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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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나침반


 처음 읽을 때는 단순한 추리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손에 땀을 쥐는 공포나 무릎을 치는 추리도 없을 뿐 아니라 탐정이 오히려 범인의 덫에 걸려 죽는다. 맥빠지는 결론에 유대인 신비주의도 별 흥미없어 그냥 지나가려다가 ‘현실은 재미없어도 되지만 추리는 재미있어야 한다’ 말에 걸렸다. 그래서 다시 읽었고 몇 번 더 읽게 되었다. (다행이 소설은 짧아서 30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소설 속의 각각의 소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중국 무협소설의 진법속에 나오는 기물들을 대하듯 유칼리스나무, 병원 같은 호텔, 유대인, 갈릴리, 대칭, 거울, 지하실의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르헤스가 설정한 미로에 빠진 것이다. 

 륀로트는 명탐정이다. 한 유대인 학자가 학회에 왔다가 우연히 보석을 가진 갈릴리 부자의 숙소 앞 방에 투숙했다. 학자는 ‘타자기에 하나님의 첫번째 이름이 쓰여졌다’라는 글을 써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도둑이 갈릴리 부자의 방으로 착각하여 학자의 방에 들어왔다가  학자를 죽인다. 경찰은 사실대로 추리하지만 륀로트는 ‘추리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대인 학자의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기자는  륀로트가 살인사건을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기사를 쓴다. 우연히 이 기사를 본 륀로트에 원한을 가진 총잡이 샤를라흐는 륀로트를 빠뜨릴 함정을 만들고 륀로트를 죽인다.

 륀로트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은 자신의 설정 때문이다. 추리는 재미있어야 하고 사물은 대칭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은 네 글자이고 지하실은 다른 곳에 통로가 있어야 한다. 륀로트에게 유대인 학자가 우연히 잡은 숙소 때문에  살해 당했다고 추리하는 것은 우연의 남발일뿐 재미가 없다. 더구나 이 학자는 삼천년에 걸친 유대인 박해를 견디고 유대교의 신비에 관한 한 질의 책을 남길 정도의 연구자다. 그에 걸맞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륀로트는 유대인 학자가 남길 글을 단서로 하여 하나님의 나머지 이름을 찾기로 한다. 이런 은밀한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륀로트에겐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에게 미로가 생기는 것은 어디론가 가는 길을 찾고자 해서 일 것이다. 단서를 찾으면 희망을 갖고 막히면 절망한다. 의지가 있으면 헤쳐가고 그렇지 않으면 주저 앉는다. 인간은  살아가는데 뭔가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의 영광을 위하거나, 왕이나 민족을 위해 죽거나, 혁명에 피를 바치거나, 자연에 순화된 삶을 살거나, 예술을 위해 배고픔을 견디거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거나, 월드컵에 나가서 우승이라도 해야 한다. 그냥 해가 뜨고 지다니? 아폴론이 불마차를 끌고 나와야 한다. 폭풍우가 아무 이유없이 배를 위협하겠는가? 누군가 죄지은 자가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과학이 인간에게 열어 놓은 것은 완전한 무의미다. 태양의 운동은 만유인력의 결과이고 폭풍우는 기후의 변화일 뿐이다. 인간은 특별한 이유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며 이 세계의 중심도 아니다. 인간은 운석의 충돌의 결과로 인한 대 멸종 이후에 틈을 열어 살아남은 포유류 중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종에 불과하다. 더구나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의 중심도 아니고 태양은 우리은하의 한 쪽 귀퉁이를 맴도는 아주 작은 일부이며 우리 은하 역시 무수한 은하 중의 하나일뿐이다. 이 우주 역시 한 순간 작은 점이 폭발하여 생겼다. 평행우주론에 의하면 이런 우주는 수없이 많다한다.


 이 소설에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다. 신의 세계를 연구하고자 하는 유대인 학자,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기독교인 경찰, 기사를 쓰고 싶은 무신론자 기자, 자기 구역의 자존심을 지키는 총잡이 샤를라흐, 유대인 혐오주의자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살인 사건에 각자의 의미를 적용하려 한다. 그리고 적어도 륀로트에겐 의미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함정에 빠진 것이 분명한데도 살를라흐에게 ‘너도 하나님의 마지막 이름을 찾는가?’라고 묻는다. 륀로트는 죽음의 순간에도 살를라흐에게 이번 미로에는 너무 많은 선이 있었다며 다음 번엔 직선으로 된 무한한 미로에서 죽여 달라고 하고 죽는다. 쉬운 추리를 해결하는 데 석 달이나 걸렸다고 자책을 하던 륀로트였느데 자기가 덧에 빠진 것임을 알았는데도 자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로를 헤쳐 오는 일이 자신의 일이고 또 다음 생에는 더 괜찮은 미로 속을 탐험하겠다고 의지를 밝힌다. 적어도 륀로트는 자기가 설정한 의미를 따르며 당연히 보일 것 같은 무의미는 무시하고 다음 생에서 까지 그 의미를 따를 것을 다짐하며 죽는다. 이런 삶에는 허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분명한 방향이 있는 나침반이 있다.


