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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한 지음 / 미지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센델의 책을 읽고 나면 정의란 뭔가 멋지구리하고 바르고 거대한 무엇이다라는 경외감이 든다. 동시에 각 케이스에 따른 결론을 내가 생각하는 어떠한 문제에 적용해보려면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의문도 든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를 읽어보면 사실 이 모호함은 독자의 무지가 아니라 센댈이 불친절 또는 신비주의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센댈의 정의는 블랙박스 같다. 엔지니어링과 과학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인풋이 있으면 의미있는 아웃풋을 내지만 그 안에서 정확히 무엇이 일어나는 지는 알 수 없는 알고리듬을 일컷는다.
사회와 정치에서 마주치는 여러 쟁점들을 파악하고 좀 더 정의에 가까운 결론을 내거나 판단하고자 할때 블랙 박스는 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주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한이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한데, 정의의 블랙박스가 센댈이 말한 공동체라는 인격 (결국 권력 또는 엘리트 집단일 확률이 높다)에게 주어졌을때는 심지어 자의적이고 위험해질 수 있고 특히 게임과 야동이 정부에 의해서 금기시되는 현재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의에 관한 논의는 종교보다는 외과 수술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판단과 행동이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누구는 상처 받기도 하고 누구는 이익을 얻기도 한다. 어떤 종교 지도자가 내 배를 몇일 동안 만지고 정말로 그 것 때문에 내 배 안의 암이 씻은 듯이 나았다 하더라도 내가 그 종교 지도자를 존경하고 신뢰할 수는 있어도 그 믿음의 치료법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다. 내 자신은 어떻게 그렇게 된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투명하고 명료한 어떻게가 (또는 논증이) 없으면 최소한 나는 그걸 쓸 수가 없다.
번역된 책을 자주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저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읽으면 얼마나 쉽고 즐거울까라는 점인데,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를 읽으면서 한국어가 나의 모국어인 것이 즐겁게 느껴졌다. (나에게 그러한 경험은 드물다.) 이 책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이한의 어깨 너머에 조용한 거인이 둘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센댈은 이 두 사람을 비판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는데 이한은 그 둘 대신 가볍게 이 비판을 받아 쳐내고 그 비판이 심지어는 오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