늠름한 소국 - 빛나는 작은 나라들 : 코스타리카 쿠바 우즈베키스탄 미얀마
이토 치히로 지음, 홍상현 옮김 / 나름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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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하반기부터 읽었던 몇 권의 책들비에른 베르예의 오래된 우표사라진 나라들조슈아 키팅의 보이지 않는 국가들다카노 히데유키의 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으로 읽었다이 지구상에는 미국일본중국영국독일프랑스 등을 비롯한 대국(大國)만이 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작은 나라들도 자신만의 독립성을 지키면서(지키고자 고군분투하면서나름의 문화를 일구며 존재하고 있다당연히 우리의 삶에는 크거나 잘 사는 나라들에 의존하고 연관을 맺는 경우 많겠지만그런 나라들의 존재에 대해서 무시할 이유는 없다아니 오히려 그런 나라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더 큰 시사점을 주는 경우도 있을 듯하다.

 

대학 시절부터 작은 나라들에서 활동을 해오고신문 기자가 된 이후에도 그런 나라들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켰던 이토 치히로는 여행사의 기획에 따라 2016년부터 2017년 사이에 네 나라를 방문한다코스타리카쿠바우즈베키스탄미얀마(코스타리카와 쿠바는 그에게 이미 익숙한 나라였지만우즈베키스탄과 미얀마는 그렇지 못했다). 이 나라들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고위치와 역사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나라도 있지만 그 나라들에 대해서 깊게 관심을 가져본 적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쿠바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에 의한 쿠바 혁명그리고 케네디 시절의 쿠바 위기 등으로 익숙한 나라이지만최근의 상황에 대해서는 무지하고미얀마는 버마라 불리던 시절의 북한 테러로그리고 이후 수치 여사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또 최근이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나라이다하지만 역시 미얀마도 어떤 경로를 거쳐 민주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그리고 현재 상황은 어떤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형편이다.

 

그래서 쿠바와 미얀마가 궁금했다쿠바는 미국과의 외교 정상화에 이어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고미얀마는 아직도 군부의 힘이 막강하지만 부분적인 민주화를 이루면서 역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특히 쿠바의 경우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사회정의에 기초한 국가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그런데 정작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나라는 코스타리카다중미의 코스타리카가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평화헌법을 제정한 나라라는 것도 몰랐었다(‘일본에 이어라는 말이 지금 상황에서 얼마나 무색한 말인지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진짜 군대를 없애고군사비 예산을 교육에 투자해서 진짜 평화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이 높고행복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코스타리카야말로 이 책의 부제인 빛나는 작은 나라들에 어울리는 나라인 것이다.

 

우즈베키스탄도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건 저자인 이토 치히로도 마찬가지다). 독재국가이며 매우 위험한 나라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며 그렇게 소개되고 있지만독재국가인 것은 맞지만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국가 중에 유일하게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는 나라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또 탈출 계획을 미리 염두에 두고 가야할 만큼 위험한 나라도 아니라는 게 치토 이치로의 경험이다.

 

단 네 나라만 소개하고 있고이 네 나라만이 주목받아야 할 작은 나라들은 아닐 것이다세계의 모든 작은 나라들 모두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는 나라들일 것이고또한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런 나라들 모두를 아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그 작은 나라들의 이름을 접했을 때 무턱대고 무시할 권리를다른 나라들이 가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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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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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호의 스완을 읽으며 그의 대뷔작 도덕의 시간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되돌이켜보았다. 거기서 오승호는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형식에 도덕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여기서도 그는 소설 속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구도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사건은 소설의 초반에 다 벌어진다. 4월의 일요일.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모티브로 한 대형쇼핑몰 스완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 묻지마 총격사건이다.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본인들은 자살해버린 사건. 그러나 소설은 금새 그 범인들에서 초점을 거두어버린다. 그 총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중심에 선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고, 죽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명목상으로는 그날 상식과는 조금 벗어난 행적을 보이면서 살해된 어느 할머니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다섯 명의 생존자를 모으고 그들의 행적을 쫓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의 비밀이 조금씩 벗겨지는데... 소설은 그 과저에서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가타오카 이즈미는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를 지목해야만 했고(혹은 그렇다고 언론에 의해 왜곡되었고), 범인들을 쫓고, 부상당한 이를 도우려고 했는데 흥분하여 던진 말에 할머니가 죽게 된 이도 있고, 아내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범인은 죽고 없으니) 또 다른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몫을 지라고 강요했던 이도 있고, 살아남기 위해 소년을 방패막이로 삼았고, 그후 그 상황을 왜곡하는 기사가 나가도록 한 친구도 있다. 정말 악은 시종일관 악이고, 선은 시종일관 선인가? 우리는 순간순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때마다 결정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뿐 아닌가?

