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다 괜찮다 - 공지영이 당신에게 보내는 위로와 응원
공지영.지승호 지음 / 알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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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공지영을 읽었을 때 <고등어>였던가 <무소의 뿔처럼>이던가 그랬을 것이다.

한참 운동권 뒷담화로 문단이 시끌벅적했을 때였다.

그런데 나는 최영미의 시집이 좋듯 공지영의 소설도 좋았다.

문학적인 완성도? 나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한 젊은 영혼이 통과해온

80년대의 풍경이 와닿았고 그걸 뽑아내는 것이 추억의 언어이든 자위의 언어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확실한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0년이나 지났구나

어느새 공지영은 큰 대어급 작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지영은 자아의 창을 열고 과거의 문을 닫고 현재의 이슈들과 만나고 있었다.

나이로는 중견이지만 공지영의 소설은 막 세상에 발을 디딘 작가의 그것처럼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허리에 묶은 고무줄이라도 있는 듯이 늘 출발했다가 다시돌아왔고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했다. 여기엔 이를 악무는 고통과 스산함과 시원함이 다 들어있다.

이번 책에 작가가 살아온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있다. 학창시절, 가족얘기, 글쓰는 얘기

여전히 공지영은 서툴다.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이것은 그녀가 늘 다시 시작하는 작가라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좋다. 항간에서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도 아마 자신을 존중하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힘찬 노젓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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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 기적을 만든 한 정신과 의사 이야기
이브 A. 우드 지음, 김무겸 옮김 / 글항아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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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오늘은 영하 5도까지 내려갔다. 체감온도는 더 밑이다. 뽑을만한 대통령은 없고 기름이 서해를 덮어서 많은 생명체가 죽었다. 어민들은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 이런 상황을 머라고 하나. 총체적이긴 하지만 너무 멀리 느껴지는 실망이고 너무 크고 넓어 감각되지 않는 아픔이다. 그래서 상황이 이런데 나는 집에 앉아서 책이나 읽고 있다.

 
그것도 역설적인 '희망'이라는 책이다. 미국의 정신과 여의사가 20년간의 상담기록을 적어내려간 책이다. 그녀는 어떤 확신에 휩싸여서 이 책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절망을 이기는 희망, 어둠 속의 빛, 모두이면서 하나인 것이 그녀가 바라보고 걸어가는 대상이다.
 
저자 이브 우드가 개인병원을 열고 처음으로 만난 환자는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질리였다. 저자와 질리는 무려 15년 이상을 함께 하고 있다. 처음 질리는 10여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뿐이다. 바로 질리 자신이다. 치료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질리와의 경험은 저자에게 매우 특별한 것 같다. 질리는 20여년간 다른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상태는 심각해졌다. 한마디로 현대정신의학이 포기한 중증 정신병자가 바로 질리였고, 그녀는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 손길을 저자에게 내밀었다.
 
신참 의사가 처음부터 대어급을 떠맡았으니 오죽 힘들었을까. 게다가 수시로 자아가 바뀌는 사람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찾아나가려니 그 드라마틱함이 베스트극장 찜쪄먹는 수준이다.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말라는 결별선언도 있었고, 칼과 로프를 압수하기도 했으며 안정제 한통을 털어넣은 날은 응급실에서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리고 덜컥 겁이났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겁이 났다. 나도 다른 의사처럼 약물로 더 악화되지 않게만 해야하는 것 아닐까? 길을 걷다 길이 막혀 고개를 드니 돌아가는 길이 보인다.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영혼의 눈을 뜬다. 영혼의 눈은 입을 열어 말한다.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 모든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을 바꿔들고 열쇠처럼 벽에 꽂았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이런 걸 어둠 속에서 길찾기라고 해도 되나?
 
생각을 바꿔먹으면 인간에겐 알 수 없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그 힘은 전염력도 강하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설득력은 앞의 사람이 아무리 감각을 막아놓아도 뚫고 들어갈 틈을 찾는 것 같다. 이 책엔 질리 말고도 자신의 문제를 풀지못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변호사도 있고 CEO도 있고 여교사도 있고 가정주부도 있고 대학원생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내가 겪은 것도 있고 앞으로 겪을 것도 있는 듯하다. 나는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막혀서 좌절했는지 흥미롭게 관찰했다. 막힌 부분은 다시 털고 일어서는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이 위로가 된다. 저자가 그 부분을 향해 집약적으로 달려가고 단계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단계적이라 함은 이 책을 관통하는 '세의자 다리 모델'을 말한다. 육체, 정신, 영혼을 차례로 밟아 올라가며 질병의 발견, 도전, 치유, 해방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게 '세의자다리 모델'이다.
 
책이 두껍지만, 끝부분에는 환자들이 직접 들려주는 고난극복기가 실려있다. 그래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부분은 또 다른 색다른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치료를 하는 자와 받는 자의 육성이 앞뒤로 붙어있으니 소외되는 사람은 없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가 이 겨울을 따뜻하게 하는 전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근감 있다.
 
