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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냄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9
김지연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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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냄새』(현대문학, 2023)는 코로나라는 낯선 재앙이 인간에게서 차츰차츰 앗아간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김지연 작가 특유의 날선 예리함으로 샅샅이 풀어헤치는 소설이다. 인간이 빼앗긴 그 무엇은 '후각'의 형태로 공유된다. 풍부한 맛을 못 느끼고 혹여 타는 냄새를 못 맡을 수 있다는 불안감 정도. 딱 그 정도의 일상 속 불편함. 있으면 좋고 없으니 아쉬워지는.

그러나 아쉬움은 금세 불안으로 변모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어쩌면 아주 소중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나는 그게 코로나가 우리에게 앗아간 것이 아닐까 한다. 없어도 그만이라 여겼던 것이 알고 보니 우리를 이루는 근간이었던 뭐 그런 거.


가령 사랑하는 이의 목덜미에서 나는 체취가 그렇다. '후각'을 상실한 이는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영영 맡지 못할 것이다. '후각'을 상실한 이만 그럴까? 코로나와 관련된 모든 이가 그럴 것이다. 격리되고 거리를 두며 타인의 체취를 맡을 기회를 잃은 이들. 코로나가 창궐하는 세계는 더 이상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의 지옥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포옹과 키스가 '밀접 접촉'이라는 엄중한 네 글자로 단속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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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은희경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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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세계 속 화자들은 ‘침범’을 경험하는 이들이다. 애써 구획해놓은 안락한 자기 세계에 타자가 등장해 막무가내로 들이닥친다. 이 침범의 형태는 다양하다. 멸시, 위협, 추방, 혼란 등 공격적인 타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자기 세계를 부수어 그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흥미로운 건 그런 ‘나’들이 침입에 꽤나 태연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파헤쳐지는 위기의 순간에도 마치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을 예상했던 양 미적지근하기 그지없다. 아니, 어쩌면 자기 세계가 부서지는 것에 묘한 쾌감까지 느끼는 듯하다.

「고독의 발견」에서는 여러 번에 걸쳐 ‘Doors’와 ‘You/People are strange’라는 말이 나온다. 이 문을 앞에 두고 뒤에는 내가 있다. 문 밖의 당신은, 타인들은 낯설고, 기이하다. 닫힌 문은 열리기 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눈치게임을 한다. 내가 문을 열기를 원치 않는다면 바깥의 사람이 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문이 열리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책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 있던 사람을 들여다본다. 누군가는 이내 해방감을 느끼고 타자를 기꺼이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두려움에 움츠러들 것이다. 소설은 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이야기하는 장르라는 것을 크게 체감하며 읽었다. 늦게나마 알을 깨고 나온 이들의 향방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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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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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말할 필요가 있다

 

탈출은 그 바깥이 있어야 가능하다. 다른 세계에 대한 확신도 없이 탈출을 도모하는 건 도망에 가깝지 않을까. d는 불온한 감각들에 파묻혀 살다가 dd를 만나고 탈출에 성공한 듯 싶었다. 그러나 사람을 낙원으로 삼기엔 그것은 너무도 나약했으므로 dd가 갑작스레 죽고 d는 깨닫는다. dd는 단지 예외였을 뿐으로, 자신의 일상은 다시 본래대로 돌아온 것이라고. 혹은 이전의 일상에 상실감까지 더한 채로. ddd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었다. dd를 만나기 전에는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고, dd를 만나고서는 그들이 만들어나갈 행복과 미래가 중요했으며, dd가 죽고 난 뒤에는 어차피 없음은 없음일 뿐으로, dd에 대해 말해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사소한 계기로 혁명은 이루어진다. 잡음이 소리로 들려오는 순간이 있었고, 소리는 dd를 환기시켰으며, ddd의 소리를 찾아간다. 문득 박조배와 걷던 길에 애인(愛人)을 잃은 사람들이 떠오르고, 무심코 만진 진공관의 섬뜩한 열은 통증으로 다가온다. 은근한 미열을 담은 사물들과, 내가 차가워진 게 아닌 착각 속에서 잡음만을 전부로 살아온 d에게 섬찟한 통증에 가까운 촉각,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절규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각은 어쩌면 d에게 비상구가 아니었을까. 탈출구는 아닐지라도, dd와 머물렀던 지층의 방에서 제대로 햇볕을 마주할 수 있는 지상층으로 향할 비상구.

