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느 메디치의 딸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박미경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가 이뻐서 소장하고싶었던 책.

붉은 바탕색에 큼직큼직한 꽃송이가 그려진 표지는 화려한 프랑스 중세 궁정에서 벌어진 음모와 참혹했던 종교전쟁 시대를 은유하는 것만 같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는 워낙 유명해서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국내에 많이 알려진 작품으로는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철가면, 검은 튤립 등이 있다. 공장제 시스템으로 (요즘말로 알바생 여럿 고용...;;;) 소설을 썼다고해서 대본소 작가라는 비판을 받고있지만 소설을 혼자 썼든 여러명이 같이 썼든 일단 재미가 있는데는 어쩌랴.


그가 쓴 역사소설중에 발르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왕비 마르고, 몽소로의 귀부인, 45인의 호위병.. 이 세 작품을 발르와 로맨스 3부작이라고도 하는데 그중 첫째편인 왕비 마르고가 이번에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아쉬운 것은 이 책은 뒤마의 원작을 절반 정도 압축편집한 번역서라는 거다. 원작은 챕터가 66장으로 영역본이 550페이지가 넘는다. 한국어 번역에서 분량이 거의 절반가량 떨어져나간 셈인데 원래의 재미도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보면 된다.


원제는 La Reine Margot. 한국어로는 왕비 마르고가 되는데 예전에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영화가 들어오면서 누가 번역했는지 영화 제목을 여왕 마고라고 붙였다. 프랑스 역사에 존재하지도 않는 프랑스 여왕이 현대 한국에서 탄생(?)한 셈이니 괴이하다하겠다.


번역서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에는 작품설명이나 역자후기가 없고 등장인물(실존 인물) 설명도 없다.

한국에선 잘 알려져있지않은 중세 프랑스가 배경인 역사소설이어선지 관심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거 같다..


중세기에 프랑스는 카페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고 방계인 발르와 가문이 뒤를 잇는다. 왕위 상속에 시비걸고 나선 영국왕 에드워드를 물리치고(...잔다르크도 등장해주시는 백년전쟁..;;;) 살리카를 확립한 발르와 왕조의 후예 앙리 2세는 왕비 카트린느 드 메디치와의 사이에서 아들 넷, 딸 셋을 두었다. 아들이 넷이나 되니, 거기서 대가 끊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 4명의 아들 중에 세 명이 차례로 프랑스 왕이 된다. 

프랑소와 2세 - 샤를르 9세 - 앙리 3세.

(막내아들 알랑송 공작은 네덜란드 군주가 될뻔하다 실패했다..)


발르와 마지막 왕 앙리 3세가 암살당했을 때 자식이 없어서 살리카에 따라 가장 가까운 남계가 왕위를 잇게되는데...그 행운의 남계 친척이 무려 21촌이 되는 부르봉 가문의 나바르왕 앙리 3세로 이 소설의 주요인물이다. (훗날 프랑스왕 앙리 4세)

이 부르봉 가문도 카페 왕조의 분가여서 나바르왕 앙리는 프랑스 왕족이다. 거기다 나바르 왕실은 프랑스 왕실과 대를 이어가면서 겹치기 혼사를 했기때문에 이때쯤 나바르 왕실은 거의 프랑스인 다됐다고 보면 된다. 

나바르 왕 앙리는 부계로는 발르와 가문의 프랑스왕 샤를르 9세나 앙리 3세의 21촌 숙부지만 모계로는 6촌 동생이다. 그가 첫번째 혼인한 왕비 마르그리트(이 소설 여주인공)는 조카딸이면서 누나가 된다.

그런데 유럽 왕실은 대를 이어가며 끼리끼리 혼사를 했기때문에 서로 복잡하게 얽혀서 일일이 촌수 따지는게 너무 힘들다. 카트린느 드 메디치도 외할머니가 부르봉 가문이라 남편과도 사위(나바르 왕)와도 혈연관계다. 


소설에서는 나바르왕 앙리가 프랑스왕이 되기 이전 ㅡ.

