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라 불린 소년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23
멕 로소프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1974년 8월 중순, 초등학교 6학년인 나는 집 앞 교정의 미끄럼틀 위에 걸터앉아 있다. 팬티까지도 벗어던지고 싶게 하던 한낮의 맹렬했던 더위가 이제 제법 풀이 죽어,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상쾌함이 묻어있다. 맑은 하늘의 하얀 솜털구름이 미소를 건넨다. 나는 그 미소를 아무런 느낌 없는 눈으로 받으며 한참을 그렇게 혼자 앉아 있다. 하얀나비 두 마리가 춤을 추듯 서로 마주보며 돌아간다. 나의 눈은 잠시 나비를 좇아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 소녀의 생각뿐이다.

 

삶이 망가지고 가족이 죽고 농사가 파괴되었을 때, 욥은 땅바닥에 무릎 꿇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왜요, 하느님? 왜 저입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우레와 같이 답하셨다. “난 네가 그냥 좀 짜증나.” - 스티븐 킹(소설가)

 

며칠 전 읽은 ‘신이라 불린 소년’이라는 소설의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글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왜 저 글을 옮겨 놓았는지 알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사춘기 소년 밥이다. 또한 그는 우주의 변방인 태양계를 관장하는 하느님이다. 밥은 일에는 관심 없고 자기가 만든 인간(예쁜 여자)과 연애하기 바쁘다. 그래서 미스터B라는 중년신이 그를 보좌한다.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지구의 기상 예측은 어려워진다. 더웠다가 갑자기 추워지고 가뭄이다가 대홍수가 몰려들기도 한다. 밥이 날씨를 자기의 기분과 연동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밥이 이번엔 동물원 사육사인 루시를 사랑한다. 밥에게는 오로지 그녀를 지켜보고 만지고 함께 하고자 하는 욕망뿐이다. 엄마 모나의 충고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기상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소설 속 밥처럼 누구나 어렸을 때 한번쯤은 사랑에 빠져봤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5학년 때 전학 온 소녀를 좋아하면서 2년 동안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모른다.

소녀는 대구에서 왔다. 큰 키에 길쭉한 다리, 큰 눈, 하얀 피부, 늘 빛나는 단발머리에 고급스런 옷을 입은 소녀는 tv에 나오는 전형적인 부잣집 딸이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수업시간에는 남들 눈치 채지 않게 몰래몰래 소녀를 훔쳐보았다. 소녀보다 뒷자리에 앉게 해준 것을 매일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방과 후엔 제법 먼 소녀의 집까지 걸어갔다. 작은 철대문 안으로 보이는 소녀의 집 마당엔 작은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치기도 하고 정원으로 작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내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설은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다. 엄마의 작은 말 한 마디에 화를 내고 어른들을 무시하면서도 예쁜 여자에겐 무한히 착해지고 집착하는 마음을. 밥의 이러한 행동을 나쁘게만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이 정말 깊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도 그랬다. 초등학교 5,6학년. 그 소녀에 대한 사랑은 내 맘 속에 깊고 굵은 자국을 만들었다. 부끄러워, 초라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말 한 번 건네지 못한 사랑이지만 그 사랑의 순도나 밀도는 이후 내게 다가왔던 그 어떤 사랑보다 높았다.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는 나는 생각한다. ‘방학이 빨리 끝나고 학교에 갔으면 좋겠다.’라고. 그래야 소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학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고 한숨짓는다. 지난 한 달 동안 나의 머릿속은 지루함으로 하얀 버짐이 피었고 마음은 그리움으로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이런 나에게 한 가지 즐거움이 있었다면, 그건 꿈속에서나마 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늘 어처구니없게 끝나버렸지만 이런 여행마저 누릴 수 없었더라면 나의 하루하루는 훨씬 더 지겹고 힘들었을 것이다.

