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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ㅣ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작과비평사, 2018
서정시는 소박한 일상과 자연의 전통을 다루는 다소 고루한 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아직도 서정시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21세기의 서정을 말해달라고 하면 책더미를 뒤져 이 시집 한 권을 건네지 않을까 싶다.
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
내 몸에서
시위를 떠난 투명한 화살은
아파트 20층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
─ 「눈과 얼음」 부분
날 선 고드름은 시인의 슬픔과 치욕이다. 게다가 그것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며 사람들에게 슬픔과 치욕을 알리기까지 한다. 비참한 일이지만 이야말로 시의 본질이 아닐까. 사랑의 나날들, 서정시마저 불온하게 여겨지는 이 세계에서 시인은 충실히 의무를 수행한다.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 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일, 그것은 이 처참한 세계에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세계를 똑똑히 바라보며 자신의 언어로 그 이면을 들춰내는 것이다.
도망자 야곱처럼
피난민으로 소년병으로 탈영병으로 필경사로 실업자로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다 마침내 도망자의 삶을 완성하려는 당신
당신은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정말 알고 있습니까?
단식은 당신이 택한 마지막 도망의 형식입니까?
그 출구가 당신 눈에는 보입니까?
─ 「단식광대에게」 부분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광대」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이다. 나는 단식광대의 몰두, 예술에의 지극한 지향에 감동을 받았으며 경외를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시인에게 단식광대의 단식은 도망의 형식이었다. 그는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순간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계를 등진 안쓰러운 존재다.
시인은 순간에 주목한다. 그 순간은 때로는 부모에 대한 단상이며, 외면당한 채 죽은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여자들의 처참한 삶에 대한 폭로이기도 하다. 시인은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들, 혹은 삶을 예술로 만드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시를 좋아하고, 때로는 쓰는 사람으로서 보다 압축적인 시어들, 기교에 많이 집중하게 된다. 『파일명 서정시』는 허울 좋은 예쁜 말은 늘어놓지 않는다. 조금 더 늘어질지라도 해야 하는 말, 봐야 하는 순간들에 집중한다. 세계를 향해 울리는 경종의 시다. 오래도록 읽다가 누군가에게 건네주고픈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