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무게
에리 데 루카 지음, 윤병언 옮김 / 문예중앙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자신도 모르게 긴 호흡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 있다.  글을 읽기 시작한지 채 몇분도 지나지 않아 어느새 한문장, 한문장 의미를 짚어가며 읽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글.

에리 데 루카의 <나비의 무게>도 그런 종류의 소설이다.  130페이지가 되지않는 단편에 가까운 글이지만, 그 안은 이미 충분하게 채워져 있다. 

산양들의 왕과 산양을 사냥하는데 능수능란한 사냥꾼은 둘 다 산양 왕으로 불린다.

이들의 관계는 사냥꾼의 성실함과 날렵함으로 인해 산양 왕의 가족들이 포획되는 순간부터 원수지간으로 엮이게 되었지만, 이 둘은 서로 닮은점이 참 많다.

산양 왕은 짐승이고, 사냥꾼은 사람이지만, 그들이 겪은 상처와 그것을 이겨내며 살아온 방식은 무척이나 닮아있다.

가족을 잃은 후부터 산양 왕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고, 헤쳐나갔다.

젊은시절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까지 치르고 난 사냥꾼은 산속으로 들어와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사냥꾼 역시 혼자서 모든 것을 견뎌냈다.

사냥꾼이 겪은 그 참혹한 사건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지만, 사냥꾼이 다시는 생각하기도, 돌아가기도 싫을만큼 인간에게 환멸을 느낀 사건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둘은 같은 산 아래에서 서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각자의 삶은 성실하게 살아 낸다.

그렇다.  그것은 기쁨에 들뜬 삶들이 아니다.  살아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담담하고, 묵묵하고, 성실한 일상이다.

그렇게 20  장장 20년을 살았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옴을 느끼는 이 가을.  그들 둘은 자신들의 삶을 정리할 때가 온 것을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조용히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대비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담당하게 그것을 맞을 준비를 한다.

스스로 이번 겨울이 마지막 겨울이라는 것을 느끼며 지내오던 어느날, 마지막 사냥을 위해 산을 오른 사냥꾼과 마지막 겨울을 조용히 지낼곳을 찾으러 나온 산양 왕은 산 중턱에서 만나게 된다.  마주친 것은 아니다.  사냥꾼은 산양 무리떼를 향해 바위위에 엎드려 총을 겨눈채, 산양 왕은 사냥꾼이 엎드린 바위의 바로 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사냥꾼을 뛰어넘은 산양 왕의 마지막 점프는 아름답고 숭고했다.  본능적으로 산양 왕에게 총을 쏜 것을 후회하면서 산양 왕을 등에 짊어진 채 심장 박동이 멈춘 사냥꾼은 신비로웠다.  나비 한마리가 날아와 이 들 둘의 무게에 가벼운 날개의 무게를 더했을 때, 모든 것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채로 발견된 그들은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말로 다 표현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이 감탄스럽다.

에리 데 루카라는 작가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나비의 무게>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 벌써 그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