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온도 - 청소년 테마 소설 문학동네 청소년 22
김리리 외 지음, 유영진 엮음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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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온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름은 대체로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어지곤 하지만, 우리가 일생동안 만들고 모으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을 제치고 남는 것은 결국 이름이라는 소리다. 내가 하는 공부, 이루고자 하는 꿈 등등의 수렴점은 출생 전에 나에게 부여된 이름 석 자인 것이다. 납득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 문제는 사실 이름이 어떻게 존재 가능한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자취를 남긴다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에 새겨진다는 것과 동일한 말일 텐데, 이 말은 즉 슨 어떤 관계망을 필요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관계의 선수조건인 ‘이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는 이름을 남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졸업도 눈앞에 둔 지금까지 꽤 많은 관계를 맺어온 것 같지만, 내 이름을 올곧이 불리어진 적은 없다. 나는 34번이나 35번 따위의 번호로 불려왔다. 설사 내 이름이 불린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관계망 속에서, 그들이 부르는 ‘내 이름’이 진실로 ‘내 이름’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내가 그들과 맺은 관계부터가 진실로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능이 곧 이지만, 이러저러한 기분에 따라 청소년테마소설 한 권을 손에 잡았다. ‘관계의 온도’라는 제목의 책이다. 다분히 공동체적인 제목인 듯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관계라는 말의 성격은 집단적이기보다는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개인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더불어 항상 어떤 질서관계, 요즘 한참 쓰는 원서나 자기소개서 안에 필수로 들어 가야하는 나의 ‘이름’이 궁금한 까닭도 있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점에서 꺼낸 책이지만, 작가들이 포착한 관계성도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7개 단편소설들의 제목일 텐데, 소설의 제목들은 사람의 이름은 물론(철용, 수) 아파트 호수(1705호)와 추상적인 어구(미래의 남편, 너)로 지어져있다. 세부적인 내용 또한 이름이라는 골격 아래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맺어지는 관계들이다.

 등장인물들의 고민 또한 나와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도 나와 같이 여러 이름을 불리곤 있지만, 그것들의 문제를 역설하고 있다. 처음 소개되는 소설 <1705호>는 아파트 호수라는 피상적인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죽고 만 사실을,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개명까지 한) 나나가 힘들게 맺는 관계를, <철용>은 ‘학생’ 철용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을 담는다. 이후 네 편의 소설들도 마찬가지로 사회를 살아가는 ‘이름’과, 그 이름의 실제 주인인 ‘개인’의 관계를 그리며 사건화시킨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관계 속의 나와, 실제 ‘나’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인상적인 소설은 <철용>이다. 철용은 담임선생님이나 힘 센 친구 강경준의 말과 같이, 자신에게 부여된 관계적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소설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이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이나 고민들만을 담아냈더라면, <철용>은 이에 반기를 드는 행동을 먼저 실행한다. 이는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애에게 선물을 주는 행동과 같은 것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선물이 ‘남자’가 보통 해선 안 되는 뜨개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남자라는 이름에 어긋났기 때문에 계집애 같다는 소리도 듣지만, 꿋꿋이 실제 ‘자신’의 행동을 지속해내어 최종적으로는 관계 속의 ‘나’와 실제 ‘나’를 일치시킨다.

 한 가지 목표만을 부여받아 내가 쓰는 이름들은 과연 실제 나와 같을까. 하는 고민에 나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다분히 합격만을 위해, 관계가 내게 씌운 이름으로 나는 내 이름을 쓰고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남길 것이 결국은 이름일 텐데, 어느 수위가 적당할는지 걱정스럽다. 큰 시험을 앞에 두고, 나는 이런 정도의 대리충족만을 감행할 뿐이다. 지금 미적지근한 내 이름의 온도와 달리, 실제 내 이름의 온도는 얼마나 뜨거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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