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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노트
김규항 지음 / 알마 / 2020년 2월
평점 :
반가운 책이다. 아주 오랜만에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쉬지 않고 읽었다. 요즘은 지적인 무장을 하지 않고 계급투쟁에까지 나서는 시절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며, 주로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장사 치러버렸기 때문일 터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언어학적 원리를 세상만사에 난사하며, 아리까리한 주장에 아사무사한 주장을 덧대고 포개놓으며, 지식시장을 과점한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은 대의와 보편을 쪼개서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나 인종이나 지역처럼 서로서로의 유대는 느슨하지만 그리하여 눈앞에서는 삼삼한 정체성 투쟁들로 흩어놓았다. 오늘날 대의를 입에 담으면 틀딱이나 촌뜨기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한마디 하자면, 마르크스는 보편적 자유를 정치투쟁의 장에서 다루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오늘날에도 자유의 핵심적인 문제는 정치의 외부, 즉 지구시장에서 소시민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사회관계의 “비정치적인” 그물망 속에, 다시 말해, 하다못해 투표로라도 정해지지 않았고 자본주위가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가망이 없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이지 못했던 과거로부터 지금껏 무비판적으로 유지되어온 관계들 말이다. 소유, 증여와 상속, 사회 전반에 산재하는 암묵적인 예속과 지배, 인민이 정치로부터 배제된 인민 없는 민주주의 등등. 포스트모던 지식인들과 민주당 같은 한국의 자유주의 개혁우파들의 “현재의 민주주의를 보완하고 심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이 환상이거나 속임수인 까닭이 여기에 있고,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생산관계에 개개인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비현실적인" 주체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러한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관계를 구성(혁명)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김규항은 간결하고 선명하게 드러냈다. 코로나가 들이닥쳤다. 지구적 역병이 시장의 지구적 밀착에서 비롯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병원 마이싱 주사 한 방 맞을 권리의 유무에 약자들의 생사가 엇갈리는 유럽과 미국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각국의 정치체제들이 소위 주권자들의 생존보다 자본주의의 생존을 우선시한다는 현실에서, 그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상표일 뿐이라는 진실이 새삼 명백하게 드러났다. 코로나 때문에 자본은 하체가 경련하고 심장이 쫄깃거릴 터이다. 김규항의 <혁명노트>에서 얻어야 할 교훈의 하나는 “자본은 흡혈귀”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새겨들으라는 충고인 듯하다. 자본은 희생자의 피가 없으면 쓰러진다. 코로나 재난에 즈음하여 <혁명노트>에 내 멋대로 부제를 하나 붙여본다면, 그것은 “경제적 거리 두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