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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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화집 밀림이야기(2000) 이후 최초로, 국내에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수록된 일부 단편은 환상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원제의 표현대로 쉼표 없이 나열된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은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관념들인 동시에 그가 경험한 삶을 요약하는 하나의 관념처럼 느껴진다.

   「사랑의 계절, 엘 솔리타리오, 이졸데의 죽음이 세 단편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사랑에 대해 다루는 듯하나, 실은 배후의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의 계절에서 리디아가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되지 않은 이유, 엘 솔리타리오에서 카심의 사랑이 어떤 형태인지 묘사되지 않은 이유, 이졸데의 죽음에서 파디야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이 소설들이 단편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 소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엉킨 여러 욕망을 보여준다. , 엇갈린 욕망이 결국 좌절과 파멸로 치닫는 과정을 그려낸다.

  「목 잘린 닭부터 우리가 처음 피운 담배까지의 11개의 단편에는 죽음이 안개처럼 깔려 있다. 자욱한 죽음의 안개는 소설이 이어지는 내내 긴장감을 조성하며, 특히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 표류, 천연 꿀등의 소설에서는 짧은 긴장 끝에 이어지는 담백한 결말이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현재는 종영한 TV 프로그램 위기탈출 넘버원에서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죽음을 재연한다. 어떤 소설에서는 권선징악을 실현하기 위해, 공포영화에서는 공포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혹은 저주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죽음을 장치로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키로가의 소설들 속 대부분의 죽음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불안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의 소설에서 죽음은 우연한 기회에 너무나도 쉽게 찾아오며, 닥쳐온 죽음과 불안이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키로가가 이런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게 된 데에는 포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그가 겪은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고, 이후 계부마저 뇌출혈로 인한 투병 생활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열일곱 살이던 당시 계부의 자살을 직접 목격했기에 그가 받은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02, 그는 오발 사고로 친한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극에 처하기도 했으며 1910, 누나와 형을 장티푸스로 잃었고, 1917년에는 아내인 아나 마리아 시레스마저 자살 시도 끝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듯 집요하게 키로가를 따라다닌 주변인들의 죽음은 그의 삶 속에서 불가해한 독립사건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는 죽음의 본질적 성질이기도 하다. 죽음은 서서히 다가오기도, 갑작스럽게 찾아들기도 하며, 그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맥락이나 규칙도 찾을 수 없다. 그의 소설은 이런 죽음의 임의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 수많은 죽음 속에서 키로가 본인 또한 위암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가 1937,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목 잘린 닭은 본 단편집에서 키로가가 설계한 비극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단편이다. 소설 전체를 뒤덮은 강렬한 붉은 색감, 암시적 문장 배치를 비롯하여 플롯 구성이 탁월하고, 마지막까지 읽고 나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이 괴로운 상황만이 남겨지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이 단편에서만은 키로가가 죽음을 비극의 설계를 위한 장치로써 사용했다고 느껴졌다.

  본 단편집의 대부분의 단편에서는 뒤틀린 사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이 뒤엉켜 있다. 하지만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만은 두란의 기묘한 사랑이 좌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불행하게만 보이는 키로가의 삶에도 행복했던 순간은 존재했을 것이다. 비록 결국엔 자살을 택했지만, 그 작은 행복이 그나마 거기까지라도 버틸 수 있도록 그의 삶을 지탱해준 기둥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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