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러리
사라 스트리스베리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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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었다. 한국문학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실존했던 어떤 여성을 허구를 통해 서술해 보려는 시도들. 북유럽 작가가 미국의 한 여성을 어떻게 상상하고 서술하는지 궁금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말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읽는 동안 계속 고통스러웠다.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폭력들 속에서 밸러리라는 여성의 삶을 상상해보려는 이 글은 상당히 파편화되어 있고 난삽하다. 하지만 애초에 한 사람을 혹은 하나의 삶을, 하나의 세계를 물 흐르듯 묘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보아온 수많은 한국문학 속 여성들의 언어처럼 밸러리 또한 기존의 근대적인 남성 문법과 언어로는 세울 수 없는 존재이니까.



그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유년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밸러리는 끝까지 솔레너스라는 성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 여성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성이라는 목줄을 차게 되는데, 그 목줄을 영원히 아버지의 손에 맡길지 그 목줄을 채가서 자신의 손으로 움켜쥐고 살아갈지 선택하게 된다. 목줄을 끊어버리는 그런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일보다 스스로 움켜쥐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에 어떤 점에서 밸러리의 선택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타자들만을 사랑했던 밸러리. 앤디 워홀을 쏘아버리고 국가에 의해 광기와 질병으로 규정되었던 많은 여성들 중에서 가장 논쟁적인 이름을 떨칠 수 있게 된 밸러리. 폭력 속에서 밸러리가 자신과 같거나 다른 타자들을 사랑하는 대목들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정의로웠다. 밸러리는 정의를 미워했고 거부했는데 이상하게도 밸러리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정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밸러리는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한때는 배움과 노력으로 그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고 꿈을 키웠다. 그 점이 가장 서글프다.​




마음과 영혼과 머리는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대목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그 믿음은 너무나 약하지만 가장 강했다.



이 소설은 허구일 뿐이고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여성을 써내려가는 일은 다른 무엇도 아닌 허구의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가능한 복원, 한 여성에게 닿으려는 어떤 복원이기도 하다고 믿으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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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 - 죽어가는 행성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살기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 달과나무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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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는 환경과 여성 , 지구와 비인간을 사랑하며 사유하는 에코페미니스트들의 단상들과 실천을 엮은 책이다. 화성을 '정복'하겠다며 지구를 파괴해가며 우주선을 쏘아대는 낡은 서구근대주의자들에게 맞서는 최전선에 제3세계 소녀 툰베리가 서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이라는 극동아시아의 여성들이 지구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역시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는 기후위기시대를 에코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사유하고, 소박한 땅의 힘을 느끼며 사는 삶과 여성 몸을 둘러싼 시간과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아가 비인간과의 상호얽힘을 조망한다. 위기, 땅, 몸, 얽힘, 모두 공부하면서 보았던 중요한 주제어들이라 친숙했다. 그 친숙한 이론들과 주제들을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것도 꽤 괜찮았다.
가끔은 이론이라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아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듯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론과 사유를 실천으로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보고 배워야지, 하기도 했고. 가끔은 이론서들로부터 눈을 돌려 실천적인 목소리들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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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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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현재의 두려움을 품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최근 공포 콘텐츠의 단골 소재였던 좀비가 나타나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는 2020년, 우리는 먼 미래의 재난으로 상상하던 괴물들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미래의 길목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파괴된 환경과 일상에 자리 잡은 디지털 폭력이라는 인재(人災)는 펜데믹과 이상기후, 그리고 우울과 자살, 범죄의 형태로 우리에게 무너진 환경과 무너진 인간성이 먼 미래가 아님을 일깨운다.