 

d의 통증에 나 또한 아릿함을 느끼며 다음 장으로 향하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김소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김소영은 세상과의 불화를 겪으면서도 세상이 변하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김소영은 시신경이 손상되며, 자신이 시력을 잃었을 때를 상상해본다. 점자가 아닌 우리가 보는 글자를 묵자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묵자가 상식인 세계다. 묵자를 쓰면서도 묵자를 모르는 세계. 여자는 남자와 사랑하고, 혼기를 놓친 여자는 재취로밖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절대권력의 횡포 앞에 저항하면서도 내면에 체념을 품는 이 세계. 김소영은 이 불합리한 세계에 순응하지 않고 제 나름의 저항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시신경이 손상되기 전까지는 묵자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d와 김소영 모두가 탈출의 경험을 꿈꾸지만 그들의 세계 바깥은 모른다. 보통의 사람들이 탈출이라는 선택지조차 모르는 것에 비하면, 그들은 탈출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만은 안다. 절망은 사람을 꿈꾸고 말하게끔 한다.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죽음이 없는 세계, 그 누구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그렇게 되기까지 무엇이라도 토해내야 한다는 게 아닐까. 우리는 횡포에 익숙해지고, 너무도 많은 죽음을 겪었다. 저항은 치레가 됐고 절망이 습관이 됐다. 그럼에도 아직은, 무엇이든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확신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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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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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작과비평사, 2018


서정시는 소박한 일상과 자연의 전통을 다루는 다소 고루한 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아직도 서정시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21세기의 서정을 말해달라고 하면 책더미를 뒤져 이 시집 한 권을 건네지 않을까 싶다.

 

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

내 몸에서

 

시위를 떠난 투명한 화살은

아파트 20층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

─ 「눈과 얼음부분

 

날 선 고드름은 시인의 슬픔과 치욕이다. 게다가 그것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며 사람들에게 슬픔과 치욕을 알리기까지 한다. 비참한 일이지만 이야말로 시의 본질이 아닐까. 사랑의 나날들, 서정시마저 불온하게 여겨지는 이 세계에서 시인은 충실히 의무를 수행한다.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 시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일, 그것은 이 처참한 세계에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세계를 똑똑히 바라보며 자신의 언어로 그 이면을 들춰내는 것이다.

 

도망자 야곱처럼

피난민으로 소년병으로 탈영병으로 필경사로 실업자로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다 마침내 도망자의 삶을 완성하려는 당신

 

당신은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정말 알고 있습니까?

단식은 당신이 택한 마지막 도망의 형식입니까?

 

그 출구가 당신 눈에는 보입니까?

─ 「단식광대에게부분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광대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이다. 나는 단식광대의 몰두, 예술에의 지극한 지향에 감동을 받았으며 경외를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시인에게 단식광대의 단식은 도망의 형식이었다. 그는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순간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계를 등진 안쓰러운 존재다.

시인은 순간에 주목한다. 그 순간은 때로는 부모에 대한 단상이며, 외면당한 채 죽은 아이들에 대한 애도이자 여자들의 처참한 삶에 대한 폭로이기도 하다. 시인은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들, 혹은 삶을 예술로 만드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시를 좋아하고, 때로는 쓰는 사람으로서 보다 압축적인 시어들, 기교에 많이 집중하게 된다. 파일명 서정시는 허울 좋은 예쁜 말은 늘어놓지 않는다. 조금 더 늘어질지라도 해야 하는 말, 봐야 하는 순간들에 집중한다. 세계를 향해 울리는 경종의 시다. 오래도록 읽다가 누군가에게 건네주고픈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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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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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만 있는 그대로 무례해지는 딸들. 이 마음은 어리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건 그저 어리광보다는 엄마의 그 속은 꼭 내가 꿰뚫어 봐야 한다는 그런 마음, 엄마를 평생 손아귀에 두고 싶다는 조금은 삐뚤어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난 그렇게 엄마를 사랑한다.

