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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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쯤엔 책을 잘 보지 않는 나도 소설책은 가끔 보곤했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소설책을 아예 보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아마 26살 정도였던 것 같다. 그 때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보다 5살 많은 오빠였다. 처음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작은 호감정도였는데 나에 비해 안정된 그에게 끌렸던 것 같다. 나는 대학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지 얼마 안된 사회초년생이었고 그는 탄탄한 공기업에 다니는, 새벽에는 어학공부를 하고 퇴근 후에는 취미생활로 음악을 하는 자기관리에 능한 사람이었다. 처음 내가 뮤지컬이나 연극을 접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주말에 데이트로 이따금 공연도 보고 예쁜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비슷한건 아니였지만 그의 굵으면서 신뢰감가는 목소리가 좋았고 이 사람이라면 내가 오래도록 존경하는 마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내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고 이별을 통보해왔다. 사랑의 감정이 많이 커진 상태는 아니라 오랫동안 아파하며 힘들어 하진 않았지만 시작도 끝도 일방적인 그가 많이 얄미웠다.

이별 후에도 한 공동체에서 오며 가며 마주쳤는데 내 생일 즈음에 책 한 권을 슬쩍 내밀었다. 제목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헬로 OOO"이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내 또래 여자의 이야기였고 쉽게 읽히는 책이였다. 그 때 당시 책을 읽고 '왜 나한테 이런 책을 선물로 줬지? 내가 수준 높은 책은 이해 못할 것 같아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가 내 지적수준을 비웃기라도 하는 기분나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이후로 소설을 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몇 일 전 '권지예의 10년만의 신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왠지 모르게 베로니카의 눈물의 표지에 매료되었다. 소설을 멀리했던 내가 소설에 대해 흥미가 생긴 건 엄마들의 성장카페라는 온라인카페의 영향이 크다. 그 카페에는 다양한 스터디들이 있는데 '소설쓰기'스터디도 있었다. 나는 도전은 감히 못하였지만 다른 분들의 소설을 쓰는 과정을 엿보면서 다양한 글쓰기의 한 분야인 '소설'분야가 흥미로우면서도 어렵게 다가왔다.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소설에 대해 갖고 있었던 나의 편견이 자연스레 사라지고 소설가들을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읽게 된 권지예작가의 소설도 감탄을 하며 소설의 매력을 느끼며 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과 느낌이 달라진 것도 영향이 있겠지만 저자의 필력에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이국적인 경험을 간접경험하며 즐기는 것도 참 좋았다.


 

 

 

 

 


이 책은 위의 사진처럼 6가지 단편소설로 되어있다.


 

 

베로니카의 눈물


 

글을 쓰는 주인공 '모니카'가 편안한 한국 생활을 뒤로하고 홀로 쿠바 아바나의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가스도 온수물도 편히 쓸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아파트 관리인을 의지하며 겪는 일상을 쓴 글이다.

저자의 글을 읽기 전에는 드라마로 '쿠바'를 접해 매력적인 나라, 한번쯤 여행해 보고 싶은 나라라고만 생각했는데 공산주의 체제하의 쿠바는 현지인들이 살기엔, 외국인도 현지인의 생활권안에 들어와 살기엔 매우 불편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이 글을 언제 썼는지 정확히는 몰라 쿠바의 현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지만 소설 속의 쿠바는 집도 부족하고(보통 세번은 이혼한다니 가족 구성원도 복잡함, 전남편과 애인이 한 집에 사는 경우도 있음) 부식과 생필품도 부족하다고 한다.



 

호텔 정문이 가까워지면 늘 보는 풍경이지만, 호텔 건물의 그늘을 따라 사람들이 개미처럼 일렬로 벽에 딱 들러붙어 있다. 모두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데, 호텔 1층 로비나 테라스 카페의 와이파이를 받아 밖에서 인터넷을 하려는 현지인들이다. 호텔에서 음료를 시켜 먹으며 시원하게 인터넷을 하는 외국인 여행자들과, 그 아래 노상에서 햇빛을 피해 그늘이 드리워진 호텔 벽에 바짝 들러붙어 찌꺼기 와이파이로 동냥 인터넷을 하는 현지인들. 빛과 그늘이 의존하는 이 나라의 상징적인 이 풍경은 한 장의 작품 사진처럼 내 뇌리에 박혔다. 현지인들은 호텔에 드나들 수 없다고 한다. 예전엔 무조건 못 들어왔다는데, 돈 많은 객실 손님인 경우 이 사람들 1년치 월급일 테니 불가능하겠지. 프레지덴테는 4성급이긴 하지만, 호텔 카페로 들어서며 외국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P50-51


위의 문장을 보며 IT강국에 살아 어디든 무료 와이파이를 누릴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참 편하게 사는구나 새삼 느꼈다.



