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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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여러 가설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원시 수프> 가설이 있다. 지구 상에 존재했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은 수많은 무기물이 뒤섞인 원시 수프와 같은 형태에서 출발했다는 가설인데, 무기물이 유기물로 진화하고 유기물이 형태를 지닌 생명으로 진화한다는 상상이다. 심연의 청색 혹은 아직 빅뱅의 열기가 식지 않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적색의 바닷속에 DNA 형태로 끝없이 부유하고 헤엄치는 무수한 무기질과 유기질들. 어느 것이 어떻게 진화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질료(質料)로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생명의 기원이 될 가능성을 모아둔 거대하고 총체적인 집합체가 있고, 그 집합체에서 꺼내어진 개별적인 존재가 생명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합과 개별이 있는데,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는 것은 개별이지만 결국 개별은 집합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생명 이전에 생명으로 넘실거리는 거대한 '집합'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무엇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응집된 ......

2013년 악동뮤지션으로 데뷔하고 올해 9월 정규 3집 앨범을 발표한 이찬혁 작가의 <물 만난 물고기>를 읽으며, 소설 속 군상들은 거대한 원시 수프 위를 항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주 흐뭇한 생각이었다. 악동뮤지션 시절에 톡톡 튀는 노래와 가사로 주목받았던 그였지만 그런 재기발랄함은 동시에 저것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할까? 이런 의문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9월에 발매한 정규 음악 앨범과 그 앨범의 예술적 기원이 되었던 이 소설을 교차하며 동시에 읽어보니 그런 의문은 점차 기우에 가까워진다는 확신이 든다. 악뮤라는 음악가 내면에는 조용하고 깊숙하게 흐르는 예술의 원시 수프가 흐르고 있다. 그 원시 수프로부터 꺼내어진 것이 어떤 예술로 진화해 갈 것인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음악으로 어떤 경우에는 이처럼 텍스트로 표현될 것이니, 그렇게 보면 이들이 회화나 조각이나 건축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을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전혀 놀랍지 않다. 중요한 건 어떤 도구로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흐르는 거대한 예술의 바다니까. 그들은 바다를 지닌 예술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나를 사로잡은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노래만 잘해도 가수는 될 수 있어. 하지만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해."> 노래를 잘하는 가수. 그걸 생명을 지닌 개별의 존재라고 생각해보자. 반면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 그건 표현해야 할 것이 있는 무언가를 끝없이 보유한, 집합의 존재에 가깝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름답고 위대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반드시 그것이 태동한 예술인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의 위대함이 어떤 묶음에서 풀려나와 밖으로 던져진 것인지 그 기원을 궁금해해야 한다. 그 궁금함에 언제나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한다. 아마 저 문장은 이찬혁 작가의 자기 선언문이라고 봐도 좋겠다. 어떤 음악 색채를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끝없이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바다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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