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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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그런 두뇌의 명석함만으로 일할 수 있는 햇수는 기껏해야 십년 정도입니다. 그 기한을 넘어서면 두뇌의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로 전환하는게 요구됩니다.

자,그런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분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 한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겨보는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이렇게 지난날을 돌아보니 `도무지 진득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내 인생의 라이프 모티브였던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쓸 때 `문장을 쓴다`기보다 오히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에 가까운 감각이 있습니다. ...중략... 그것은 요컨대 머리로 문장을 쓴다기보다 오히려 체감으로 문장을 쓴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건 내가 서른살을 앞두고 느꼈던 마음의 `공동`같은 것을 멋지게 채워주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그 개략은 처음부터 상당히 확실했습니다. ...중략...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니다.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생각해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사크 디네센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

세상에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독자가 내 작품에서 온천의 깊은 따끈함 같은 것을 맨살의 느낌으로 조금이나마 감지해준다면 그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나 역시 줄곧 그런 `실감`을 추구하며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음악을 들어왔으니까.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실감`을 믿기로 합십시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그런 건 관계없습니다. 글을 쓰는 자로서도 또한 그걸 읽는 자로서도 `실감`보다 더 기분 좋은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혼돈이란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나 존재합니다. 내 안에도 있고 당신 안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생활에서 일일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외부를 향해 드러내야 할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이것봐, 내가 떠안은 혼돈이 이렇게나 크다니까˝하고 남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것은 아니다,라는 얘기입니다. 자신의 내적인 혼돈을 마주하고싶다면 입 꾹 다물고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혼자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만 할 혼돈은,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돈 혼돈은,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발밑에 깊숙이 잠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언어화하기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중략...아울러 그러한 자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위해 필요한 것은 신체력입니다.

일단은 만전을 기하며 살아갈 것.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소설이 삼인칭이 되고 등장인물윽 수가 불어나고 그들이 각각 이름을 얻는 것에 의해 이야기의 가능성은 뭉클뭉클 커졌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소설을 창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에 의해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땅속에서, 일상생활이라는 단단한 표층을 뚫고 들어간 곳에서, `소설적으로`이어져 있습니다. ...중략...나는 그런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즐겁게 읽어주기를, 뭔가 느껴주기를 희망하면서 매일매일 소설을 씁니다.

참고로 내 경우의 `푸닥거리`는 달리기입니다. 그럭저럭 벌써 삼십여 년을 계속 달렸지만, 소설을 쓰면서 내게 엉겨 붙어 따라오는 `음의기척`을 나는 날마다 밖에 나가 달리는 것으로 떨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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