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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18년 5월
평점 :
책 제목만 언뜻 보면 한서를 이불삼고, 논어책을 병풍삼을 만큼 풍류를 아는 사치스러운 양반네가 떠오른다. 하지만 한 겨울 매서운 바람이 방안까지 들어와 너무 추워 '한서'한 질을
이불위에 늘어놓고 '논어'한권을 뽑아
세워 바람을 막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면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자신의 '한서이불과
논어병풍'이 쇠덕석을 덮고 누운 한나라 왕장보다 낫고 말안장을 깔고 잔 두보보다 낫다는 글까지 남겼다하면 도대체 이사람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책만 읽는 바보'라는
'간서치'로 널리
알려진 '이덕무'의 글
'청언소품'을 모아
엮어 놓은 책이다. 서자로 태어나 출세의 길이 막힌 상태였기에 사실 어찌보면 인생을 포기하기 쉬운 상태였음에도 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결국 정조에게 발탁되어 벼슬에 오르게 된다. 이는 그가 그동안 꾸준히 책을 읽어온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보다 바르고
청렴한 인물이기에 가능했다는걸 이 책속 그의 청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일상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된다. 책속 글자중에 향초이름만 갉아먹은 신통한 좀벌레도 소재가 되고, 책 한권 없으면서도
천하의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베풀고 싶은 한심한 자신의 처지도 소재가 되고, 실을 뽑아대는 거미의 움직임도 글감이 되고, 심지어 절굿공이까지
소재가 된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 보다 순수하고 이 보다 깨끗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세상을 향해 원망할 만도 하건만, 지독스런
가난마저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세상을 향해 올곧고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글들은 절로 경외감을 불러온다.
날마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데 일찍 일어나 음식을 먹고서 읽으면 입이 둔해져서 잘 읽히지 않는다. 먹지 않고 하면 배나 유창하고
빨랐다. 여러 번 시험해보았으나 번번이 그러하였다. 음식기운이 청명한 기운을 막아 그런 것인가 싶다. -285쪽-
정말 너무 좋은 글들이 많음에도, 유독 이 글이 마음에 남은 건 왜일까?
벼룻물이 얼 정도로 추운 방에 살고, 손가락이 얼도록 남의
책을 베껴써 주면서 돈벌이를 했던 그의 삶에서 배고픈건 다반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평생토록 청명한 기운을 버리지 않았던 건 운명같은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으로 인해서
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글속에서 느껴져 씁쓸한 마음을 금하기 힘들다.
가장 숨기고 싶은 가난마저 자신의 글 소재로 만들만큼 그는 가난을
껴안고 살았다. 한서이불을 덮고 논어병풍으로 가리고서 추위속에서 쓴 그의 글이 가난을 죄악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가장 으뜸가는 것은 가난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다. 그 다음은 가난을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다. 가장 낮은 것은 가난을 꺼리고, 가난을 호소하며, 가난에 짓눌리다가 가난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아래는 가난을 원수로 여기다가 가난에 죽는 것이다. -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