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글쓰기의 속성 중 하나를 알 것 같았다.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글쓰기는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는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 여러 편의 글을 쓰는 사이 우리에게는 체력이 붙었다.
부지런히 쓸 체력과 부지런히 사랑할 체력. 이 부드러운 체력이우리들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수호한다고 나는 믿는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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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센터 건너 늘어선 주택
큰 개 순하게 매여 있네
짖을 타이밍을 잊은 개는
긴 혀를 빼물고 헐떡인다
너의 몸 어디선가 고요하게
자라고 있을 거야 - P12

시간은 나를 거들떠보지 않아요

누군가의 고통이
정말 나를 아프게 하나
나는 누워 있는 이름을 스쳐간다 곁눈질 몇 번
계절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고
봄은 한 바퀴 돌아 - P14

뭐가를 지켜내고 싶다면
오래 닫아야 하며
가장 막다른 곳에서
길게 열어야 한다.
- P27

눈앞이 어지러울 때
너의 기억을 한 모금 나눠주렴
내 손으로 먹을 딴 피 흘리는 친구여
세상은 입맛을 다시며 다가오네 - P55

까마득한 아래, 자동차와 유모차가 지나다니고 찡그린 얼굴과 미소가 날아다녀 하지만 태양에 손이 닿진 않지
바람이 스치는 날엔 의심이 들어
나는 하늘에 서 있는 걸까 땅 위에 서 있는 걸까
촘촘한 시간 속을 날아다니는
영혼들은 몸이 아니라 정체성이 투명하다 - P66

이 몸이 도대체 적응되지 않는데, 넘어지는 그림자에 손을 내밀지만 펴지지 않는 주먹, 당신을 부수어도 됩니까. 얼음 바닥에 비친
내가, 순간 붉어지는 꽃, 아주 오래 작아지는 생. 정중한 신사들이 왈츠를 추는 숲, 같은 자리에 붙박인 다리, 누군가 아이를 낳았나? 나를 조여드는 리본, 커다란 나무들이 솟아나고 숲속엔 아기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어. 어, 달빛에 반짝이잖아. - P69

벙어리로 내 이름 말하고 몸서리치는 밤,
새로운 그림자를 달고 일어나고 싶어요.
어른들이 개머리판을 만들 호두나무를 찾아다니고 나는 아직 죽지 못했어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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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내가 못 쓸 때 시 같았다.
시는 내가 안 쓸 때 비로소 시 같았다.

그랬다.
그랬는데,

시도 없이시집 탐이 너무 났다.
- P5

못생긴 건 둘째 치고서라도 헐벗었기에 너는
생강
모든 열매 중에
가장 착하게 똑 부러져버릴 줄 아는
생각 - P73

양망이라 쓰고 망양으로 읽기까지

메마르고 매도될 수밖에 없는 그것

사랑이라

오월의 바람이 있어 사랑은

사랑이 멀리 있어 슬픈 그것* - P86

소리나는 그대로 적었을 말
들리는 그대로 적게 됐을 말
그러니 참 정직한 말
그런데 빨간 밑줄 쫙 가는 말
아니라는 말
틀렸다는 말
이 말이라는 말 이
색소폰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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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는 일이라면, 우리의 슬픔은 하나의 단어가 되기 위해 꺾이고 휘어진 시간의 모서리 때문일 것이다. 그 문장 속에는 오탈자처럼 엇나간 글자도 있을것이고, 쓰다가 직직 그어버린 문장도 있을 것이며, 지우개를 빌려처음의 흔적까지 모조리 없애버린 행간도 있을 것이다. 어느 자리에선 너무 문질러서 세계의 바닥이 찢겨버린 일도 있겠지. - P10

마음은 묘하다. 아무것도 모르겠는 것이 한순간 다 알겠는 것이되기도 하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전혀 모르는 것이었던경우도 있다. 봄 날씨보다 빠르게 변하고 어떤 기적보다 더 놀라운것들이 다녀간다. 내 몸이 하나의 블랙홀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오직 내 몸속에 저 마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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