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수잔
제인 오스틴 지음, 김은화.박진수 옮김 / 바른번역(왓북)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1천년간 최고의 문학가로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제인 오스틴은 이미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있지만 그녀의 처녀작인 <레이디 수잔>은 이번에 처음으로 번역서로 선보였다.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설득, 엠마 등으로 유명한 오스틴 소설의 특징은 대체로 영국 중상류층의 몇몇 가족을 대상으로하여 그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결혼과 연애, 사교활동 등을 토대로 일련의 사건에서 엿보이는 인간성 및 인간사회가 필연적으로 지니고있는 가식과 위선, 이중성에 대한 재치있는 묘사와 풍자라고 할 수 있다.  

<레이디 수잔>도 그런 면에서 오스틴 소설의 특장에 어긋나지않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오스틴 소설이 갖는 특유의 정체성과 이후 이 처녀작을 시작으로 작가가 쓰게되는 장편소설의 흐름과 추이를 보여주는 일종의 서막과도 같은 작품이다.


귀족 미망인이지만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인 레이디 수잔은 남편이 사망한지 4개월밖에 되지않았는데도 부유한 남자와의 재혼을 추진하는 동시에 딸에게도 부자신랑감을 찾아주려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모성애가 풍부한 여성은 아니다. 모성애커녕 미모에 천성적으로 뛰어난 화술까지 갖추었으나 안타깝게도 도덕성이나 윤리감은 그다지 타고나지못한듯, 자신의 속물적인 계산속과 표리부동한 언행을 감춘 채 겉으로는 친절과 겸손으로 포장하고 다정하고 사려깊은 태도를 연출하면서 여러 남자를 유혹한다. 

서간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레이디 수잔이 시동생에게 당분간 저택에 머물며 신세를 지겠노라는 예의바르면서 상냥한 편지로 시작하지만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독자는 그만 웃고만다. 레이디 수잔의 속마음이 친구에게 보내는 다음 편지에서 여실히 드러나기때문이다. 주인공인 수잔을 비롯하여 그녀의 딸, 친구, 동서, 수잔에게 매료된 인척청년과 그의 부모 등 여러사람의 시점에서 돌아가며 진행되는 편지글은 1인칭 시점이므로 당연히 독자와의 거리는 좁혀지고 독자는 그만큼 화자의 심정에 깊숙이 동감하게 되어 소설속으로 한층 깊숙이 몰입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소녀 오스틴은 이런 소설작법구성의 효과를 알고있었을까? 그러나 그런 형식보다 훨씬더 중요한 것은 작가의 예리한 관찰아래 훤히 드러나는 인간의 허위의식과 속물성, 겉다르고 속다른 이면을 뒤집어 보여주는 내용이다.

소설은 처음에는 철면피나 다름없는 레이디 수잔이 자신의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순진한 청년을 유혹하고 청년은 매력에 홀려서 여인의 본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진실이 거짓을 이기게 되는 이상적 결말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수잔이 철저히 몰락하거나 파멸하지는 않으며 또 그녀는 치명적인 팜므파탈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악녀형의 인간이다. 비록 승승장구에 브레이크가 걸리기는해도 나름 차선책을 취함으로써 그녀도 해피한 엔딩을 맞는데 작가는 교활한 자에게 이용당하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냉소어린 동정으로 끝을 맺고있다.

급조된듯 갑작스러운 결말의 강하가 단점이긴해도 속도감있는 빠른 전개에 마치 정교한 세공품을 감상하는 것같은 인상은 오스틴 소설에서 맛볼수 있는 독특한 멋이다.

그러나 여기서 곰곰 생각해봐야할 점이 있다. 18세기 영국사회의 일부계층 이야기가 왜 지금에서도 여지없이 위력을 가지고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오스틴 소설이 겉으로는 경쾌한 로맨스를 표방하고 있되 그 뿌리는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있기때문이 아닐까. 인간형의 리얼한 묘사에 감탄한다는 말은 그런 인간유형이 현실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내면의 은밀한 속내 까발리기는 인간사회의 위선을 고발하고 인간의 마음을 밑바닥까지 들추어봄에 다름아닐 것이다. 레이디 수잔이라는 거울에 비춰본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이 소설이 십대소녀가 인간 내면의 한 단면을 건져올려 그녀만의 프리즘으로 날카롭게 비춰보인 작품이라는 사실에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