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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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과 분석은 제법 예리했지만 처방과 고찰은 많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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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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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럽에서는 종교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세 부류로 나눈다. 이탈리아어로는 이를 아테오’(ateo)크레덴테’(credente), 라이코’(laico)라고 부르는데, ‘아테오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를 가리킨다. ‘크레덴테는 신앙을 가진 자인데, 특히 프라티칸테’(praticante)라는 형용사를 붙이면 교리를 충실히 시키고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을 말한다. ‘라이코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종교가 관여하는 분야와 관여해서는 안 되는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처음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라이코’,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을 철회하라는 강요를 받은 갈릴레오도 라이코였다.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과학혁명을 이끈 이들은 모두 라이코들이라고 해도 좋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총지휘하여 2003년에 마침내 인간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혀낸 미국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S. 콜린스(Francis S. Collins)의 저서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는 가히 라이코 자아 선언서라고 불릴 만하다. 우선 그는 과학을 앞세워 신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종교와 신앙의 가치를 무참히 깎아내리는 아테오’, 이른바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프랜시스는 특히 무신론의 주장이 증명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음을 지적하면서, 과학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자연을 초월한 신에 대해서는 과학에 근거하여 그 존재를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비이성적 태도이며 이는 맹목적인 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꼬집는다. 극렬한 아테오는 극렬한 크레덴테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문자적인 의미로 신앙을 해석한 나머지 모든 과학적 진보를 거부하려는 크레덴테즉 창조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큰 우려를 표명한다. 수많은 과학적 증거를 애써 외면하면서 비논리적인 자연관을 고수하는 것은 신앙의 존립기반을 완전히 뒤흔들 수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지적 파멸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태도임을 애써 강조하면서, 과학 지식이 곧 신의 창조 원리임을 자각하고 새로운 과학적 사실의 발견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신앙인들에게 주문하였다. 그리고 아테오크레덴테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그 둘 사이의 왜곡된 교잡물이라 할 수 있는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ID)’도 프랜시스의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지적설계론은 현재의 과학수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신의 섭리로 메우려는 실망스런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하며, 신의 섭리로 메워진 부분이 새로운 과학적 지식으로 대체될 경우 신앙에 심각한 해를 입힌다는 점을 언급한다

 

신앙과 과학 사이의 이러한 불협화음을 조정하고자 저자는 유신론적 진화’, 이른바 바이오로고스(BioLogos)라고 불리우는 신앙과 과학의 새로운 조화 가능성을 제안한다. 이는 우주론과 진화론 등 현대 과학이 이루어 놓은 이성적 지식체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한편으로, 세계 각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도덕법과 종교현상을 근거로 영적 본성과 영적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취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물론 저자의 초기적 발상과 가설에 불과한 개념이지만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되 그 둘을 조화롭게 안고가려는 라이코적인 사고방식과 고뇌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백미(白眉)는 저자가 추상적이고 해묵은 이분법적 유무신론 사고에서 벗어나 마침내 실존(實存)을 자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바로 나이지리아 선교의료 봉사에서 자신이 치료한 어느 농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사건이다. “제가 보니까 선생님은 지금 내가 대체 여기를 왜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선생님이 여기 오신 이유는 딱 하나예요. 저를 위해 오신 거예요.”

 

보행자 증발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마주 오는 두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그 사이에 있는 보행자 모습은 운전자의 육안으로는 잘 안보이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과학과 종교, 무신론과 유신론, 이성과 신앙이라는 전조등 불빛이 서로 마주보며 밝아질수록 그 사이에 놓인 구체적 인간의 실존은 더욱 흐릿해지게 된다. 인간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 도리어 인간보다 상위에 군림하여 삶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바로 그러한 것들의 추상적인 의미와 상호 대립에 매몰된 나머지 자신이 치료한 농부 한사람의 실존을 직시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헤매다가 그의 심중을 눈치 챈 그 농부로부터 통쾌하게 한방을 먹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

 

