 나의 공감을 공감이라고 불러도 될지 한참 고민했다. 아마 이 고민은 끝나지 않을 듯하다. 아마 이게 작가가 의도한 바인 것 같다. 절대, 공감한다고 착각하지 말 것.

 

2. 공감한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한 첫걸음으로, 나의 무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낯선 어휘들을 마주해야 했다. ‘농인(聾人)’의 상대어로서 청인(聽人)’, 농인의 자녀를 일컫는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 정신적인 문제나 알코올·약물 의존을 가진 가족 등을 돌보고 있는 청년을 일컫는 영 케어러(young carer)’, 한국어나 영어처럼 독립된 언어로서의 수어(手語)’ .

 

3. ‘나는 왜 이 어휘들을 몰랐을까.’ 생각하다 보면 근본적인 질문에 가닿는다. ‘우리는 왜 무엇은 알고 무엇은 모르는 걸까.’ 지식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여러 이론이 있을 테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지식 습득의 계기는 세 가지가 있는 듯하다. 첫째는 당사자성이다. 이길보라가 코다로서 농인 사회에 깊이 개입한 것처럼, 재일조선인의 자녀로서 디아스포라의 투쟁과 연대에 힘쓴 김민관 변호사처럼(디아스포라로서의 코다), 어떤 지식은 그 지식이 형성된 장() 안에 당사자로서 개입할 때 구체성을 띠게 된다. 두 번째로 지식 습득의 계기가 되는 것은 바로 관심이다. 이를 통해 습득한 지식은 당사자성을 통해 습득된 지식보다 구체성이 덜하다. 가령 이길보라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은 사람은 농인 사회 또는 코다의 삶에 대해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농인 사회·코다를 다루는 다른 영화를 찾아보고 다른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농인 사회와 코다의 삶을 보다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농인 사회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지식 습득의 세 번째 계기는 교육이다. 교육은 관심보다 자발성이 적게 요구되는 지식 습득 동기이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농인 사회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당사자성·관심을 동기로 해서 얻은 지식보다 실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은 듯하다.

 

4.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나는 코다에 대해, ‘농인에 대해, ‘영 케어러에 대해, ‘수어에 대해 몰랐던 걸까? 앞선 논의에 따라 세 가지 답을 내놓을 수 있겠다. 1)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고, 2)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3)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첫 번째 계기는 자발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기에 차치하고나의 무지는 (개인)’의 무관심과 사회의 무관심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길보라는 장애인의 이동권과 시설을 다루는 대목에서(지도를 제시하는 언어)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시설이 인권침해의 온상이었음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시설운영자, 장애인의 가족, 국민 등 4자 간 침묵의 카르텔 때문이다(101). ‘침묵의 카르텔에 속한 나는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수면을 보며, 이 사회는 그럭저럭 살만한 곳이라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왔다. 그러한 믿음에 도전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마녀가 나타났다, “폭도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이단이 나타났다고 외치며 그를 외면했다(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4. ‘침묵의 카르텔에서 빠져나오려면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은 그 카르텔의 틈을 발견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다. 그 틈으로 들려오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깨닫는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고요는 소리가 없는 곳에서 자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없애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도 충분히 제거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다시 그곳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공감으로 서로를 묶어야 한다. 서로를 묶은 곳이 귀찮게 여겨질 건 뻔하다. 맞닿은 살갗이 쓸리고, 땀이 차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뜨거운 피부, 때로는 소름 끼치게 차가운 피부. 감내해야 할 불편함은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수많은 목소리가 난장(亂場)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과 난장판이 윤리적 귀결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고 감내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5. ‘침묵의 카르텔을 감싼 카르텔 밖의 수많은 목소리. 그 목소리들은 장기간의 공성전을 치르고 있다. ,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공성전을 치르고 있다. 카르텔 밖 목소리들은 침묵의 카르텔에 의해 캠프(camp)·부락·시설 등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들의 성벽을 허무는 역공성전을 치른다. 그들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침묵의 카르텔은 그 성벽을 더욱 공고히 쌓으려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부락 밖의 사람들이 오히려 부락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이렇듯 차별과 혐오는 바깥으로부터 온다.(125)

 

일본의 피차별 부락에 거주하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인용하면서, 이길보라는 차별과 혐오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그것은 언제나 바깥으로부터 온다. ‘외부가 만든 내부를 내파(內破)시키기 위해 그들은 연대한다. 그들의 고통에 언어를 부여한다.

 

5. 한 사람의 코다로서, 이길보라는 민족적·문화적·성적 소수자들과 연대를 꾀한다. 그들과 연대하여 고통에 공감한다는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11)에 맞선다. 하염없이 납작해지려는 세상에 맞서, 그는 펜을 들고 카메라를 든다. 그는 가장 사적인 것이 정치적일 수 있다라며 사적 다큐멘터리를 계속 이어간다. 젠더 불평등적인, 폄훼의 의도(“사적 다큐멘터리라는 분류는 젠더화되어 있으며, 은연중에 그 다큐멘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덜 중요한 것’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 정수은의 글 재인용, 193)가 다분한 그 말을 적극적으로 전유하여 관습과 체제라는 어렵고 복잡하고 감히 간들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개념을 가장 거세게 흔들 수 있는 도구”(201)로 만든다.

 

6. 나는 장애인이 아니고, 여자가 아니고, 성 소수자가 아니고, 종교적 소수자가 아니고, 노인이 아니고, 극빈층이 아니고,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이주 노동자가 아니고, 난민이 아니고, 영 케어러가 아니고…… 내가 아닌 것의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이 목록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아니다. 우리의 연대는 이러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7. ‘나는 당신이 아니다.’ 이 말에는 당신이 포함되어 있다. , 나는 내가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우리 삶이 그런 조건들로부터 해방될 수 없기 때문이다.”(주디스 버틀러, 김정아 옮김, 비폭력의 힘, 문학동네, 2021, 66) 우리가 해방될 수 없는 조건들, ‘당신들은 그 조건들의 근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타자로서 만난 우리는 요란하고 시끄럽게 서로를 알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침묵이라니. 이 불안한 침묵이라니. 오늘날 우리의 침묵은 편안하고 고요한굳이 소리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소리 없음의 상황인지, 위태롭고 기괴한하나의 큰 목소리로 여러 목소리를 잠재운소리 없앰의 결과인지 치열하게 따져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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