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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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회사를 다니는 우리들에게 연말 연초는 참 중요한 시기겠지. 연말에는 한 해의 성과를 평가하고 또 연초는 새로운 한 해의 계획을 수립하고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대한 구상도 쏟아져 나올 시기인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직원들의 이동이 맞물리는 시기라서 그렇지. “어느 팀에 있던 누가 어느 팀으로 이동한다더라, 오랫동안 회사를 떠나 다른 계열사에 가 있던 그 친구가 다시 친정에 복귀한다더라, 팀장이 이번에도 누구를 놓아주지 않고 이동 안 시켜준다더라, 거기 몇 년 째야 그럼? 꼭 지박령 같네”, 이런 이야기가 무수히 돌고 도는 가운데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이동을 하지. 이제 회사에 입사한 지 만 9년이 지났는데, 9년 동안 이동의 소용돌이를 지켜 보며 깨달은 건, 직원들의 이동 시장은 아수라와 같이 혼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회사는 굴러간다는 거야. 그 직원이 없으면 이제 그 조직도 운명을 다하겠구나 싶은 순간에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조직을 유지하고 성과를 내는 법이었단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어떤 조직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순간을 맛보았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어냈던 누군가가 있을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개별자로 여겨졌거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곧 조직과 동의어인, 그래서 누구나 그를 뚜렷이 식별하고 기억하여 개별자로 존재하는 사람이 분명 몇 명은 있었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조직을 떠나갔음에도 조직이 영속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실제로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했던 걸까 – 소설에서 레이첼 로즌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안드로이드의 고백과 같이 – 약간은 허무한 생각도 들었단다. 그러니까 뭐랄까,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은 기계 부품이라고까지 스스로를 비하하진 않았지만, 조직을 이루는 한 요소로서 너와 나의 구분이라는 건 사실 굉장히 허황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우리 사이에 구분이 없다. 우리는 같은 직원이다.

그래서인가 ……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1968년 作)>을 읽었을 때, 앞서 이야기한 안드로이드 레이첼의 고백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어.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인간과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결여된 안드로이드의 대립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내가 주목한 건 존재와 존재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는 상황들이었어. 안드로이드를 식별하려고 개발한 테스트는 그 정확도가 100%는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식별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인간이 아니라고 지목된 이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구분이 흐려지는 셈이지. 인간은 모두가 <감정이입 장치>를 통해 선지자 머서와 하나가 되고, 반대로 안드로이드는 모두가 인기 TV 프로그램인 <버스터 프렌들리>를 시청하고 있어. 레이첼 로즌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레이첼 로즌이라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똑 같은 모습과 성격으로 프로그램 된 수 많은 안드로이드 중 하나에 불과하지. 그들 사이에 구분이란 없었어.

이런 소설을 우리는 흔히 SF 소설이라고 구분하지. SF(Science Fiction)소설. 캐나다의 저명한 SF 작가인 로버트 J. 소여는 SF를 “현재에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루는 장르” 라고 정의했다고 하지. 그러니까 1960년대 필립 K. 딕이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 분명 안드로이드라는 개념도 없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경찰차, 감정 이입 장치, 인공 동물, 영상 통화 장치 따위의 것은 분명 없었겠지. 아마 이러한 개념을 생각해내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거야. 2019년을 통과하는 이 순간에, 2069년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런데 더 상상하기 어려운 건 과연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거야. 달리 말하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존재할 것인가, 이런 말과 같겠지. 얼마나 쉽고, 편리하고, 간단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즐겁게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그러한 삶이 도래했을 때 사피엔스라는 생명은 과연 무엇으로 다른 생명과 비교하여 사피엔스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인지, 이런 질문을 마주하면 단지 즐겁다기 보다는 조금은 섬뜩한 기분마저 들어.

그래서 나는 SF소설,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분류되는 것들은 조금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어. 아까 "SF소설은 현재에는 없지만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룬다" 이런 이야기를 했지. 지금 통용되는 규범, 기술, 문화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공간을 상상하여 창조하고는, 이런 삶 또한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수 많은 가능성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거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안드로이드, 실제 양과 전기 양을 명확히 구분하고 식별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존재는 무엇으로 그 존재라고 불릴 수 있는가, 이 소설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지. 소중한 질문이야. 누군가 그 질문을 떠올리고 표현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우리는 미래의 우리와 큰 구분이 없을 거고,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어떻게든 이전과 같이 유지되고 시간이 흘러갈 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SF소설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기 보다는, 현재를 조금 낯설게 만들어주는 거였어. 낯설게 느껴진 순간, 이전과 같아질 수는 없으니까. 이전과 같지 않다면 적어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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