 현대에는 거대 담론이 의미를 잃었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밤에도 길을 알려주는 모두의 나침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손에 작은 등불하나 들고 각기 다른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을 보고 가고 있는 양상이라고 할까? 그래서 등불은 쉽게 꺼지기도 하고 륀로트 처럼 자신의 나침반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의미를 버린다면 굳이 길을 찾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나침반도 필요없다. 미로는 일시에 사라진다. 우리는 갇히지 않고 해방 된다. 길은 해체되거나 모든 것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에 의해 설정된 길이 아니라 우연이 창조해낸 목적도 시간도 없는 길이 나타난다. 진리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의미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다. 무의미의 길에는 가로등도 나침반도 지도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서울까? 그래도 적어도 바보같이 함정에 빠졌는지도 모르거나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지도 않을 다른 생에서 무의미를 반복하겠다는 자위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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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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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시간과 공간이 무너진다면

 

 겨울 햇살은 게으른 자를 위한 축복이다.  햇볕을 바라며 보르헤스를  읽다가 듣다가 졸기도 했다. 몽롱한 상태에서 이야기 사이를 헤매다 보니 시간을 잘 가늠할 수가 없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오솔길의 정원>은 어떤 상태의 몽롱한 시간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중국계 독일인이며 영문학을 전공한 스파이 유춘이 영국군의 주둔지를 알리기 위해 주둔지의 이름과 같은 사람(앨버트)을 살해한다. 그런데 이 줄거리는 이 소설에서는 아주 사소할 뿐이다. 유춘은 동료가 영국군 장교 매든에게 발각된 것을 알게되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단지 전화번호부에서 찾은 이름인 앨버트를 찾아 가는 과정에서 미로에 들어선 것 같은 상태에 빠진다. 기묘하게도 그가 찾은 앨버트의 집은 중국음악이 나오는 정자와 오솔길이 있는 집이고 앨버트는 유춘의 선조 추이펀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추이펀은 넓은 영지를 갖고 있는 성주였고 학식과 예술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모든 것을 그만두고 13년간 소설과 미로를 만들었는데 소설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미로를 어디에 만들었는지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앨버트는 추이펀의 원고를 연구하고 정정하고 재정비한 끝에 소설 속에 시간의 미로가 있다고 한다. 끝없이 두 개의 사건으로 분기하여 분산, 수렴, 병렬을 계속하는 거대한 시간의 그물망이 미로라는 것이다. 유춘만 존재하는 세계, 앨버트만 존재하는 세계, 두 사람이 적으로 만나는 세계, 친구로 만나는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춘은 다른 차원 속에서 움직이는 자신과 앨버트의 움직임을 무한하게 포화된 상태로 느끼지만, 자신을 쫓는 매든이 나타나자 즉각 앨버트를 사살하여 임무를 완성한다.

   

 전자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으면 두 구멍을  동시에 지나며 파동처럼 보이지만 관측을 하면 두 구멍 중 하나를 지나서 입자처럼 행동한다. 이 때 두 개로 분기하는 세계처럼 갈라지는 우주를 평행우주라한다. 이론으로 추측할 뿐 실험적 증거가 없으며 서로를 연결하는 통로도 없다. 하지만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른 우주에 있는 나를 찾는 이야기가 자주 다루어진다.  보르헤스가 1956년에 이 소설집 픽션의 후기를 썼으므로, 적어도 1956년 전에 이 소설을 썼다. 그가 평행우주 이론을 알고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현실에서 맞을 수 있는 선택의 상황은 전자가 한 개의 구멍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선택과 동시에 가능한 파동이 붕괴되는 순간을 보르헤스는 놀랍게 묘사했다.


  집을 에워싼 눅눅한 정원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무한하게 포화된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시간의 차원들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남모르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앨버터와 나였다. 눈을 들자 어렴풋한 악몽들은 사라졌다. 노랗고 검은 정원에는 단 한 사람만 존재했다.(중략)그는 리처드 매든 대위였다. 