 

특히 가타오카 이즈미가 언론과 SNS를 통해서 받는 비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왜 이렇게 악의가 만연해 있는 건가요?“라고 항변하며, 사실을 알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세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 사실을 밝히고 그걸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다짐. 그 끝이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점점 그녀에게 감정이 이입되는 나를 느낄 수가 있었다. 소설이 이야기로서 가지는 매력과 함께, 소설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과 입장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도덕적 효용성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아픈 소설이지만,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이고, 반전은 극적이지 않지만,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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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알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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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최근 메스머에 관해서는 두 번이나 책을 통해 접했다. 리디아 강과 네이트 페더슨의 돌팔이 의학의 역사, 톰 필립스의 진실의 흑역사.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메스머, 혹은 메스머리즘에 관해 이 두 권의 책은 매우 부정적이다. 돌팔이 의학의 역사에서는 돌팔이 의사였고, 진실의 흑역사에서는 거짓말쟁이였다.

 

그러나 로버트 단턴의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에서는 그의 의미가 달리 전해진다. 물론 메스머의 치료 기술은 사기에 가까운 것으로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활약한 시기에 그의 기술과 생각(나아가 철학)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데 대해 분명 분석해야 해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그는 단순한 사기꾼, 돌팔이 의사만은 아니었다: “메스머주의가 오늘날에 터무니없어 보인다고 해서 역사가들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메스머주의야말로 1780년대 글을 아는 프랑스인들의 관심에 완벽히 부합했기 때문이다.” (33)

 

메스머주의가 가장 맹위를 떨친 것은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 전이었다. 오늘날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프랑스 철학자들의 계몽주의를 떠올리고, 가장 결정적인 저서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이 문맹인 프랑스 대중들, 나아가 글을 아는 이들이라도 그 따분한 책을 널리 읽었을 리가 만무하다. 심지어 로베스피에르 같은 이도 “1789년 이전에 사회계약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혁명을 예견하지 못했던 프랑스인들은 정치 이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메스머주의와 그 밖의 비정치적인 다른 유행들을 화제로 삼았다. ... 무엇 때문에 <사회계약론>같이 어렵고 당찮아 보이는 추상적인 관념들과 씨름하며 괴로워하겠는가?”, 75) 프랑스인들은 연애소설에 열광했고, 메스머의 치료 기술이나 열기구 같은 눈에 보이는, 새로운 과학에서 앙시엥레짐의 부조리한 구조를 타파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메스머는 독일의 의사였다. 그는 이른바 동물 자기론을 주장했고, 자석 없이도 자성을 띤 유체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인정받지 못한 그의 치료법은 1778년 파리에 도착한 이후 프랑스인들의 열광적 반응을 얻어냈다. 물론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그의 치료법에 부정적이었으며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등법원에 의해 제지당했지만). , 그는 기존 권위에 의해 박해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과 함께 혁신적으로 여겨지는 과학으로 인정한 이들에 의해 이른바 메스머주의로까지 이어진다. 마라, 카라, 브리소 등과 같은 나중에 프랑스혁명의 기수가 된 이들이 바로 메스머주의자였다: “메스머주의는 지나가는 유행 이상의 어떤 것을 표상했다. ... 메스머주의는 동시대인들의 태도의 핵심을 파고들어 과학과 종교가 만나는 모호하고 사변적인 영역에서 권위가 필요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101)

