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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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질서라는 외형만 갖추었다면 어떤 체계나 대칭도 - 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 - 인류를 매료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틀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목을 보고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다. 알고 보면 우크바르는 브래트니커 백과사전의 한 복제판에 이상하게 삽입되어 있는 허구의 지명이름이고 틀뢴은 우크바르의 문학 중에 서사시에 나오는 행성의 이름이다. 이 행성에 관한 백과사전의 이름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다.

 ‘틀뢴~’은 보르헤스의 소설집<픽션들>에 나오는 첫단편이다. 추리소설의 형식에 행성 규모의 방대한 지식체계를 담고 있어 미궁을 헤매고 나서도 많은 숙제를 남긴다. 작가가 서문에 써 놓은대로 방대한 양의 가상의 책을 요약 논평하는 것과 이 책이 만들어진 비밀과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병행하는 구조다. 비밀만 보면 장미십자회의 아류인 것 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행성의 문명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의심해야 한다.


 첫 문장은 우크바르를 발견한 동기가 거울과 백과사전을 연관시킨 덕분이라고 시작한다. 친구와 일인칭 시점 소설에 대해 토론하다가 복도 끝에 있는 거울을 인식하게 되고 친구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다’라는 표현을 백과사전에서 봤다고 하고 그 백과사전을 찾아 나서는데 백과사전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리고 화자의 아버지 친구인  애시의 책에서 발견된 편지에서 비밀이 드러난다. 17세기 어떤  비밀결사에 의해서 하나의 국가로 고안되어 만들려 한 것이 후대에서 행성 규모로 백과사전을 만들게 된다. 그후 틀뢴에 관한 백과사전과 유물이 모종의 계획으로  ‘발견’되어져 틀뢴은 세상에 알려진다. 나치즘에도 열광했던 세상은 더욱 정교한 체계와 대칭을 갖춘 틀뢴에 열광한다. 세상은 틀뢴의 세계관으로 채워지고 더 많은 틀뢴의 세계가 생성되고 풍성해진다.  그리고 앞으로 백년 후에서는 틀뢴 제2 백과사전이 나올 것이며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라 예언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개의치 않고 옛책을 옛문체로 번역해 놓고 출판할 생각도 없이 원고를 손보고 있다.


 접속사는 거의 없는 간결한 문장인데도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 난다.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규모와 고대와 현대를 왔다갔다하는 다양한 인물의 등장, 넓게 언급되는  철학과 문학, 환상적인 시간과 공간, 서양 사회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곳인 이슬람과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는 우선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간결한 문장 중에는 다음과 같은 화려함도 있다.

 

 ‘ 밤 중의 밤’이라는 이슬람의 어느 날 밤에 천국의 비밀의 문들이 활짝 열리고, 항아리에 담긴 물은 평상시의 밤보다 더욱 달콤해진다. 하지만 그런 천국의 문이 열렸다 할지라도 내가 그날 저녁에 느꼈던 그런 황홀함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자가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발견했을 때를 표현한 문장이다. 저자의 주에 의하면 밤중의 밤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천국이 내려왔다고 하는 성스러운 밤,  라마단의 마지막 밤이다. 내게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떠오르며 더욱 신비하고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어떤 지식들은 그 사람의 세계와 감성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음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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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고 나면 책 표지를 보지 않더라도 <그림 그리는 손>이 생각난다. 그림을 그리는 손을 따라가면 또 다른 손이 그 손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 안에 있으면 이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미로에 갖힌 듯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손이 서로 그리고 있는 그림이란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우크바르로 만들려한 것이 틀뢴이 되고 사본이 나올 때마다 어떤 것은 지워지거나 희미해지고 또 덧 붙혀진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그 엄밀함 때문에 인간의 모습은 잊혀지고 틀뢴의 세계만 계속하여 풍성해진다. 실존하는 인물과 작품이 허구와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허구와 실재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그러다 머리가 무거워질 때 고개를 들고 다시 보면, 그림 그리는 손 자체가 그림인 것 처럼 이 세계는 보르헤스가 만든 픽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백과사전의 제작은 계몽주의 시절의 백과사전학파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백과사전학파는 ‘올바른’ 지식을 대중이 알게 된다면 세상은 합리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열망을 가졌지만 틀뢴의 제작자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했는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우크바르에서 틀뢴이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중 인물 버클리는 ‘필멸의 인간들도 우주를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백과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작가는 단지 백과사전 11권 만을 요약하여 틀뢴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틀륀의 세계는 로크-버클리-흄-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철학과 비유클리드 기하,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영역을 볼 수 있다. 관념론이 지배하고 따라서 심리학이 가장 기본 학문이다.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범신론이 주류가 된다. 언어에서는 명사보다 형용사가 우선이 되며 사본은 계속 만들어지며 차이를 갖는다. 