 

  평행우주론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수많은 가능한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두 갈래로 갈라진 오솔길을 하나만 선택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우주관에서는 유춘이  임무를 완성하여 독일군이 영국군을 폭격하게 하는 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폭격하지 않는 세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 1980년대 구소련의 몰락 이후 거대담론이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보르헤스에겐 1950년에 이미 거대담론은 사소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유춘은 독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황인종을 우습게 본 상관에게 황인종 한 명이 부대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임무를 수행한다. 그래도 유춘은 영국의 괴테 같았던 앨버트를 죽인 것에 끝없이 참회하며 지쳐있다.

 갈라지는 오솔길 중 어느 길도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 편하게 선택할 수 있을까? 니체의 주장  처럼 영원회귀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선택은 무거워질까? 어떤 것이든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간은 꺼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 어떤 우주에서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내가 있다하더라도 두 오솔길 앞에 서 있는 시간으로 되돌릴 수 없다. 유춘이 임무를 선택하거나 영국인 괴테와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하더라도 각각의 오솔길에 있는 유춘은 차이가 있는 존재다. 명예를 얻거나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고 또는 세계의 비밀을 탐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선택압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또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의 미래는 불확정하다. 그래서 우린 미로에 갇힌 듯이 행동 한다. 그러나 미로를 벗어나는 길이 단 하나가 아니라면 많이 답답하거나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낯선 것을 만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신비롭게 여긴다면 미로는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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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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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책의 새로운 저자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메나르는 새로운 기법-계획적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현대미술을 관람할 때 가끔 황당함을 만난다. 뒤샹의 변기와 같은 작품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른들처럼 감히 말을 할 수 없지만 내면의 진실한 아이는 ‘뭐야. 이거 그냥 변기구만’라고 말한다. 그런데 옛 소설의 일부를 토씨 하나없이 그대로 쓴 작품을  놀랍고 위대하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그 황당함은 말로 하기 힘들 것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바로 이 이야기다. 보르헤스는 능청스러워 보일 정도로 진지하고 치밀하게 피에르 메나르를 창조해낸다. 돈키호테는 질풍처럼 내달렸지만 메나르는 모든 경우를 검토하고 엄격하게 원고를 쓰고 또 버리며 온 힘을 다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화자가 말하는 피에르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다시 쓰려 하였는데 돈키호테의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와 꼭 같은 글을 쓰고 다른 부분의 초고는 모두 없애 버렸다. 화자는 이 터무니 없어 보이는 사실을 합리화 하려한다. 메나르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인데 화자의 친구이다. 메나르는 소네트를 썼고 철학, 체스, 문학에 관한 논문을 쓴 평가받을 만한 작가였다. 화자는 메나르가 한 작업 중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가장 위대한 작업이라 한다. 그가 시도한 다양한 방법을 다룬 다음 똑 같은 글을 썼지만 매우 다른 차이가 있으며 한 없이 위대하기 까지 하다고 한다. 미완성작의 초고를 찾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하고 제 2의 메나르가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소설은 에세이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소설은 작가가 창조한 사실이기 때문에 독자는 저자의 생각과 맞서거나 동조할 필요가 없이 ‘사실’을 독자가 해석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처음 당혹감에 휘둘렸지만 다시 꼼꼼히 읽으며 메나르의 쓰기는 읽기로 대체해도 괜찮겠다는 생각했다.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다시 쓰려 하는데 처음 고려한 것은 ‘돈키호테를 월스트리트’에 갖다 놓는 형태로 돈키호테를 다시 쓰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다시 쓰기는 현대의 동화판일 테고 읽기는 지식채널e의 해석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메나르는 이 방식을 무의미한 모조품이라고 혐오했다. ‘시대착오적인 천박한 기쁨이나 미혹’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메나르가 세르반데스가 되어서 쓰는 방법이다. 온전히 16세기의 인물로 무어인과 전쟁에 참여하고 17세기 이후의 역사를 모르는 세르반데스가 되어 쓰는 것이다. 이 방식은  작가가 신이 세상을 창조했듯이 작품을 창조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돈키호테>에서라면 작가의 의도가 기사소설의 허무맹랑함을 고발하려 했다든지, 16세기의 각 신분들의 말하기와 세계관을 고려하며 읽는 방법이다. 프로이드의 세례를 받은 현대에는 작가가 밝히지 않은 무의식의 세계까지 찾아내는 읽기를 하려한다. 세르반데스가 레판토 해전에 참가했고 포로가 된 경험이 있는 것이나 아버지가 이발사였다는 것을 고려하며 작품의 행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헌데 메나르는 이 방식이 지나치게 쉽다는 이유로 버린다.