좋은 책이다. 국내 사례가 아니긴 하지만, 전문가들이 읽으면 인간의 상처와 건강한 영혼을 위한 분석적인 담론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고, 나같은 일반인들에게도 진지함을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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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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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책을 읽었다.

본론도 좋고 인터메조도 좋았다.

몇가지 묘한 심리적인 경험도 했다.

불과 몇년 전에 동양철학계에선 노자의 철학이 서구 근대성을 넘어서는

포스트모던의 철학이라고 떠들썩하게 토론하던 일이 있었다.

물론 장자도 한자리 꼈지만 노자의 아류로서였다.

그때 서양철학계에서 쪽박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학자 김진석이 동양철학자들이 너무 몽롱한 소리들을 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노자는 국가주의의 완성자이다.

장자야말로 차이와 독립 개체들의 연대를 실천하는 철학자로 조명된다.

그리고 김진석의 기어서 넘는다는 포월은 강신주가 즐겨 인용하는 논거로 등장한다.

강신주는 동양철학계의 단독자이자 이단자다.

그것이 과거 80년대 김용옥과도 같은 파워로 공감대를 얻어낼 것인지

자못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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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길을 품다 - 풍찬노숙에 그려진 조선의 삶과 고뇌
최기숙 외 지음 / 글항아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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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낭만적인 단어다. 그걸 떠올리면 부드럽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원경의 하이웨이나, 티베트 고원을 빙빙 감아 도는, 마치 그렇게 걷다가 내 전생으로까지 가 닿으면 어쩌지 싶을 만큼 아득하고도 아득한 선이 그어진다. 하얗게 표백된 건조한 이미지 속엔, 인간의 흔적 또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길은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길의 조형적 아름다움이란 흔적, 적층, 소멸과 같은 역사적인 공감각과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이번에 『역사, 길을 품다-풍찬노숙에 그려진 조선의 삶과 고뇌』라는 책을 보면서 자꾸만 그렇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길은 원래 없었다. 토끼가 지나간 길을 사람이 따라가서 생긴 흔적이, 그런 우연이 몇만번이 겹쳐져야 길이 생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걸었을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길 위에 흘린 생각들은 걱정들은 또한 오늘날의 우리의 경험과 상상으로 다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길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을 관조적으로 쳐다보거나 할 때마다 신기루처럼 자꾸 내 시야를 어지럽히던 것이 드디어 무엇인지 생각난다. 길이 휘고 꺾이고 오르내리는 모든 모양을 따라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두 자기 사연을 지니고 있는 유령들이다. 나는 자꾸만 길에 철퍼덕 주저앉은 유령들이 있는 것만 같다.



이 책은 물론 이런 공상에 가까운 사변을 읊어놓은 책은 아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걸어 다녔던 과거길, 요양길, 장례길, 휴가길, 첩보길, 암행어사길, 장길과 보부상길, 상소길, 마중길, 유배길 등이 소개된다. 가령 휴가길은 조선시대 하급관리 황윤석이 죽을 똥을 싸면서 격무에 시달리다가 어머니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도망쳐 내려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배길은 조선후기의 화가 조희룡이 유명한 문인 집에 드나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떠나는 내용이고, 상소길은 집권 서인세력에 의해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철폐당할 위기에 처한 한 안동 양반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서울로 달려 올라가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있고, 그가 실제로 걸었던 일정을 미세하게 따라가면서 복원해놓은, 소설같기도 한 역사책이다. 상소길의 경우 서울에 올라간 안동 양반들이 짚신이 닳도록 인맥을 동원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져있는데, 오늘날 국회의원들이 공천받기 위해 상도동이나 연희동을 뻔질나게 다니는 장면과 겹쳐서 보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흥미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치 어딘가에 그런 길이 독립적으로 10개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이 걸었던 길은 대부분 겹쳐진다. 물론 압록강을 건너 적의 눈을 피해 만주의 험한 산을 기어다니는 첩보길과 집앞을 사보작사보작 다니는 마중길은 다르지만, 나머지 길들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낙향하거나,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삼남대로가 주무대다.

 

 

 

공간과 여로는 똑같지만 길을 걷는 목적이 달랐고, 그 길 위에서의 삶이 달랐다. 길은 이 모든 흔적을 껴안고 흘러간다. 그렇게 좁은 길이 넓어지고 넓어지다가 이제는 아스팔트에 뒤덮히고 현대적인 구획에 따라서 소멸되기도 했다. 때론 아스팔트를 보고 있어도 그 위에 서린 역사적 삶들의 무수한 외침이 느껴지는데, 안동의 새재나 죽령 같은 곳에 남은 옛길을 걸어면 얼마나 모골이 송연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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