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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낮달 - 이경구 수필집
이경구 지음 / 선우미디어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푸른 하늘에 낮달이 비껴 떠 있는
맑은 가을날에 이경구님의 에세이집 『시애틀의 낮달』을 읽는다. 책 표지에는 침엽수림을 따라 흐르는 강줄기에 낮달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는데
연어들이 거슬러 오르는 이국적이고 시원한 그림이 실려 있다. 먼저 출간한 『소렌토 아리랑』처럼 이선생님의 아드님 작품인 듯하다.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를 헤쳐 오르는
연어들 중 가장 크게 그려져 있는 연어가 아마 저자인 모양이다. 저자의 마음은 늘 시애틀에서 한국으로 달려오고 있다. 그래서 책 속의 작품들은
거의 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주제별 묶음 편집의 사이사이에 수록된 사진도 고국의 오래된 모습을 많이 담았다.
<생률을
파는 할아버지>에서는 메모가 빼꼭히 적혀있던 선생님의 수첩을 보는 듯하다. 시간과 장소와 내용이 아주 조금씩 바뀌어간다. 그러나 더디 가는
듯하던 시간이 어느 순간 아차 하는 사이에 달력 한 권이 후딱 지나가 버리는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
저자의 글은 한 번에 다 쓰여지지
않는다. <천안 호두과자> 한 편의 글이 쓰여지기까지 선생님은 천안을 대여섯 번, 아니 잘은 모르지만 열 번은 다녀오셨을지 모른다.
그때마다 메모를 해 두었다가 그걸 모아서 한 편의 글로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선생님의 산책길을 걸어 다니는 수필길이라고 하고 싶다.
<내
문학의 고향>은 잠깐 잊고 있던 백미문학 17년의 역사를 펼쳐보는 듯하다. 오래 전 일들과 오래 함께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결국
선생님은 긴 시간의 메모를 통해 역사기록을 해 나가는 것이다.
쉽고도 편한대로만 흘러가는 세간의
습속을 거슬러 한사코 반듯한 길로만 가시는 이선생님의 행로 또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길을 닮았다. 선생님은 백미문학 모임에서 언제나
1등자리를 지키신다. 약속시간에도 늘 먼저 와 계시고 원고를 보내실 때도 늘 1등이시다. 외교관의 일을 오래 보시면서 나라간이든 사람간이든
신의를 최우선으로 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다져오기도 하셨겠지만 그보다 더 먼저 타고난 신사의 마음일 터이다.
이선생님이 기록하는 외교와 역사의
장면에는 유감이 없다. 저자는 외교문서에 기록되는 유감(sorry)이 이무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시위>에서처럼 버마 외교관들과의 조우 기록이나 선배 외교관 시인의 시 인용 등 사실만 기록하여 전달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독자의 가슴에 서늘한 충격이 전해진다. 그건 한일합병의 소식에 절망한 매천의 절명시로 마감한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에 대한
단상>에도 잘 드러난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바른 판단과 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을 자신의 목소리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보여줌으로 분명히 전달해 내는 것이다.
선생님의 글에는 나이 듦의
안타까움이나 회한이 없다. 저자가 돌아보는 유년과 고향과 조국은 추억으로 아름답고, 노년의 여유와 관조로 넉넉하고 평안하다. '公心如日月'로
시작하는 <동쪽 창가에서>는 저자가 한 해를 맞고 보내는 모습이 보인다. 동창 밖의 맞은편에서 뜨던 해가(춘분) 북쪽으로 올라가서
뜨다가(하지) 다시 맞은 편 정동으로 갔다가(추분) 남쪽(동지)으로 오르내리는 동안 저자가 읽고 쓰는 내용을 독자도 함께 보는 일은 즐겁다.
이 모든 일들이 지나가는 동안
선생님의 곁에는 한결같은 부인의 자리가 있다. 이른 새벽 눈을 뜨고 물방울소리를 내며 영어문장이나 시를 읊는 남편에게 시 읊기를 다시 청해
단잠을 더 재우는 아내. 또는 양말을 꿰매는 아내 곁에 조용히 앉아서 아내의 바느질을 들여다보다가 "헌것이 있어야 새것이 있다.<아내의
바느질> " 는 말을 들어주는 남편. 아내와 함께 간 음식점에서 “음식 맛을 돋우지 않으니 칠보시가 음식점에 맞지
않다.<자두연두기>”는 촌평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두 분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롭고 멋지고도 다정한 풍경이다. 모름지기 나의 노년도
이와 같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선생님의 글을 따라서 내 마음도
노량진 역 근처를 서성인다. <김가네 김밥>집에 들어가 조셀린의 안부를 묻고, <노량진 우체국>의 신임여직원에게 『시애틀의
낮달』을 전해주고, <종각역의 금붕어>도 들여다보고 모두들 잘 있더라고 이선생님께 안부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