 메나르는 세르반데스가 아니라 메나르로서 <돈키호테>에 이르고자 한다. 독자는 좋아하는 표현, 공감하거나 인용하고 싶은 구절을 책에서 만난다. 화자는  <돈키호테>의 한 구절 ‘강의 요정들, 고통에 시달리며 축축하게 젖어 있는 에코’에서 메나르의 문체를 찾아낸다.

 세르반데스는 ‘타성적 언어와 상상력에 이끌려 마구잡이로 써 내려 갔지만’ 메나르는 문자 그대로 다시 쓰야 한다. 작품이란 온전한 작가의 창조물이 아니다. 세르반데스가 말한 것 처럼 지방에 전해 내려온 이야기, 이슬람 작가가 쓴 이야기를 번역한 것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산물이다. 더구나 세르반데스는 ‘타성적인 언어와 상상력에 이끌려 약간 마구잡이로 써 내려 갔지만’ 독자는 작품을  토시 하나 고치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규칙을 따라 읽다가도 때로 작품에 부딪힐 때 규칙을 희생해야 한다. 시대 차이도 넘어야 한다. 메나르의 쓰기(읽기)에는 17C초의 스페인의 지방색도 없고 집시에 대한 비난이나 종교재판도 없다. 21C초의 메나르라면 성차별도 없을 것이다. 독자는 작가보다 보편적 관점에서 책을 읽는다. 작가의 지역색이나 시대의 관습에 구애됨이 없이 읽을 수 있다. 돈키호테의 무가 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장황한 연설 쯤은 관용으로 넘길 수 있다. 또 어떤 문장은 작가의 의도와 아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돈키호테>에 나오는 역사에 관한 문장을 세르반데스에게는 역사란 사실을 그대로 쓴 것이라는 의미라면, 메나르에게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다. 메나르에게 또 다른 어려움은 외국어고 오래된 언어라는 점이다. 그래서 똑 같은 문장이라고 해도 세르반데스의 원작과 다른 문체가 되고 다른 의도를 가진다. 독자가 읽고 있는 문장이 외국어이고 또한 번역자를 거친 것이라면, 원작과는 다른 문체가 되고 그래서 독자는 새로운 해석을 한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에 의해 무한히 풍요로워 질 수 있다

 화자는 메나르가 ‘계획적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메나르를 읽고 세르반데스를 읽었으며 베르길리우스를 읽었다. 다음은 호머가 될지 모른다. 시대의 역순이다. 책에는 인용구가 있고 그것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시대를 거꾸로 가기도 하고 건너 뛰기도 한다.  <돈키호테>는 더 이상 세르반데스에 속해 있지 않다. 독자는 시대를 역행하기도 하고 횡단하기도 하는 많은 이야기를 지나온 책이 머무는 장소다.


 메나르는 끝없이 초고를 쓰고 수정하고 수많은 페이지를 찢어버렸다.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지만 이 허무한 행위를 메나르는 계속하기로 한다.  ‘생각하고, 분석하고, 창조하는 것이 지성의 정상적 호흡작용’이라며 허무를 마주본다. 독서 역시 이와 같다. 독서는 (‘꼼꼼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흔적을 남기고 계속해서 지워지고 덧씌워 주는 행위이다. ‘동떨어진 이질적인 사상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우주의 비밀을 알아가며 때로 재미까지 있는  이 행위를 계속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보르헤스의 단편은 시와 유사하다. 깔끔하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는데 독자는 인물과 사건에서 상징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제대로 읽기가 몹시 어렵고 파격적이라 처음에는 당혹감에서 시작하지만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그가 만든 미로에서 독자는 헤멜 수밖에 없지만 유쾌한 지적 유희가 틀림없다.

메나르는 새로운 기법-계획적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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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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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돌아오고 완성되는 존재일까? -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인생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들에게 남긴 미묘한 반영을 통해 

                                         그 영혼을 하염없이 찾아가는 작업이다.

                                                                                         -본문 중에서-


 누군가 읽지도 않은 책의 이야기를 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그가 몹시 허세를 부리거나 거짓말쟁이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소설을 읽은 것 처럼  줄거리를 설명하고 많은 실명의 평론가나 작품을 동원해서 아주 진지한 어조로 설명한다면 몹시 황당할 것이다. <알모타심으로 접근> 바로 이런 구조인데 이 자체가 소설이다.  