그러니까 1572년 프랑스의 방돔 공작이자 나바르왕인 앙리와 프랑스 왕녀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에서 시작해서 성 바르톨로뮤 학살사건에서 살아남은 앙리가 루브르궁을 탈출하기까지의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대 유럽에서는 가톨릭의 권위와 부패, 세력과 영향력에 대항하여 신교인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구교-신교간의 대립과 분쟁인데 가톨릭의 신교도 박해같은 종교적 사정에 더하여 정치권력쟁탈 세력다툼이 서로 얽히면서 프랑스 내부에서 심각한 종교전쟁이 발생했다. 

이해가 안된다면 우리나라에 불과 반세기전쯤 있었던 좌익 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에 비유해보면 될까.


앙리 2세이후 가톨릭이 더욱 득세하던 시기에 섭정이 된 모후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프로테스탄트와 화해할 목적으로 막내딸 마르그리트를 신교도인 나바르왕 앙리에게 시집보낸다.

그러나 유약한 아들 샤를르 9세가 고매한 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의 영향을 받을까 걱정이 된 카트린느는 가톨릭 강경파인 기즈 공작과 연합해서 결혼식 축제의 들뜬 분위기를 틈타 콜리니를 죽이고, 때마침 결혼식을 축하하러 파리에 모인 신교도 수천명을 학살하는데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성 바르톨로뮤 축일 사건이다. 이 소동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앙리는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한 뒤 감금생활에서 틈을 노리다 몇년 후 탈출하는데 이 때 아내 마르그리트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뒤마의 소설은 이 시기의 앙리와, 앙리가 나중에 프랑스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두려워하여 앙리를 죽이려는 장모(이자 형수이자 외숙모이자 혈연이기도한) 카트린느의 여러가지 암살시도와 실패를 한 축으로 그리면서, 다른 한 축으로는 앙리의 아내인 왕비 마르그리트를 사모하는 귀족 라 몰과 그의 친우 코코나의 우정을 그리고있다.

라 몰도 코코나도 실존인물이다. 라 몰은 왕제 알랑송 공작에게 봉사하던 가톨릭파 귀족인데 한때 마르그리트의 연인이었다. 국왕 샤를르 9세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꾀했다하여 고문받고 공동 음모자인 코코나와 함께 사형당한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소문으로는 마르그리트가 라 몰의 참수당한 머리를 몰래 훔쳐서 미이라로 만들어 보석상자에 보관했다는 해괴한 루머가 돌았다.

이 루머가 작가들의 입맛에 잘 맞는 소재였던지 영국에서는 셱스피어가 이 소재를 희곡에서 써먹었고, 프랑스 작가 스탕달도 적과 흑에서 이 소재를 차용한다. 뒤마의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소설에서 카트린느가 사위를 죽이려는 시도...처음에는 여자(앙리의 애인 소브 남작부인)의 입술연지에 독을 넣어 앙리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다음에는 자객단을 보내고, 그것도 실패하자 책에 독을 발라놓기도하고...그처럼 어떻게든 앙리를 죽이려고하는 광적이다시피한 집착은 다분히 대중적 흥미를 위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장치겠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가장 재미있는 요소중 하나가 바로 이 카트린느의 "사위 죽이기"와 이를 번번이 피해가는 앙리의 행운(?!)이다.


카트린느가 점성술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고, 소설 속에 나오는 점성술사 르네도 실제로 카트린느가 총애한 점성가이자 흑마술사 루게리를 모델로 한 캐릭터다.

물론 카트린느의 "앙리 죽이기"라든가 국왕 샤를르가 독묻은 책때문에 죽었다거나는 픽션이고, 라 몰과 코코나가 실제로 어떤 사이였는지도 알 수 없지만, 실존 인물과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흥미진진하면서 긴박감이 넘치고, 우스우면서 한편으로는 슬픈, 낭만적이면서 잔혹하기도한, 뒤마 특유의 화려장대한 소설이 탄생했다.


프랑스왕 앙리 4세(나바르의 앙리)는 앙리대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역사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있는 왕이다. 

