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95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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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가장 고민스러운 지점은 책을 다 읽었을 때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다음은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할 때는 간신히 무언가, 누군가를 이정표 삼아 다음 목적지까지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책을 둘러싼 여러 지표들이 다음 목적지까지의 이정표가 되어 준다. 작가, 출판사, 번역가 ...... 최근에는 몇몇 평론가도 책을 읽는 여행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신형철 평론가가 추천사를 쓴 책, 혹은 해설을 남긴 책을 의도적으로 선택했고, 그에 대한 나의 경건한 마음만큼 경건한 자세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사람의 리듬은 모두가 다른 법이었고, 이 다른 것에는 옳고 그름의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 받고 책을 추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리듬에 어울리는 책이 있고, 어울릴 때에야 비로소 그에게 옳은 책이 될 것이었다. 옳은 것은 상당히 상대적이다.

누군가에 기대어 책을 읽는다는 것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나는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을 달은 조용미 시인의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 2011) 시집을 읽어 보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이 시인이 들려주는 고요하고 쟁쟁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 그토록 감사했다. 시집을 다 읽고 났을 때, 이 조용미 시인은 아픔이 멈추어버린 지점을 갈망하는 사람이며, 아픔이 없는 가능성이 감지될 때 생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독 시인의 시어에는 어두운 묘사가 등장한다. 아픔, 상처, 통증, 고통 ...... 이런 단어들이 종종 시어에서 발견된다. 시인은 그런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것들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대개 그런 것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망자를 태우고 가는 꽃상여, 장엄한 종교의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일주문, 우주의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매화초옥도 그림, 시인은 이들 앞에서 통증을 잊는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쫓을 것이다. 그러나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종종 무시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혹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을 찾는다며 목적과 수단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이유로 우리는 저마다 아름다움을 찾는다. 조용미 시인이 감사했던 건 적절하게 스스로 미학적 인간을 추구하는 이유의 단서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름다움이야 말로 나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하며,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실제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좋다. 한 번이라도 진실된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인의 고백이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통용되길 바랬다. 빙산의 일각이라도 우리 역시 감전된 것 같이 아름다움 앞에 숨을 멈추었던 적이 있지 않던가. 최소한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희망이라도 품어본 적 있지 않았던가. 시인은 "문장은 결국 너를 낚아채고야 말았다"고 했다. 시인은, 나를 낚아채고야 말았다. ▨

(2018. 11. 16)


  
한 가지 色()에 깊이 들어앉은 다른 색을 발굴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은 가능할까
나약한 존재를 자극하는 섬세한 색의 변화를,
그 미묘한 느낌의 일렁임을

문장은, 너를 낚아채고야 말았구나
너를 지탱해주고 변화시키고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순간들
한 번 겪고 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 자리를

- <미학적 인간에 대한 이해>부분

http://blog.naver.com/marill00/22139974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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