그녀는 나이가 73세 이고 이제는 늙어서 일이 힘들다고, 내가 마지막 투숙객이라며 내가 한국으로 떠나면 자기도 일을 그만둘 거라고 했다. 내년부터 맘껏 여행이나 다니라고 하니 표정이 뜨악하다. 돈이 어디 있어서, 그런 표정. 자기는 정말 평생 일만 해서 쿠바 국내 여행도 한번 못했다고, 트리니다드도 산티아고 데 쿠바도 가본 적 없다고, 맏아들이 일하는 멋진 휴양지인 까요 고꼬의 호텔에도 가본적 없다고, 평생 트리니다드엔 꼭 가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고. 그런데 자기는 안다고,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그 말에 가슴이 아팠다. (중략) 나는 베로니카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떠나기 전에 깜짝 선물을 할까?P57

베로니카에게 300그램 정도의 커피를 나눠주니 환호작약했다.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도 커피를 진하게 만들어 마시며 커피향에 연신 코를 흠흠거렸다. 세라노 커피는 가장 좋은 커피지만 쿠바 인민들은 비싸서 못 사먹으며, '올라'라는 커피와 '쿠바비타'라는 커피가 주로 배급된다고 했다. 아들에게 세라노 커피를 갖다 주면 정말 기뻐할거야. 그녀가 나를 껴았았다. 모니카,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 아니 사랑스런 내 딸이야.P64

당신은 아주 훌륭한 뺄루께라(미용사). 덕분에 내가 아주 젊어졌어. 나는 한국의 우리 엄마를 무지 사랑해. 그녀는 암 환자라서 건강이 좋진 않아. 나도 당신 자식들처럼 내 엄마를 도와주거든. 당신은 또 쿠바의 내 엄마잖아. 이해해? 그렇게 말하는데 목이 메었다. 베로니카가 나를 껴안았따. 베로니카와 나는 껴안고 서로 "꽁쁘렌도!(이해해!)"라며 동시에 말한다. 이해한다는 건,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 마음은 뭐랄까, 따스하게 통하는 공기 같은 것? 미 아모르! 미 이하! 그라시아스!(내 사랑! 내 딸! 고마워!) 베로니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피델이 죽었을 때도 내게는 보이지 않던 눈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은 안 했지만, 프레지덴테 호텔의 국영 여행사 창구에서 트리니다드 여행 상품을 상담했었다. 깜짝 선물로 베로니카에게 여행을 꼭 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p74



처음 모니카와 베로니카가 대면했을때만해도 모니카는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베로니카가 일주일에 단 한번만 와서 가사를 도와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베로니카를 의지하게 되고 그녀를 진정으로 좋아하게 된다. 내가 세상의 떼가 묻었는지 베로니카에게 여행자금까지 대주려하는 모니카를 보며 '저러다가 혹시 베로니카가 사기꾼이면 어쩌지?'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모니카, 중요한 일이라고 너무 집착하고 애쓰지 마. 그런 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아. 그럴수록 그 중요한 일이 너를 괴롭히는 거야. 인생은 그저 흐르는 거야. 그냥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실어. 춤출 때처럼. 우린 그래서 모두 춤을 잘 추지. 여긴 쿠바야!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 그냥 파도에, 리듬에, 인생의 시간에 몸을 실어.

베로니카의 눈물P76-77

 


 

 

 

글을 쓰러 먼 '쿠바'까지 왔지만 작업은 커녕 부식과 생필품을 구하느라 지쳐 아깝게 보낸 시간들을 한탄하며 불평하는 모니카에게 베로니카는 인생이 그냥 흐르도록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조언한다. 고등교육까지 받았지만 70세가 넘도록 힘들게 노동하며 자기 이름으로 된 변변한 집 한채 없는 그녀가 하는 조언. , 우리들은 그녀보다 가진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힘들게 자신을 내몰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베로니카에게 말을 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냥 잊어버리자. 소매치기나 삐끼에게 당했다고 치자. 며칠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베로니카가 일주일째 연락 없이 오지 않자 화가 났다. 마지막으로 왔다 갔던 날, 양파와 달걀을 구해주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장에 가더라도 양파를 사지 않았다. 달걀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시중에 돌지 않는 건지, 자기 배급 달걀도 떨어진 건지, 베로니카도 달걀을 구하지 못했던 터였다. 다시 나는 부식을 구하러 다녀야 할 판이었다. 달걀, 휴지, 커피를 다 각각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한다. 어느 거리엔 있고 어느 가게엔 없으니.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고, 돈이면 다 되는 나라에서 온 나는 여태 착각하고 살았나. 내가 가진 돈. 내 손에 든 물건. 당연히 내 손에 들어올 물건. 게다가 믿었던 사람도 다 내 것, 내 사람이라는 이 공고했던 믿음. 이것이 흔들리다니! 그 공포와 소유에 대한 의심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온 내게는 낯선 충격이었다. 다시 우울했다.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심장을 지난 나는 밤에 집 안의 불을 끄고, 남들은 모르게 발코니에 앉아서 럼과 트리나다드에서 샀던 코히바 시가로 내 심장을 마취시켰다.P79-80