대체 무엇을 위한 논쟁이었던가? 신이 있느냐 없느냐, 과학과 신앙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느냐 따위를 놓고 수천수만 번의 논쟁을 거듭한들 한사람의 인간을 살리지 못한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실존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비로소 그 실존에 숨어있는 신의 자취를 감지하고 신의 존재를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가 느끼기에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신은 과학에도 없었고, 종교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둘 사이에 놓인 사각지대에서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전()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존에 내재해 있었다. 또한 그렇기에 프랜시스는 과학과 종교의 양립과 조화에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진정한 라이코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편, 이 책의 말미에는 생명윤리학의 문제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 부록이 본문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 성체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 체세포핵치환 등 최신 생명공학기술들의 장단점과 윤리적 쟁점을 다루었는데 저자가 윤리적 논란이 가장 적은 방법으로 체세포핵치환 기술에 주목하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또한 맞춤형 의학과 유전자 정보 제공과 관련된 윤리적, 제도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과학자와 의학자 위주로 구성된 전문가 독주 현상을 경계하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다양한 견해를 서로 경청하며 나눌 것을 권고하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저자 자신뿐만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어설픈 아테오크레덴테에서 벗어나 건전한 라이코로서 거듭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마주보는 두 전조등의 조도를 낮추어 그 사이에 놓인 보행자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게 된다면 우리 인류는 새로운 라이코두 사람을 얻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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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 1
클라우스 코흐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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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화는 무엇일까? 창조신화? 홍수신화? 인간 기원신화? 인류 최고(最古)의 수메르 문명을 비롯하여 이후의 아카드, 바빌론 등 고대 근동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대인들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들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에 근거하면 가장 최초로 문헌적 구성을 갖춘 신화는 신이 저승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이야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메르의 인안나(바빌론의 이슈타르)여신과 그녀의 남편인 두무지(바빌론의 탐무즈)의 저승 하강과 복귀 신화다. 이들이 저승으로 내려가 신전을 비우면, 지상에서는 재해와 기근, 전쟁과 같은 고통이 인간들에게 밀어닥친다. 그러나 신들이 지상으로 돌아오면 다시금 풍요와 번영이 시작된다. 고대 근동인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세상과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실존적 고통(주기적 기근, 역병, 자연재해, 전쟁, 계절변화 등)과 그로부터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들이 저승에 내려가며, ‘어떤 이유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그 어떤 문헌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들의 노역을 대신 떠맡기 위해 창조된 하급의 피조물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제넘게 자신의 신이 왜 신전을 떠나 저승으로 내려가고, 왜 다시 돌아오는지를 함부로 알려 해서는 안 되었다. 인간의 대표자인 왕만이 신탁을 통해 그 내막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을 뿐,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제의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신이 저승으로 내려가 지상에 재난과 고통이 만연하면 그의 조속한 귀환을 열심히 빌어야 하고, 지상에 다시 올라오면 열렬하게 감사와 찬양의 제의를 드리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역사 이래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학적 의문은 이렇게 제의와 신화 속에 가려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신 야훼는 인근 주변 민족들의 신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자신이 왜 백성으로부터 떠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돌아오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묻고 따졌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 구약학 교수인 클라우스 코흐는 자신의 저서예언자들(The Prophets)에서 바로 이 철저하게 묻고 따짐의 역사적, 신학적 전개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주요 주제가 이스라엘의 예언과 예언자라는 점에서는 조셉 블레킨솝의이스라엘 예언사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블레킨솝이 예언의 시대적 배경과 맥락의 흐름에 중심을 둔 것과 달리, 코흐는 예언자 개개인의 사상적 특성과 신학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아시아 한자(漢字) 문화권의 저술 방식에 빚대어 표현하자면, 블레킨솝의 저서는 일종의 편년체(編年體)적 흐름을 타고 있으며, 코흐의 경우는 열전(列傳)의 형식을 빌었다고 볼 수 있다.

 

예언자 열전을 통하여 코흐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당대 근동 문명에서 금기시된 신학적 의문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독특한 윤리적도덕적 신관(神觀)으로 확장해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예언자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의 신이 백성들로부터 등을 돌려 떠나고, 백성들이 혹독한 재앙을 맞는 것은 백성들 스스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저버려,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뿌리부터 썩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금수(禽獸)의 본능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정착할 땅을 확보하여 그곳에서 공동체와 사회 제도를 만들고, 사회 구성원간의 합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야훼로부터 땅을 받았고, 그 땅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방법들까지 부여받았다. 그러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땅을 동족끼리 강탈하고, 그 땅에서 온갖 부조리와 악덕들을 자행하면서 이스라엘의 사회는 근저부터 죄에 오염되고 말았다. 그렇게 만연한 사회의 악()은 하느님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인 제의까지 더럽힌다. 제의를 더럽힌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더럽히는 것이다. 더럽힘을 당한 신은 당연히 백성들을 떠난다. 백성들을 지켜주는 신이 떠난다는 것은 곧 그 백성들에게는 재앙의 시작이다. 신의 떠남은 곧 심판이요, 진노일 수밖에 없다. 되돌릴 수 없다.