 

그렇게 그것이 과학적으로 성립하는지, 하지 않는지와 관련 없이 메스머주의는 프랑스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로버트 단턴의 주장이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사그라들었던 메스머주의가 19세기 중반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심지어 발자크나 위고와 같은 대문호도 메스머주의를 옹호하고 그에 기반한 작품을 썼다고 로버트 단턴은 단언한다: “동물 자기론은 메스머가 1778년 파리에서 그 존재를 선언한 이후 여러 차례 부활을 경험했다. 그리고 인간 희극레미제라블로 파고든 순간 메스머주의는 쓸모없게 된 계몽사상에서 멀어졌다.” (221)

 

우리는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한다. 메스머의 동물 자기론이 터무니 없이 비과학적이라는 알기에 그 이론에 열광했던 18세기, 19세기 프랑스인들을 이해할 수 없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그 시점에서 그 현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여기선 프랑스혁명의 진짜 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각이다. 혁명 전 급진적인 관념들이 어떻게 유포되었는지에 대해 알기 위해선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후대 사람들이 허구를 읽는 지점에서 18세기 프랑스인들은 사실을 읽었다.”(38)

 

* 참고로 로버트 단턴은 독자들이 메스머에 대해 이미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이 책을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메스머와 메스머주의에 대해 좀 불친절하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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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후계자들 - 역사학의 눈으로 본 예수 사후의 후계권 문제 역사도서관 23
정기문 지음 / 길(도서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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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후계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매우 쉬운 문제다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쉽게 대답할 수 있다바로 베드로 아닌가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 자체가 공식적으로 베드로의 후계자이고1대 교황을 베드로라고 하지 않는가그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역사학자 정기문은 이 자명할 듯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정말 그런가만일 그렇다면 그건 언제부터 자명해졌는가?

 

정기문은 예수의 후계자로 처음부터 베드로가 확고하지 않았다고 한다(교황이라는 자리 자체가 1세기 말부터 로마 교회의 주교였고, 4세기 이후에야 교황이라 불렸다). 원시 기독교에는 여러 종파가 존재하고 있었고예수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여러 인물이 각축을 벌였다고 본다그 인물로는 주의 형제 야고보사도 요한쌍둥이 토마스마리아 막달레나바울로그리고 여기는 가리옷 유다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다른 인물들과는 조금 의미는 다르지만).

 