어느 날 심심해서 확인해본 남아있는 현금. 그런데 현금 중 300쿡이 보이질 않았다. 내 의심이 적중하는 걸까싶었다. 제발 베로니카는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쿠바의 엄마라는 지칭이 거둬들여지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어 의사도 비번인 날에 수리 기사로 투잡을 뛰어야 하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문제 있는 세탁기를 빨리 고쳐 주지 않아서 나를 고생시킨 게, 고작 자기 조카에게 돈 몇 푼 쥐여주기 위한 심산이었다니. 오랫동안 오지 않았던 그녀를 기다리다 못해 할 수 없이 밀린 빨래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세탁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부엌 발코니 하수구로 물이 안 빠져서 수건과 걸레로 종일 물을 짜냈던 날도 있었다. 그 후로 그녀가 무단으로 오지 않은 그 시기에는 내가 계속 손빨래를 해야만 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사라진 300쿡의 행방은 덮어두고서라도, 내가 임대료, 아니 내가 준 팁만 해도 거의 1년 치 월급은 될 텐데. 햄이니 달걀이니 양파니 알고 보니 무상배급을 받은 물건을 내가 모른 척하고 몇 배나 값을 쳐줬던가. 그동안의 내 선의는? 내가 순수한 이타심이니, 행복한 감정이니 했던 건 무엇이었나. 그런 나이브한 내가 더 역겨웠다. 선과 위선. 그렇게 베로니카에 대한 내 복잡한 감정은 나를 괴롭혔다.P83-84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 저자의 필력에 감탄했다. 나라도 저런 상황에선 합리적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젠 슬픈 마음으로 바라만 보네.

사라져가는 사랑과 찢겨진 우리의 영혼


 

한국으로 떠나기 마지막 쿠바 엄마와의 만찬을 즐기고 쿠바 엄마, 베로니카의 표정을 보고 떠올린 오마라의 노래 가사. 괜히 감정이입이 되어 내 마음도 헛헛해졌다.


 

그 도시의 얼굴은 야누스의 얼굴이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순수와 오염, 자유와 고독, 혼돈과 모순, 환상과 환멸, 매혹과 잔혹, 그 시간을 통과해낸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베로니카의 눈물을, 그 눈물의 의미를 떠올리기 싫은 마음도 있었는지 모른다.P107

 

 

그녀가 마지막까지도 쿠바의 베로니카를 오해했다면......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해변에 나가 바다만 바라보며 지냈어요. 과연 내가 보았던 세상 그 어떤 바다의 물빛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물빛이었어요. 거대한 아쿠아마린이었어요. 주인에게 전해지지 못한 묵주 팔찌의 빛나는 아쿠아마린을, 두 사람이 그랬듯 나도 햇빛에 비춰보았아요. 갑자기 점화되듯 코끝이 찡해졌어요. 그러곤 눈물이 툭 터져 나왔어요. 나중엔 걷잡을 수 없이 통곡이 계속 터져나왔어요. 노을이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바다의 파도처럼 몰아치는 내 몸의 슬픔을 다 짜내듯이요. 당신이 죽고 1년이나 되었는데 처음으로 터진 통곡이었어요. 파라다이스 빔이라고요? 내게 그 말을 가르쳐준 건 당신이었어요. 마시란 해변의 낙조를 바라보며 형이 묻곤 했잖아요. 좋아? , 좋아! 내가 대답했고, 얼마만큼? 천국처럼? 형이 또 물었죠. 내가 금방 대답을 못하면 당신이 말했죠. 생에서 만나는 이런 빛나는 순간을 파라다이스 빔 이라고 한대, 수현아.P182



 

'파라다이스 빔'이 뭘까 궁금했다.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에서 남편을 평생 사랑한 여자가 남편이 남긴 한 상자를 가지고 그 상자에 쓰여진 주소를 추적하기 위해 남편이 죽기 3년 전 여행했던 장소인 '쿠바'에 찾아가며 이야기가 고조된다.

