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그림책 - 우리는 그림책을 함께 읽는다
황유진 지음 / 메멘토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어른의 뜻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다 자랐다는 것은 언뜻 몸이 다 성장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키가 크고 골격이 벌어지고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어느 나이가 되면 조금씩 멈추기 마련이나 정확한 경계선은 찾기 어려웠다. 어제까지는 키와 몸무게가 늘었지만 오늘부터는 성장의 모든 문(門)이 닫힌다, 그런 지점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자란다는 것의 범위를 신체에서 정신으로 넓혔을 때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는 더 심해졌다.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하며 완성된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서른 다섯 해 동안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이 정도면 조금은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겠다는 내일을 슬쩍 넘보았던 정도지, 나의 정신은 언제나 불확실했고 불안정했다. 나는 여러 모로 다 자라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 다음의 문장.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그 문장까지는 차마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이것이 어른이 마주한 어른의 정의였다.

<그림책>. 역시 사전에서는 <그림을 모아 놓은 책 또는 어린이를 위하여 주로 그림으로 꾸민 책> 이라고 그림책을 정의한다. 그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그림을 모아 놓고 그림으로 꾸민 책, 맞다. 그러나 어린이를 위하여 그림책이 쓰인다는 건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네 살 딸 아이는 잠들기 전 항상 다섯 권의 그림책을 읽고 잔다. 기분이 내키면 몇 권 더 읽고 잠에 든다. 아이와 나란히 앉아 때로는 엎드려 그림책을 읽다 보면 옆에 아이는 블랙홀처럼 사라지고 없고 나와 그림책만이 존재하는 묘한 경험을 종종 한다. <고함쟁이 엄마>에서 엄마가 아이를 혼내고 그 아이의 몸을 실로 꿰매어 붙일 때, <그러던 어느 날>에서 주인공이 옷을 모두 벗고 식물과 일체감을 느낄 때, <알사탕>에서 동동이가 할머니와 풍선껌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 그 순간의 그림책은 어린이가 아닌 나에게 연결되어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했다.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 어딘가의 과장이라는 정의와 함께 서른 다섯 살이라는 데모그라픽한 정의가 내게 투영되었지만 가끔 그림책을 읽을 때는 그런 정의들이 모두 씻겨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 어려지는 것 같았다.

<어른의 그림책>. 사전적으로 구현된 정의와 실제 현실에서의 온도가 이토록 간극이 큰 두 단어가 만났을 때, 그건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솔직한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결코 다 자란 적이 없었고 어쩌면 다 자란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책 짧은 生을 마감할 것이라고.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위치한 존재이고, 어른은 바로 자신이 끊임없이 불확실함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소년(少年)임을 자각한 존재라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정신 속에 그처럼 위험하고 제어 불가능했던 소년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주 가끔은 그림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잊고 있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고,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것을 아주 조금은 자각하게 될 거다. 작가는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에 들어가 대학에서 시를 읽고 썼고 대기업에서 10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두 아이를 낳고 지금은 어른들과 그림책을 함께 읽는다. 이 숨가쁜 여정만으로도 다 자란 삶이란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내 안에는 소년이 살고 있다. 그림책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것을 다시 확인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