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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평점 :
문진영 – 딩
#서평단 #도서협찬 #도서제공
p.59
네가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이곳에서 나는 이렇게 잘 살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불행에 겨워 뭍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그때의 너처럼, 그렇게 힘겹게 헐떡거리지는 않아.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놓았고, 그래서 평온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p.61
누군가에 대한 이해가 그토록 순식간에, 무방비하게 덮쳐올 수 있다는 것에 주미 자신도 놀랐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때 그 애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p.72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 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아무 때나 연락해도 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주미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p.85-86
보드에 뭔가에 부딪혀 상처가 나면 그걸 ‘딩’이라고 부른다고 P가 말해주었다. 왜 하필 동아리 이름을 그렇게 지었느냐고 재인이 묻자 P는 대답했다.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 P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덧붙였다.
그건……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p.144-145
쑤언에게 운이 좋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내가 아니라 너인 것. 불행의 화살이 내가 아닌 네게 날아가 꽂힌 것. 능력도, 성실함도, 나이도 아무 상관 없었다. 왜 내가 아니라 너인가.
p.151-152
이 녀석처럼 누군가를, 무언가를 한 점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다면, 파도 타듯 위태롭게 흔들릴 뿐인 이 생에서 아주 잠시라도 닻을 내린 기분일 거야.
p.152
문득 생각난 듯, 쑤언은 주머니에서 귤을 꺼내 계단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래를 닮은 신을 향해 기도했다. 떠난 이들에게는 깊은 안식을, 남은 이들에게는 폭설을 견딜 힘을 주시길.
P.171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쓰면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와 이어진 존재들을 마음으로 발견하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내가 분명히 건네받은 이 온기는, 누군가로부터 누군가를 통해 기어이 내게 도착한 것이라고.
p.171 작가의 말
그렇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구원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단번에 일어나는 구원은 신의 일이겠지만, 인간들은 서로를 시도 때도 없이,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Comment]
딩이란, 작중 내용에 따르면 서핑보드가 무언가에 부딪혀 생긴 상처라고 한다. 소설 <딩>은 한군데씩 ‘딩’이 나버린 다섯 인물의 이야기이다. 작품은 5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어촌 마을인 K를 배경으로 다섯 인물의 시점이 각각 진행된다. 두고 떠나온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지원, 늘 남겨지는 사람으로서 소모되어버린 주미, 연인의 죽음에 메어있는 재인, 사고 이후 살아갈 의지를 잃은 영식과 딸을 위해 잔인한 현실에도 울지 않는 쑤언.
다섯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해와 회복이다. 이해는 자신에 대한 이해이기도, 타인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상처에 대한 이해이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해’는 작품 속 문장과 닿아있다.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건……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작품을 읽으면서,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상처가 생긴 이유가 단지 생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에, 마음을 주었기 때문에, 결국 살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 회복이 시작되는 계기가, 다름이 아니라 딩이 난 서로가 서로에게 건넨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라는 점이 좋았다. 기도가 담긴 귤 하나, 오랜만의 전화 한 통, 울음을 받아주는 포옹 한 번, 함께 먹는 식사 한 끼 같은 것.
최근 읽었던 현대문학 핀시리즈의 <내가 되는 꿈>처럼 <딩> 또한 체험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사 그 자체보다는 인물들의 상처와 그 잔잔한 회복을 함께 겪어가는 기분으로 읽었다. 작가의 말처럼, 단번에 일어나는 구원이나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불완전한 서로가 서로의 사소한 구원이 되어주는 일은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했다.
*출판사(@hdmhbook)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기록한 개인적인 감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