나에게 엄마는 오로지 엄마다. 어찌 보면 엄마는 엄마가 아닐 때가 더 많을 텐데도. 나를 낳아주고, 같은 여성의 고민을 가지는, 내 말이라면 다 옳다는 우리 엄마. 그럼에도 엄마는 내게 주어지는 문화적 자본과 새 세대의 소산들을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누릴 수 없다. 엄마는 나를 위하고, 또 위하기만 하다가 내가 새로운 하나를 맛보여주면 그게 자신이 누릴 최대치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나고, 나는 곧 엄마였다. 엄연한 타인임에도 각자를 분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기성적 가정의 모녀들은 서로의 애정과 헌신에 몸을 못 가눈다.

그래서 나는, 딸은 이 무조건적 애정에 미안하고 감사하면서도 또 어찌할 도리를 모른다. 그래서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을 자처한다. 결국 엄마는 딸에게 평생의 죄책감이다. 20대의 엄마를 만난다면 많은 딸들이 “엄마, 나 낳지 말고 혼자 행복하게 살아.”라고 말하리라 하는 것처럼. 『칼자국』은 ‘딸’에서 ‘나’가 되어가는 아이들이 막연한 죄책감을 버리고, 엄마와의, 나아가 타인과의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서사를 제안한다. 화자에게 엄마는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은 쥔 여자였다”. 이 서두로부터 엄마는 더 이상 엄마만이 아니고, 칼을 쥔 여자고, 촌부고, ‘맛나당’의 주인이 된다. 나와 동일한 그런 존재가 아니다.

『칼자국』의 딸은 자신이 인지했을 때부터의 엄마의 생과 죽음을 말한다. 희생만 하다 간 엄마에의 동정과 연민, 나의 분신이 사라짐에 대한 준비되지 않은 슬픔이 무작정 닥쳐오지 않는다. 엄마는 하나의 사람이고 여자고, 벼려진 칼이자, 내 몸 속의 ‘무수한 칼자국’이다. 엄마는 칼을 두들겨 칼국수, 콩국수, 김치를 만들어 나를 먹여 키웠고 돈을 벌었다. 그리고 아빠의 바람과 만행에 때론 슬퍼했고 화냈으며, 서울에 가서는 촌부의 모습으로 기가 죽었고, 예쁘다는 말엔 기가 사는 사람이었다. 남의 추문을 공유하며 신나하고, 동네 사람들과 도박 화투를 하다 초라한 행색으로 도망쳐 나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도 다 아는데 잊거나 외면했던 모습. 모성 신화에 사로잡힌 신성한 어머니의 모습도, 자식 위해 자존심도 포기하는 억척스런 아줌마의 모습도 아닌 그냥 그저 그런 어떤 인간의 모습. 한 인간이 살다 그렇게 갔다. 난 그 인간에게서 태어났고, 오래오래 같이 살았으며, 그 인간을 무지하게 사랑했다. 그뿐이다. 서로에게 죄책감을 가질 건덕지는 없다.

도마의 칼자국은 흉터가 아니다. 엄마가 나를 먹여 살리고자 두들겼던 그 자국들에 마음 쓰지 말자. 엄마의 칼자국에 가슴이 쓰라리면 건방떨며 엄마의 엉덩이나 톡, 치면 된다. 괜한 죄책감에 대신 줄줄 울어줄 필요도, 엄마와 다르게 살고자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다. 엄마와 딸의 최선을 이 정도로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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