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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ㅣ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베어타운은 베어타운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 많은 등장인물속에 자신을 대입시켜보면 그들의 행동들이 자신이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단정짓기 힘들 것이다. 베어타운은 우리의 모습이다.
케빈의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는 공동체내에서 영웅시 되어 형성된 자만심과 '승리'이외의 가치들은 경시되고 있는 공동체 문화의 합작품이다. 17세 청소년 개인의 책임에 앞서 베어타운을 살리기 위한 하키를 향한 어른들의 몸부림과 갈망이 케빈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 지키기 위해 케빈을 옹호하고 케빈의 부정한 행위를 인정하지 못한다. 케빈같은 아이가 그럴리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길러낸 그들의 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케빈의 죄가 인정되면 그들의 죄도 인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캐빈이 겪게될 수치심은 그들의 수치심이 될 것이기에 그들은 마치 하키팀의 일원으로서 팀이 움직이듯 베어타운의 승리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반면 아맛은 우리가 겪어 보았거나 언젠가는 겪게 될지 모를 자화상이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는 대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공존하게 된다. 아맛은 내면적 갈등과 고통을 오랫동안 감내하게 되지만 결국 진실의 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 낸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에 자신이 매몰되어 약자를 외면하게 되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보지 않는가? 왕따현상도 알고보면 가해 행위에 대한 침묵으로서 가해집단의 결속을 깨뜨리지 않겠는다는 안정감을 추구하려는 심리일 것이다. 왕따를 옹호했다가는 자신도 왕따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맛의 침묵을 깨는 용기의 반대편에는 팀원들의 분노와 치욕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성이 훼손된 것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우리는 개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고, 개인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으며, 타인과 사회에 해악이 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우선시됨과 동시에 개인의 행동에 개인이 책임지는 사회이기도 하다. 반면 베어타운에는 '우리'의 관념이 강한 사회이다. '우리' 마을을 살리기 위해 '우리'팀이 우승하여야 하고 '우리'가 최고이기 위해 '개인'은 '우리'안으로 자연스레 녹아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이기에 '개인'으로 인하여 '우리'의 이미지가 실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벤이는 자신의 개인 성향(성적 취향 등)을 쉽게 인정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묘사하는 코치 다비드의 비애에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을 수 있고, 상대방과의 관계에 모험을 거는 대신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성향일 것 같다.)
캐빈의 부모와 마야의 부모는 완전히 다른 케릭터의 사람이였을까? 그 둘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처지가 완전히 달랐다면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 쉽게 가정할 수는 없겠지만 쉽게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처지'와 '관계'라는 단어가 많이 떠올랐다.
어떠한 '처지'에 놓인 나는 그 '처지'를 완전히 벗어나 나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겠는가?
어떠한 '관계'로 맺어진 나는 그 '관계'를 완전히 벗어난 나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겠는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인간성도 내가 놓여질 수 있는 수많은 '처지'와 수많은 '관계'속에서 보여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