 19~ 20C전반에는 절대적 진리가 무너지고 심리학이 대두되었고, 유클리드 공간이 유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임을 알게 되고, 지식은 확실성과 객관성이 의심되었다.  더불어 제국주의, 공산주의 혁명, 나치즘이 광풍처럼 지나갔다. 이런 시대를 인간이 만든 하나의 미로체계라는 것을 더 정밀한 체계인 틀뢴으로 구성하여 보여 준다.  우리는 여러 개의 틀뢴을 알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같은 종교적 틀뢴과 절대왕정과 전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같은 정치 경제적 틀뢴이 그것이다. 유발할라리는 종교와 이념을  많은 사람이 믿는 가짜뉴스라고 했는데 <그림 그리는 손> 처럼 자기 증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표현하려면 틀뢴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기독교의 세계는 전형적인 틀뢴이다. 여러 곳에서 발견된 고문서와 구전되는 이야기와 유물의 적절한 편집으로 기독교의 세계가 나타나고 철학, 문학, 예술, 정치 등의 영역으로 더욱 풍성해진다. 인간은 두루마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구전은 계시가 되고 권위를 가진 성서와 장엄한 성당 그리고 신이 주관하는 우주가 인간을 둘러싼다.  


 틀뢴의 세계에서 본 흥미있는 부분은 사물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표현하는 것이다. 명사는 사물의 관념을 낳는데 형용사는 사물의 속성이다. 형용사가 추가될수록 사물의 속성은 확장된다. 그러나 형용사 역시 언어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에 끝없이 가까워질 수 있지만 닿을 수 없다. 다음은 사본의 개념이다. 사본은 계속 만들어지고 창조된다. 틀뢴 자체가 사본이며 창조물이다. 현실이며 또 허구다. 기원은 아예 없거나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형용사 부분은 라캉, 반복과 기원은 들뢰즈와 데리다, 틀뢴은 푸코에서 그 비슷한 개념을 본 것 같은데, 이 책의 서문이 1941년 이고 그들은 1968년 이후에 주로 활동했으니 그들이 보르헤스를 자주 언급한데는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보르헤스는 대담에서 자신이 불가지론자라고 말한다.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허구 속에서 구축된 틀뢴일 뿐이라고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계는 허구로 구축된 틀뢴일 수밖에 없으므로 더 미적 완성도가 있는 허구에 빠져드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일까? 

 푸코는 시대의 어항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우리는 각 시대의 어항에 갇혀있어 늘 그 시대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말이다. 인간이 만든 허구인 틀뢴에 갇히는 것이나, 그 시대의 인식의 한계로 세상을 이해하는 어항이나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나 회의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이 소설에서도 종교와 나치즘 등을 정교하게 만들어진 틀뢴이 붕괴시켰다고 한다. 인간이 지나 온 역사는 여러가지 틀뢴을 깨뜨리는 역사였다. 설사 그 결과로 또 다른 틀뢴을 만나거나 또 다른 반복의 이야기라 해도, 그것은 시대를 극복해 온 결과물이다. 불가지론으로 우리는 세계에 대해 어차피 알 수 없으므로 허무에 머무를 수도 있지만, 인류는 혁명적 지식을 만들고 영역을 넓혔으며 허무를 극복해 내었왔다. 그리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 더욱 관용적이 되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양자역학이 측정하는 정밀도는 엄청나다. 그냥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좀 더 과학적인 확실성으로 다가가고 있고 실제로 그 만큼 인간의 삶을 개선했다. 적어도 현대의 인간의 다수는 신분과 종교,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않다. 