 

바빌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예언자들은 떠나가 버린 하느님이 다시 돌아온다는 희망과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백성들이 행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하기 시작했다. 포로기의 예언자들에게 신의 떠남은 곧 돌아오고자 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회복에는 정화의 아픔이 따른다. 타락한 사회 정의를 복구해야 했고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제의를 다시 정돈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통찰하고, 개개인 하나하나가 하느님과 윤리/도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예언자들은 사변적이고 어려운 신학을 결코 대중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조상들을 통해 하느님이 주신 땅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고 그 땅에서 사회 정의를 다시 실현하면 된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와 타락이 쌓이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오염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회개와 신의가 모이면 민족 전체가 살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예언자들은 인간 역사 속에 숨겨진 하느님만의 초월적 역사, 곧 메타 역사를 발견하고, 모든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유일신이자 창조주로서의 야훼를 확신하기에 이른다. 주변 민족의 신화에서 기원했던 물음에 대해 히브리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학적 체험으로 응답한 것이다

 

왜 신은 떠나는가? 그것은 인간이 신과의 약속을 잊고 불의와 타락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왜 신은 돌아오는가? 그것은 인간이 다시 신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떠남과 귀환, 다시 말해 심판과 구원은 전적으로 인간의 태도에 달려있다. 하느님이 떠나고 없더라도 인간은 하느님과의 약속과 공동체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이 진노를 거두어 돌아오고, 고통의 시간이 줄어든다. 하느님이 민족에게 돌아왔더라도 약속과 정의를 실행하는 데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지속되고, 현세 역사의 번영과 발전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750년경부터 500년까지 활동했던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생각했던 인간, 그리고 20세기 코흐가 예언자 열전을 통해 재해석하고자 했던 인간은 단순히 신들의 노동을 하청 받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적극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코흐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주변 민족들의 예언현상도 기원전 500년경을 전후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언을 통해 윤리/도덕적 인간관과 유일신 신학, 묵시문학을 발전시켜 더 이상 예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주변 민족의 예언까지 사라졌던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동심원의 중심부인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그 주변 원을 구성하는 이방 민족들에게도 회복이 시작되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회복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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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예언사
조셉 블렌킨솝 / 은성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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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참으로 미묘한 힘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말은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평생 동안 삶을 괴롭힌다. 반대로 깊은 사랑 안에서 소망을 일깨워 주는 말은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 이것은 말이 곧 의미이며 의미는 과 통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뜻이 생명이다. 삶의 뜻, 삶의 의미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삶이다. 삶의 뜻을 전혀 찾지 못하면 자살까지도 하는 것이 사람이고, 삶의 뜻에 부합하면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바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모여 이루는 집단인 민족이나 국가에도 말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이 경우에는 말이 곧 사상이며 사상은 희망으로 통한다는 점이 다르다. 민족, 국가의 명운에는 희망이 생명이다. 희망이 없으면 역사의 위기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희망을 갖지 못한 민족은 희망을 가진 민족을 당해낼 수 없다.

 

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희망을 발견하여 꿋꿋하게 이산(離散)의 역사를 인내하다 마침내 2천 년 만에 국가를 재건한 민족이 있다. 한때 히브리인이라고 불렸던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이 바로 그들인데, 특이하게도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말이 없다. 이들에게는 오직 신()의 말, 곧 야훼 하느님의 말씀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먼 옛날 어느 날에 히브리 민족 전체가 단체로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하루아침에 뚝딱 받아쓰기하여 얻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고대 근동 민족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도 신의 말씀을 신으로부터 전달받아 왕이나 회중에게 선포하는 임무, 예언(預言)’을 맡았던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민족과는 달리 유독 히브리인들은 예언자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를 수집하고 자신들이 헤쳐 왔던 역사의 거울에 비추면서 그것을 오랜 기간 동안 다듬고 정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의 메시지들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하여 어렵고 어렵게 건져 올린 것이다. 따라서 유대 민족에게 예언(預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그들 자신의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예언을 모르면 그들의 사상과 희망은 물론이고 유대 민족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대인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 수 없는 문제로도 연결된다.