 

소설은 밥과 루시의 사랑을 그리면서도 또한 현재, 지구를 방치하고 있는 신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 어쩌면 그 조롱은 신이 아니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을 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구는 지금 역병을 앓고 있고 인간들은 브레이크 고장 난 기차를 타고 절벽을 향해 죽음의 질주를 하고 있다. 공멸을 막기 위해서는 기차를 세워야 한다. 하지만 승객들은 물질 풍요라는 마약에 취해 현재를 즐길 뿐이다. 1% 소수가 각성을 외쳐보지만 그들의 외침은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연기처럼 흩어져 버린다.

이와 같은 지구의 현실을 소설은 사춘기 소년의 사랑 얘기에 잘 버무려 놓았다. 낄낄거리며 다 읽고 나면 마치 작가에게 낚인 듯한 기분이 든다. 하나 둘.. 어두운 현실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의 의도가 뭘까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상황 속에 작가는 슬쩍 희망씨앗 하나를 묻는다. 밥이 태양계를 떠나는 대신 미스터B와 에스텔(소녀 여신)이 지구를 맡고 루시와 루크가 가까워진다는 것은 지구에 새로운 세상이 올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 씨앗이 싹을 틔워 우리가 변하고 달리는 기차가 멈출 수 있을 지도 몰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녀를 훔쳐보는 것도 졸업하고 말았다.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큰형수의 남동생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사돈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진주, 형수는 부산 출신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신의 장난이 얄궂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혹시 가끔씩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맘도 있었다. 왜냐하면 명절에 그 부부가 큰형님 댁에 인사하러 몇 번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16년 전, 동창회 뒤풀이에서 딱 한 번 함께 했을 뿐이다. 그 때, 그녀의 얼굴은, 숨기려는 본인 마음과 달리 삶에 지친 흔적과 외로움, 슬픔 등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슬픈 분위기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나의 측은함까지 더해져서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고 희미해져 가던 내 마음 속 자국은 그날 이후 다시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도 적당한 조건이 맞춰지면, 즉 비가 내리는 날 술을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라든지, 나 혼자 집을 지키는 한밤에 글을 쓰고 싶어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엔 그녀가 내 맘속 자국을 열고 나를 찾아온다. 한 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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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는 똑똑해
김미희 지음, 양경희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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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산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동시는 똑똑해>를 읽은 쉰이 갓 넘은 중년 남자다.

이 나이에 동시를 읽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근데 김미희 님의 첫 번째 동시집 <달님도 인터넷 해요?>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마치 추리소설 읽듯이 단번에 다 읽어 버렸다. 그 만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면서도 모든 시에 기발함이 들어 있어, 읽는 내내 '이 작가 참 대단하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두 번째 동시집인 <난다 난다 신난다>도 정말 신나게 읽었다. 세 번째 동시집인 <네잎클로버 찾기>는 접하지 못하고 이번에 <동시는 똑똑해>를 통해 오랜만에 김미희 님의 동시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작가는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동시가 똑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한 시인이 똑똑하게 가르쳐 주었다.

벌써 다음 시집이 기다려지는 건 너무 성급한 걸까?

 

'황사'는 황사 때문에 학교도 못 가고 밖에도 못나가는 상황을 감옥에 갇힌 걸로 생각하면서 감옥 속에서 황사를 생기게 만든 인간들의 잘못을 반성한다. 정말 기발하고 재밌으면서도 그 속에 우리 사회 전체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들어 있다. 동시이면서도 어른시인 것이다.

 

'잔소리'는 잔소리를 듣는 아이의 마음을 잘 집어내어 이 시를 읽는 내 입가에 웃음이 터져 나오게 했다.

 

글재주가 없어 더 이상 설명하기 힘들다는 게 안타깝다.

이외에도 모든 시들이 나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단번에 독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을 때 가끔씩 다시 읽어보고 있다.

그러면 내 머리와 마음이 박하사탕처럼 쏴아~해지면서 맑아진다.

동시가 나를 똑똑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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