  보르헤스는 관념의 세계나 범신론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 세계를 좋아하는 이유는 꿈, 상상력, 아름다움에서 더 풍부한 세계이기 때문일 것 같다. 나는 유물론자이지만 판타지를 좋아한다. 낮의 세상은 더 건조해 지기를 원한다. 맑은 바람이 머리 속으로 불어오는 것같은 세계를 원한다. 밤에는 더 재미있는 상상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다양한 틀뢴에서 살아가며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며,  닿지 않는 세계를 꿈꾸거나 잠들 수 없어서 거리를 헤맬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2.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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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픽션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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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푸네스


 윤도현 닮은 사내가 어린애와 길에서 놀고 있었다. 버스같은 큰 차.  내리막이었고 내가 운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운전석에 있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발을 뻗어 브레이크를 찾았다. 문득 초록 빛. 인동초 넝쿨과 애기 사과나무. 어디지? 무중력 의자. 악보대 위에 올려진 태블릿. 내가 잠들었나 보다.  보르헤스의 < 모든 것을 기억하는 푸네스>를  읽고 있었어.


 화자는 청년시절에 세번 정도 만났던 푸네스를 반세기가 지난 후에 기억한다. 푸네스의 일반적 이야기와 하루밤의 대화를 간접화법으로 써 놓은 형식이다. 푸네스는 우루과이의 시골 농장에 일하는 홀어머니의 아들이다. 푸네스는 시계처럼 정확히 행동하는 소년이었는데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로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의 기억력은 가히 라플라스의 악마 수준이고 학습력은 사전만 가지고 라틴어를 익힐 수 있다. 모든 운동량을 관찰하고  모두 기억한다. 나처럼 마당에 앉아 있다면 구름의 변화와 움직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궤적과 잎사귀들의 섬세한 떨림, 금붕어가 남긴 수면의 파장까지 다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 능력으로 푸네스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이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갖고 있으며 전신마비 상태에서도 온전히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는  모든 것들의 차이를 분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 마땅해 할 정도다. 푸네스는 나중에는 넘치는 기억의 압력으로 잠조차 들지 못하지만  이른 죽음으로 기억에서 해방 된다.

  .

 어쩌면 어떤 지식인은 푸네스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푸네스에겐 신체 마비이다)  하지만 푸네스의 능력은 지식인에게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지식의 특성은 차이를 넘어 보편을 발견하고 분류하는 것이다. 사물을 분석하여 근원을 찾고 모든 운동을 나타내는 하나의 식을 찾는 것이 과학의  꿈이다. 푸네스의 세계에는 보편이란 없다. 겨우 10개의 수의 조합으로 모든 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수마다 다른 이름이 있어야 한다. 한 사물을 겨우 1분이 지나도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비옥한 세계, 곧 바로 느낄수 있는 세세한 것만 존재하는 세계’다. 이글을 쓰고 있는 나는 고유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여 또 다른 ‘나’가 된다. 하여 나는 정의 할 수 없다. 보르헤스의 표현을 빌리면 형용사가 추가 될뿐이다. 지금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푸네스>를 읽은’이 들어갈 것이다.