망설였으나 결국 칼뱅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신교-구교간의 종교전쟁을 끝내고 국내통일과 민생안정을 도모하여 절대왕정의 토대를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런 정치적 면과는 별개로 난잡한 여자관계때문에 갠적으로 나는 앙리 4세를 1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뒤마의 붓끝에서 그려지는 소설 속의 나바르 왕 앙리는 살짝 매력적이다.


번역서 카트리느 메디치의 딸이 재미있었다면 비축약본 원저도 읽어보라고 권하고싶다. 압축했기때문에 번역서에 빠진 부분이 많아 안타깝다.

첫 부분을 보자.

결혼식 피로연에서 기즈 공작이 신부 마르그리트에게 다가가 "그것"을 몸소 가지고 왔다고 속삭인다. 마르그리트는 "오늘밤에 오라"고 슬쩍 답한다. 그들이 라틴어로 비밀리에 이런 말을 주고받을 때, 다른 편에서는 신랑 앙리가 애인과 사랑을 속삭이며 첫날밤에 신부는 냅두고 애인이랑 밤을 보낼 것을 약속한다. 

...기즈 공작은 마르그리트의 옛 연인이다. 그런데 대체 '그것'이 뭘까...독자의 호기심이 당겨진다.

깊은 밤, 기즈 공작이 신방에 들어가서 마르그리트에게 '그것'을 건네주고 첫날밤 남편과  잘 보내라며 돌아가려하는데 마르그리트가 남편은 오지 않을 거라며 공작을 붙잡는다. 바로 그 때 앙리가 아내를 찾아온다. 첫날밤, 아내의 침실에 누군가 있음을 눈치깠지만 짐짓 모르는 척 얘기 좀 하자며 능청떠는 신랑(앙리), 좌불안석 초조한 신부(마르그리트), 꼼짝않고 숨어서 본의아니게 부부의 대화를 엿듣게된 애인(기즈 공작)...

이 흥미로운 상황에서 앙리가 꺼내놓는 대사가 압권이다. 로렌느 가문이 거짓 환대를 퍼부어도 나는 속지 않는다는 둥, 당신은 기즈 공작의 사랑을 받고있다는 둥, 누군가 지금 내 말을 듣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둥...바로 그 로렌느 가문의 기즈 공작이 숨어서 듣고있는 판이니, 앙리가 한편으론 침입자 들으라고 다른 한편으론 아내를 압박하려고하는 말에 관객(독자)은 웃지않을 수 없다.

극적인 상황, 극적인 대사...이런 연극적인 요소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뒤마 소설의 힘이다.

번역서에는 기즈 공작부분이 삭제되었고 나중에 사실 그 방에 기즈 공작이 있었다고 설명하고있다. 


소설에는 그런 것까지 말하지는 않는데 저 셋은 서로서로 육촌간이다. 앙리는 아내 마르그리트와 육촌이고, 마르그리트는 애인 기즈 공작과 육촌이고, 기즈 공작은 앙리와 육촌간이다. 소설에 마르그리트의 친구로 나오는 앙리에트도 실존인물인데 나바르왕 앙리와는 사촌이다. 앙리에트의 여동생이 기즈 공작과 결혼했기때문에 가톨릭 영수인 기즈 공작은 위그노 지도자인 나바르왕 앙리와 육촌간이면서 사촌 매부-처남이 된다. 기즈 공작은 육촌동생이자 육촌매부이자 사촌처남이 되는 나바르왕 앙리가 프랑스왕이 되지 못하도록 적극 방해하며 3앙리 전쟁까지하다가 역시 육촌간인 국왕 앙리 3세에게 암살당한다. 

....말하자면 자기네들끼리 연애하고 결혼하고 전쟁하고 죽고 죽이는...ㅡㅡ;;;


아뭏든...

마취제가 없을때 의사가 환자에게 뒤마의 소설을 주면서 읽으라고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물론 지나친 과장임은 틀림없지만 그만큼 뒤마의 소설이 재미있다는 말이다. 만일 원작을 읽고서도 재미없다는 분이 있다면 할 말은 하나뿐이다. 이런 류의 소설은 당신 취향에 맞지않는 거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