 

앵커 바이블에 올라간 이사야서 주석으로 명성을 떨친 영국태생 구약학자 조셉 블레킨솝(Joseph Blekinsopp)이스라엘 예언사(A History of Prophecy in Israel)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바로 이 이스라엘 민족의 예언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이 예언서의 역사가 아닌 예언 그 자체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본문이 후대의 첨가이고 어떤 구절이 예언자 본래의 메시지였는지를 따지는 것은 최소한 이 책에서만큼은 부수적인 문제다. 물론 역사 비평적인 방법으로 예언서의 편집과 최종 본문의 형성 과정을 충분하게 다루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언의 역사적 사회적 변화 과정과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의 진정한 의도는 특정 예언이 최초로 출현한 시대와 그 예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거나 수정을 시도한 시대의 국제, 정치, 사회, 종교적 맥락을 비교하여 이스라엘 예언의 의미와 범위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언이 어째서 그토록 다난하고 변화무쌍한 역사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제도 속에 성공적으로 녹아들고 그들의 희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레킨솝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부터 헬레니즘 시대까지 국제, 정치, 사회적 상황의 흐름과 함께 예언 성격과 변화 과정을 예언서에 대한 역사 비평 방법에 기초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역사 초기(광야시대부터 사무엘 전후)에는 예언이 곧 생존투쟁(전쟁)승리왕국의 건설을 의미했다. 그러나 왕국의 분단과 사회질서의 문란, 이방제의의 만연, 대제국 아시리아의 출현으로 인해 특히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예언의 양상이 달라졌다. 이때부터는 예언이 전쟁승리가 아닌 고발심판을 말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분기점은 역시 바빌론 유배였다. 이 유배를 계기로 이전 예언서에 심판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첨가하고, 예언과 제의를 하나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언을 희망의 메시지로 재해석하고 종교생활 속의 일부로 받아들여 바빌론 포로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는데 활용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울러 예언자의 전통을 모세까지 소급시키고, 예언서의 내용을 신명기계 율법 정리에 반영하는 등 자신들의 기원과 역사의식을 새롭게 갱신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유배 귀환 후 페르시아 시대 초기부터 헬레니즘 시대에는 예언의 의미가 종말론적 희망으로 더욱 풍부하게 확장되었으며, 하느님의 자유와 구원의지는 때때로 예언자의 예언을 뒤집을 정도로 확고하다는 메시지가 요나서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지의 거시적 예언사를 읽고 나니, 문득 신화와 인생(원제: Joseph Campbell companion)이라는 책에 나온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여러분의 종교는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유대인이나 가톨릭 신자가 되는 법을 말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되는 법을 말하는가?’

 

블레킨솝의 책을 읽은 지금은 단언컨대 이스라엘의 예언은 인간이 되는 법을 말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여느 작은 민족의 전쟁승리를 선포하는 지역 예언에서 출발하여 모든 민족의 구원과 희망을 말하는 종말론적 예언으로 확장되는 모습은 마치 일차원적 생존투쟁에 급급했던 사람이 점차 의연한 자세로 희망을 기대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를 지니는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성장을 이끌어준 예언의 역사를 오랜 기간 경험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했고 그 예언을 그분의 말씀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그들 속에서 생활 곳곳과 유대교 전례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2013년경 미국의 정보기관이 주요국 정상들의 전화를 도청한 일로 세상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언뜻 도청은 ()’가 저지르는 범죄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도청(盜聽)’이 무슨 뜻이던가? 남의 ()’을 훔쳐 듣는다는 뜻 아니던가? 한 나라 정상의 말은 그 정상 개인에게는 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나라 전체의 희망일 수도 있다. 남의 나라 희망을 몰래 훔쳐 듣는다는 것. 그것은 말에 대한 고약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은 곧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말을 사람의 말에 맡겨 전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말은 그 누구의 것이라도 인간이 함부로 도적질해서는 안 된다. 국경을 넘나들며 말이 무참하게 도난당하는 세태가 참으로 우려스럽다. 스스로의 말에 더욱 조심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더욱 귀히 여기는 풍조가 회복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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