 

  80대의 보르헤스는 죽음을 구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기억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사라짐이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는 읽었던 책을 반복하여 다시 읽는다. 깊이 숨은 기억이라 할 수 있는 꿈에서 영감을 찾는다. 보르헤스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있는 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어떤 기억은 잊지 않으면 힘들고 어떤 기억은 잊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경사로를 굴러가는 버스 안에 있는 나와 무중력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연결하려면 기억이 있어야 한다. 두 장소에 있던 내가 다른 주체일 수 없는 이유는 브레이크를 찾기 위해 발을 애타게 버둥거렸던 느낌을 내 신체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푸네스는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억은 그리움과도 연결 된다. 그리움은 시간이나 사건만이 아니라,  신체를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정이다.(파우스트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젊은 날의 신체로 되돌아 갔다! )  신체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푸네스처럼 갖힌 자가 된다. 남는 것은 기억과 망각 사이의 어떤 것 뿐이다. 우리는 기억만이 아니라 신체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산에서 산책을 하다 멋져보이는 새길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미 어두웠졌기에 기억하는 나는 가지마라는 경고를 보냈는데도 신체의 활력을 쫓는 나는 그 길을 가고 말았다. 노화로 인해 우리는 신체능력을 점점 잃어가지만 부당하게도 푸네스의 능력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더 많은 망각이 불청객처럼 온다.

 서서히 죽음이 오고 그것이 무언가로 부터 우리를 해방한다면,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기억의 고통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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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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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오래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방이 많은 캄캄한 집에 벽에 붙어 있는 작은 등을 하나씩 켜는 일과 비숫하다. 스위치를  잘 찾을 수 있거나 우연히 손에 걸리면 방을 환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기억은 소환되지만 스위치를 찾지 못한다면 다시 소환될 수 없다.

 내게 있어서 기억은 대부분 흑백 필림 같았다. 꿈 속에서 보는 풍경같이 색을 알 수 없는 배경은 희미한 그런 풍경 같은 것이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그 배경을 화려하게 채색했을 뿐만 아니라 맛과 냄새까지 부활시켰다. 베르그송은 망각이야 말로 기억을 완벽한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기억은 원초 사건 그대로가 아니다. 살아온 과정에 의해서 기억은 왜곡되고 편집되며 오묘하게 덧칠되기도 한다. 푸르스트를 따라 읽다보면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따지면서 읽게 되지만 결국 이런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자각할 때 공간에 대한 지각과 기억의 연결점을 찾게 된다. 프루스트가 잠에서 깬 사건에서 시작하는 것은 나의 현존재는 과거의 기억과 어떤 연결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나의 이름, 가족, 나이, 신체 모두는 과거로 부터 현 존재인 나에게 연결된 것이다. 적어도 어제 밤에 잠들기 전의 ‘나’와 잠에서 깨고 있는 ‘나’와 연결 점을 찾아야만 나는 어떤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적어도 1권-은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 꿈속을 헤메이는 것 처럼 기억을 따라 움직인다. 인과에 따른 줄거리의 전개가 아니라 기억의 연상작용에 따라 흐르는 전개라 처음에는 당혹 스럽다. 줄거리를 따라 읽는다면 처음 일 권의 줄거리는 너무 간단하다. 잠을 자다가 자정에 깨어서 아침이 될 때까지 기억의 흐름이 전부다. 그래서 이 책은 줄거리로 읽어서는 안된다. 이 책은 기억 그 자체의 흐름을 관한 묘사이다. 침대에서 어머니를 저녁 키스를 기다리는 소년으로 넘어가고 마들렌에서 콩브레의 아주머니 집과 그 아주머니의 병에 따른 습관과  콩브레 마을을 연결하고 손님 스완과 사교계, 산책길과 소녀들, 그리고 다시 어머니로 연결하여 침대에서 다시 아침을 맞는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억 자체가 꼭 정확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며 어쩌면 꿈을 헤매는 것과 비숫하기에  이 집의 친가와 외가가 아주머니집에 모여 사는 이상한 가계도 설명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프루스트는 앞 서 말했듯이 기억을 화려한 문장으로 채색했다. 만연체의 문장으로 각종 비유를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아주 구체적으로 살려냈다. 줄거리를 따라 읽으려 할 때 지루하기만 하고 눈에 보이지 않던 문장이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읽게되면 눈에 들어온다. 정적인  묘사와 운동감이 강한 묘사를 구분할 수 있게 되면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화가가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지만 글로 묘사하는 것이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 그것이 화자가 구성한 세계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규정한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문제가 중요했고 일차세계 대전 전의 파리 근처에 살았던 살만한 가문의 소년이 구성한 세계는 성당의 종탑과 산책길과 아가씨가 있는 아름다운 세계였다.