베드로가 예수의 적통 후계자로서의 권위가 처음부터 확고했다는 인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된 계기는 1945년 이집트의 나일강 상류 지역인 나그함마디에서 나그함마디 문헌의 발견이다여기에는 원시 기독교의 다양한 종파에서 유통되는 많은 복음서가 새로이 발견되었고그에 따라서 당시의 단일하지 않았던 원시 기독교 내의 종파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정기문은 역사학자의 시선으로 기존의 사()복음서와 바울로의 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은 물론 마그함마디 문헌그리고 기타 새로이 발견되고 해석된 문헌거기에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들을 바탕으로 예수의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이를 통해 당시 원시 기독교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고어떤 갈등 요소가 있었으며그것이 어떻게 정리되어 최종적으로 베드로-바울로라는 적통이 인정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사실 (내가 신자도 아니어서 더 그렇겠지만), 주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서는 바로 며칠 전에 읽은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은 성경의 역사에서야 그의 위상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 생전과 사후에 상당한 위치에서 교단을 이끄는 위치였다는 것(혹은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여기서 처음 알게 되었다그리고 베드로-바울로 중심의 기독교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율법 문제가 중심이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원시 기독교의 많은 종파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이 한 종파라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종교적 편협성과 민족적 배타성에서 탈피하면서 기독교는 비로소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이 업적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겠지만실질적인 공을 누구에게 주어야 한다면 당연히 바울로일 것이고그에 못지않게 베드로에게도 주어져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철저히 역사책으로 읽었다(그래서 매우 흥미로웠다). 정기문 교수가 여기의 내용을 많은 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를 했는데이에 대한 신학자들의 비판적 논평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그랬음직하다그런데 신학이 아니라 역사학이라면 그 비판의 내용과 방향이 좀 달라야 한다고 본다여기에 추론한 내용들에 대해서 단지 어떤 한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으니 틀렸다는 식의 비판은 믿음에는 분명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역사학과 관련해서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듯하다이 책은 교회의 정당성을 파괴하고 비하하기 위한 논의로서가 아니다원시 기독교의 다양한 논의들이 결국엔 유대인 중심의 종교에서 세계인의 종교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이 책의 가장 큰 주제는 그게 아닌가내게는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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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은 성경의 역사
정기문 지음 / 아카넷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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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매우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약성경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지기는커녕 그 말씀들 즉 성경 본문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있다. 어제까지 멀쩡히 있던 본문에 어느 날 갑자기 없음이라는, 또는 삭제할 것을 고민 중이라는 표기가 붙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문구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모양이다.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오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신약성경이 탄생하게 된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이상할 상황이다. 우선 신약성경은 누군가가 쓴 글이다. 그 누군가는 바로 사람이다. 어떤 필요에 의해서 책을 썼고, 그 책에는 당연히 저자의 생각이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 책은 모두 필사본이었다. 그러니 책을 필사해서 전하는 과정에서도 필사자의 오류는 물론 그를 포함한 집단의 견해도 반영됐다.

 

원래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자기가 거룩한 성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글을 썼고, 나중에 자기네 글이 신앙의 참고 자료로 예배와 교육에 이용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 그들은 교회에 전해 내려오던 여러 전숭을 자신의 신학에 맞추어 편집했다.” (7, 180)

 

그러다보니 저자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한 복음서도 있고, 그 복음서가 전하는 상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 쓴 복음서도 있고, 새로이 쓰거나, 혹은 구절과 단어를 바꿔치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정기문은 19세기 이후 시작되고, 20세기 들어서는 활발해진 성경 필사본 연구, 성경에 대한 비평 연구를 토대로 신약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개변(혹은 변질?)되었는지를 논하고 있다. 제목에 교회에서 가르쳐주지 않은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많은 성경 연구자, 성경 편집자나, 기독교 지도자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내용들이다.

 

주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신약성경은 이른바 사복음서라 일컬어지는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이다. 이 사복음서는 특히 예수 당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그를 보필했던 사도들이 쓴 것으로 믿어지는기록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데 정기문은 여기의 기록들을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본다. 특히, 복음서의 제목이 되는 사도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초기 구성원들의 집단 작품이라는 견해다. 그리고 입장에 맞추어 개작되고 편집된 작품이라고 본다(그 근거들은, 당연히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서 간의 모순이 존재하고, 내부에서도 서로 상충되는 내용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오로 서간도 마찬가지다. 바오로야말로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만든 인물이다(어쩌면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오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 이도 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13권이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만 봐도 그의 권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13권 가운데 6권은 후대에 다른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라고 한다. 그나마 나머지 7편의 진정서간도 여러 편지를 모아 놓은 경우가 있고, 또 왜곡된 경우(특히 여성에 대한 비하 같은 것들)도 많다고 한다.

 

이런 정기문의 견해가 얼마나 옳은것인지 나는 판단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성경이 역사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본다. 역사 속에서 어느 정도나 개작되고 왜곡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을 거쳐 왔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이는 기독교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진짜 신앙이라면 모든 것을 무조건 믿는 것일까, 부터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진짜 성경, 즉 예수나 바오로의 가르침을 바로 알고 행하기 위해서는 그릇된 것, 모순된 것은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정기문의 작업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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