 


그 말이 갑자기 끔찍했어요. 살아서도 천국을 순간순간 느낄 수 있었던 그 신비했던 마법의 언어가 쿠바의 어린 창녀로부터 당신을 통해 나에게까지 옮겨온 성병처럼 역겨워지기까지 했어요. 강민수! 도대체 너는 누구고 나는 무엇인지! 타인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당신은 나의 평화와 자유를 파괴했어요. 당신의 인생은 명분이 있어 정의로웠는지 모르나 난 도대체 무엇인지, 누구인지! 나는 묵묵히 생활을 위해, 당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아온, 그저 당신 인생과 생활의 희생자이자 피해자! 분노와 질투를 연료 삼아 이틀을 꼬박 내 몸에 갇혔던 눈물을 다 태워 날렸어요. 슬픔은 가슴에 응어리를 지게 하지만 분노는 슬픔을 태워버리더군요. 민수 형, 놀랐나요? 내가 이토록 속물이어서.........?P183

 


'생에서 만나는 빛나는 순간'이라는 뜻의 파라다이스 빔이 바람핀 남편에게서, 아니 남편과 만났던 창녀에게서 나온 말이라니..... 얼마나 치욕스럽고 배신감에 당혹스러웠을까 싶다.

3가지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난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저자가 묘사하는 이국적인 공간에도 궁금증이 일었고 사소하지 않은 사건을 담아내는 것도 책에 몰입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였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며칠 전, S에게 문자를 보낸 것은 자신의 그런 속물성을 자르고 최초의 결심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다. L이 전에 라디오 방송을 맡았을 때 구성작가 S를 성추행한 전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S는 서연도 알고 있는 작가다. 보름 전에 그녀를 만나 소주 한잔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서연은 자신의 심경을 애둘러 표현했다. 대화는 약간 겉돌았지만 심증으로 그녀도 동변상력이라는 느낌이 왔다. 올랜도에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녀와 둘이 뜻을 함께하면 덜 외로울 거 같았다. 하지만 서연이 S에게 보냈던 문자가 어제 페이스북에서 떠돌고 있었다. '개나 소나! 너도 나도! 미친거 아니에요? 상상력이 너무 뛰어난 건지 뭔지. 사람을 뭐로 보고. 물귀신 작전도 아니고'라는 제목 밑에는 캡처된 서연의 문자 이미지가 딸려 있었다. "S선배. 우리가 함께 공유한 L의 추악한 실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진실을 향해 용기를 가지고 한 발자국씩 내딛기를...... 우리 손잡고 함께 연대해요." 서연은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비열하고 잔인했지만, 그나마 보여준 마지막 친절이라면 서연의 이름을 지운 거라고나 할까. 게다가 실명이 아닌 L이라는 이니셜만 보고 사람들이 그를 떠올릴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서연은 치를 떨었다. L보다 S가 더 미웠다.P219



 

한참 이 사회를 떠들석하게 했던 미투운동. 난 피해자인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정말 용기있는,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란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일에 관심이 없어 시간이 지나면 기억조차 못한다지만 당사자는 세상에 자신이 성폭력 혹은 성희롱 가해자라는 것을 당당하게 말하고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 본다. 현재도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그 여성이 속한 공동체에서 그녀를 향한 말없이 보이는 시선들, 상대에게 이해나 공감을 바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고백을 듣고 터져나올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수많은 반응들.

위의 이야기처럼 나의 아픔을 이용해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가해자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쓰는 행동들. 참으로 안타깝다. 아무리 사회가 변하고 있고 여성의 권위와 인격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여성은 너무나도 약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피해 사실을 밝히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여성. 그들을 위한 여러가지 지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선 우리 모두의 인식이 바뀌어서 세상의 곳곳에서 아직도 파렴치한 일을 일삼는, 사람같지 않은 인간들이 얼굴들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것이 어려운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소설로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 내가 살지 않는 곳을 이해하고 경험한다는 것. 참 매력적인 일인 것 같다.

나는 당장에 비행기표를 끊어 여행을 떠나고 싶다

는 생각을 하는 하정우씨처럼 그리 생각지도 못하지만(내 모든 상황때문에) 잠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오랜 소설금기(?)를 끊고 좋은 소설책을 보아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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