 

 이 책을 읽는데 또 다른 어려움은 화자의 문제다.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시점인지 40대 남성의 시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40대 남성이 사춘기 시절을 기억하는 것인데 기억이 가공되는 것처럼 시점도 가공되어 물리적으로 구분짓기 어렵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의 저녁 키스를 기다리는 간절함을 갖고 있는 소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소년의 시점에서 기술인지 40대 남자가 다시 해석한 기술인지 구분할 수 없다. 더구나 꽃을 보며 우는 아이에서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같은 화자이니  어려움은 더하다.   


 

 10여년 전에 이 책을 읽다가 2권 즈음에서 그만두었다. 앞에서 말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어서이다. 그러다가 2년 전 쯤 불면에 시달릴 때 이 책을 수면제로 읽었던 기억이 나서 전자책으로들으며 잠을 잤다. 그랬더니 자꾸 우울해 지는 느낌으로 잠들게 되어서 그만 두었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읽게 되었다. 이제는 어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제대로 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을 복원하거나 다시 의미를 두게 되면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내가 어머니의 기억을 제대로 정리해서 다시 구성해둔다면 문득 울컥하거나 어떤 매개체로 기억이 소환될 때 좀 더 나은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나를 조금 더 잘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잃어버린 시간은 찾지 못해도 새로운 나의 출발점을 좀 더 분명히 할 수 있을테고, 인간의 역사를 아는 것만큼이나 풍부하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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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마의 산 -상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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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20세기 초의 작품을 읽는데 많은 낯섦이 있는 책이었다. 고전이란 것에 손대어 본 일이 오래되어서 인지는 모르나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구분하는 것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극 중 인물들 방식이 특히 그러했다. 한 인물의 대사가 무척 길어서 마치 설교를 하는 듯한 것도 그러했고 화자의 태도나 문체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꼼짝없이 2주간 병원 침대에 잡혀있어야 했고 ,그래서 고른 책인데 상황에 맞았다. 물론 나는 알프스의 경치나 눈보라, 시간을 정해 반복되는 식사와 사교, 산책은 없지만 의사의 처리를 기다리며 침대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비슷했다.
책을 읽으며 흥미롭게 본 것은 1차세계대전 전의 세계였다. 신분이 엄연히 존재했고, X선으로 신체를 투영해 보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정신분석은 아직 낯설었고 비과학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인간의 신체, 물질, 우주에 관한 새로운 과학이 보급되고 지식에 대한 열정이 존중 받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바꾸는 인물은 없었다. 공화국과 세계국가, 개인의 자유가 논의되고 공산주의는 변방의 유령처럼 취급되거나 어이없게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가톨릭의 교의를 입고 등장하기도 했다.
<마의 산>은 알프스 고산지대에 있는 요양병원이 있는 산을 말한다. 주인공 한스는 엔지니어로 취업을 하기 전에 사촌 요하힘이 결핵으로 요양하고 있는 요양병원에 3주간을 방문하러 와서 7년간 있다가 1 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참전하여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이야기이다. 한스는 여기서 자신에게 배움을 주는 3명을 만나고 고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고 모험을 한다. 이 요양병원은 부자들이 요양하고 치료하는 곳이라 충분한 양의 식사와 즐길 거리와 지켜야 하는 생활 규칙이 있다.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충직한 요하임 같은 이는 간절히 내려가고 싶어 하다가가 내려가서 군이되지만 병이 악화하여 돌아와서 죽는다. 한스가 사랑하는 소샤부인처럼 병으로 자유를 얻어 여행하듯이 머물다가 갔다가 왔다가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나이에 이곳에서 죽는 이들도 있다.
이곳의 시간은 분절되어 지나지 않고 통째로 지나간다. 7년을 있게 되는 한스는 나중에는 시계가 고장 나지만 고치지도 않고 담배가 타는 것으로 시간을 구분할 정도다.
병으로 이곳에 갇혀있지만, 세상을 위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논쟁한다. 정신과 육체, 선과 악, 정치체제에 대해 각을 세워 자신의 편을 더 만들기 위해 싸운다. 세상과 격리되어 따로 돌아가는 것 같은 이곳도 세계대전을 앞서 예고하듯이 논쟁을 넘어서 결투를 하고 전쟁이 나자 모든 것이 끝난다.
작자는 육체를 욕망과 죽음이 함께 결합하여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한스의 엑스선 사진에 나온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상처를 과거 사랑했던 그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그녀(소샤부인)에 대한 욕망으로 보고 있다. 한스는 그와 그녀를 동일 인물로 본다. 한스는 소년 시절 학교에서 만난 그를 사랑했고 그 표현은 연필을 빌린 것이었는데 그와 똑같은 눈을 가진 소샤부인을 문을 쾅 닫고 상류 사회의 예절을 잘 모른다고 해도 사랑하고 그녀에게 연필을 빌린다. 그리고 떠난 그녀를 한스는 산을 내려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고 기다린다. 결국 사랑은 병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한스는 병은 나았지만 열은 떨어지지 않는데 원장은 혈액에 있는 균 때문이라 진단한다. 그리고 균은 죽은 요하임에 대한 사랑에 대응한다. 그는 요하임이 원했던 전장에서 안식을 찾는 것처럼 겨울 나그네의 보리수를 부르며 죽음으로 달려간다.
연대를 보면 토마스만은 프루스트의 20년쯤 뒤의 사람이다. 프루스트가 음악 하나를 표현할 때 만연체로 수 페이지를 넘길 때 기겁을 했었는데 토마스만도 만만하지는 않다. 프루스트는 섬세하게 묘사하고 비약이 없었지만 토마스만은 비약이 있고 높은 산을 급히 오르는 것처럼 호흡도 급하다.
나는 매일 의사의 선언을 기다린다. 여기에서 해방되면 괜찮은 삶이 있는 것처럼. 어제는 러시아 정찰기가 영공을 침범해서 우리 전투기가 출동을 했다고 하고 일본은 또 독도는 자기 땅이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하던 일을 하고, 책을 읽고 가끔 글을 쓰고, 산책도 하고 미드도 볼 것이다. 나에게 격렬한 열병이란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세계대전은 없기를 바란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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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채식주의자