그런 의미에서 『스노볼』은 환경과 인간성이 무너진 미래가 정말로 도래해버린 후의 세계에 대한 명랑하고도 창백한 상상적 성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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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은 재난에 가까운 기후변화로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트루먼쇼처럼 문명의 삶을 리얼리티 쇼로 연기하는 연기자와, 그 삶을 연출하는 감독, 소비하는 노동자로 위계화된 세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기이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연기자들의 자각된 트루먼쇼의 공간은 유일하게 얼어붙지 않은 땅인 '스노볼'이다. 원래 스노볼은 눈 덮인 작은 세계를 감싼 구체 장식물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반대로 추위가 없는 세계를 품은 반구 형태의 도시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반전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역설적으로 상기시킨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연기자로 뽑히거나 특수한 전문직이 되지 못하면 스노볼에서 살아가는 연기자의 삶을 관람하고 그들을 통해 잃어버린 물질문명의 삶을 대리 경험하는 시청자가 되며, 그 방송을 시청하기 위한 전기를 생산하는 자전거의 생체 동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주인공인 전초밤 역시 그런 노동자이며, 스노볼에서 태어나 가장 인기 있는 연기자로 평생을 살아온 동갑내기 연기자이자 초밤과 너무나 닮은 외모의 고해리의 삶을 대리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초밤의 꿈은 연기자가 아닌 감독이 되는 것이다. 평생 동경해온 고해리의 삶을 연출할 수 있는 그런 디렉터. 그러나 초밤에게 먼저 주어진 기회는 디렉터가 아닌 연기자, 그것도 연기자를 연기하는 일이다. 방송을 하지 못할 상황에 놓인 고해리를 대신하여 스노볼에서 모두를 속여 달라는 이상한 제안. 그렇게 초밤은 누구도 할 수 없는 독특한 방송을 만드는 대체 불가능한 디렉터가 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삶을 잠시 경험하게 된다.

과연 해리와 초밤을 둘러싼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초밤이 동경해온 디렉터 차설과 이 미래 세계의 사회의 정점이자 예외로 존재하는 기업 이본의 비밀은 무엇인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스노볼』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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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의 추위와 사적인 일상이 소멸되고 모든 인간이 도구화되어버린 세계는 상황 자체는 달라도 낯설지는 않다.

안온한 삶이 거의 불가능한 세계에서 기계적으로 일하다가 자기 몫을 해내지 못하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곳. 사생활을 걸고 물질적 풍요를 거래하는 연예인이나 명사들의 삶을 방송과 인터넷으로 접하면서 관음 하듯 소비하고 그들이 광고하는 비싼 물건들을 한 번씩 주문해서 소비하는 대리만족과 모방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삶. 모두가 감시당하고 일상이 노출된 채 사생활과 인권을 잃어버리는 삶. 그런 방송을 좌지우지하는 디렉터가 스노볼의 삶을 통제하고 연기자들의 인권마저 틀어쥐고 있고 그 배후에 있는 혈통으로 경영권이 상속되는 대기업 이본의 무한한 권력까지.

『스노볼』이 그린 미래 세계가 야기하는 가장 큰 공포는 지금 우리 삶을 극단적으로 보면 소설 속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살을 에는 추위와 거대한 트루먼쇼는 그 잔인함의 문학적 형상화일 뿐이다.

그런 곳에서 초밤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꿈을 꾸고 있다. 보여지는 삶과 기계적인 삶, 그리고 연출하는 삶. 초밤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기 때문에 보여지는 삶도 기계적인 삶도 아닌 연출하는 삶을 꿈꾼다. 디렉터가 되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한다.

자기만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 단 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그러나 그런 삶은 과연 가능할까? 잔인한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고 타인을 믿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스노볼』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해보기를 추천한다.



** 약간의 아쉬움 :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이 있다. 거울과 그 거울을 통해 초밤이 목격한 것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내용만이 드러나 있는데, 목격된 것의 비중을 생각하면 보다 구체화된 설정이 서술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떤 의미에서 열려있다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작품의 성격상 더 드러났어야 하는 설정들이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암시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점이 다소 아쉽다. 스포일러를 제외한 서평을 작성하고자 하였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기회가 되면 쓸 수 있기를.


*** 본 서평은 『스노볼』 사전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창비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네이버 블로그에 동일한 글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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