마침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나서 커피를 시켜 놓고 e북에서 채식주의자를 호출했다. 이미 오래 된 소문과 평가에 비하면 늦게 읽은 편이라 연수를 떠날 때 구매해 두었다. 커피의 고소함과 모처럼의 여유를 소설은 처음부터 봐주지 않았다.

“더워서 벗은 것 뿐이야”
“...그러면 안돼?”
읽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가 계속 머리를 맴돈다. 그리고 마치 호러 영화를 본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엇인가? 그녀와 그의 꿈에 나온 잔혹한 이미지 때문일까? 소설 속 장면 중의 가장 잔혹한 장면은 주인공의 엄마가 흑염소를 먹이는 장면이다. 모성이라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정서가 잔인한 폭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오랜 폭력의 습관은 가족 안에 더욱 무섭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옳다고 믿어 온 것에 어긋나면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은 그대로 이행된다. 말로 해서 안되면 때리고 강제로 먹인다. 그리고 모두가 공범의 위치에 있다.
남편과의 사이도 예외가 아니다. 아내의 트라우마를 들어주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나 도구일 뿐이다. 그는 땀구멍 하나하나 마다 폭력의 기호를 가진 자다.
주인공은 답답해서 브레지어를 풀어 놓거나 가슴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의 오래된 폭력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기제로 가슴을 생각한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드러나면 성적인 기호가 되고 타자에게 드러나면 자신의 체면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

주인공은 꿈속에서 폭력의 트라우마를 발견하지만 작가는 우리의 일상이 끔찍한 폭력의 공간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내 입에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것은 그 피가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의 것이라는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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