 단편소설집 <픽션들>의 두 번째에 나와서 소설이라 첫 번째 보다는 좀 쉬울 거라는 추측은 빗나갔다. 어려운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재미는 더 없다. 서평을 찾아봐도 보르헤스가 쓴 에세이 형식의 소설 중 처음이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평외엔 별 특별한 것을 찾지 못했다. ( 이 소설은 그의 에세이집에도 실렸다 한다.)  <틀뢴~> 역시 가상의 책의 이야기이지만 책을 발견하고 그 책에 얽힌 비밀결사가 밝혀지는 과정이 있어 이야기 구조라도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냥 서평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고 가상의 다른 이들의 평을 추가했다. 그러니까 나는 가상 소설의 서평의 서평을 쓰고 있다. 보르헤스의 표현에 의하면 이 작품을 더 풍성하게 하고 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화자는 두 영국 작가가 가상소설을 신비주의적 속성을 가진 탐정 소설의 기법을 가진 작품이라 했는데 이 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겠다고 한다. 가상소설은 1932년 봄베이에서 출간하여 성공했다. 1934년 영국의 큰 출판사가 유명작가의 서문과 삽화를 붙여서 재출간 했다. 화자는 초판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두 개의 판본 사이의 차이점을 요약해 놓은 부록을 갖고 있다. 법대생이고 부모의 종교와 다른 이슬람교도인 주인공이 힌두교도를 살인했거나 했다고 생각하여 도망간다.  도망가는 길에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 들은 어떤 사람을 또 찾아 나서기를 반복하다가 깨달음의 사람 알모타심을 찾기로 한다. 많은 곳을 전전하다 결국은 그가 처음 떠났던 봄베이로 돌아와 어떤 진열실에 알모타심을 만나러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 다음은 화자가 덧붙이는  평과 소설이 영향을 받은 작품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화자가 언급하는 책과 작가들의 주석을 달아 놓았지만 내가 모르거나 읽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언급한 책의 줄거리를 단 하나 알 수 있는데,  이 소설의 끝문장에 작가가 남긴 각주 때문이다. 이 각주에 <새들의 회의>를 요약하는데 여행과 수련으로 단련되어 성화되는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시작하여 알모타심을 구상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의 계보를 추적하려는 것은는 것은 아니라 반복되는 유사성과 차이를 말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먼저 두 판본에서 차이가 나타남을 언급한다. 1판에 알모타심은 인간적인 면모가 많이 나왔는데 2판에서 신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른 작품들과도 유사성을 갖는데 이 사실은 작품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찬탄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도 사람을 찾는 행위를 계속하며 유사성을 갖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 보르헤스는 한 인터뷰에서 작가들은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를 다시 쓴다고 한다. 결국 많은 작가의 작품은 오래된 신화나 누군가의 작품을 반복하지만 차이로 인해 평가를 받는다.  <틀뢴~>에도 복제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원본을 복제하면서 차이가 있는 사본들이 계속 나타난다. 우리가 하는 기억은 기억할 때마다 다른 복제본이다. 그나마 소설로 나온 1판과 2판은 차이를 구분하여 변화를 추적할 수 있지만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기억은 제대로 차이를 추적하기 어렵다. 이 소설의 화자가 원본을 구하지 못한 것 처럼 우리 기억의 원본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힌두교도를 정말 죽인 것인지 아니면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유전자의 복제이고 복제를 반복하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내 생각에는 이 소설에서 언급된 가상소설은 탐정소설의 구조가 아니라 성장 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다. 아버지의 종교를 부정하거나 죽이고 방랑을 떠나고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 온다. 마지막 알모타심을 만나러 들어가는 부분에서 끝난 것은 그가 바로 알모타심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처음 언급한 두 작가의 평에서 다른 부분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말미에 이야기의 유사성을 말한 것을 보면 누군가의 작품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악평을 받을 이유가 아니며 삶이란 이야기를 반복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도 하다.


 모든 인류가 그랬듯이 나도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다. 석가가 말한 인생의 4가지 고통 역시 시대에 따라 내용과 질에서 달라져 왔다. 노화를 극복하는 기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수명을 늘렸고 병의 고통으로부터 꽤 많이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반복되는 이야기도 더 많이 변해야 한다. 어쩌면 아주 새로운 이야기 구조가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알레고리처럼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는 바뀌어도 괜찮지 않을까?  애초에 떠난 곳을 말하는 그 원본은 너무 빨리 변해서 비슷하지도 않은  만큼 다른 장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알모타심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떤 회귀가 아니라 새롭게 펼쳐냄이고 그것이 자신이 세계속에서 창조한 고유성이다. 우리가 어떤 완성된 존재로 있을 수 있을까?  여행을 계속하듯 또 다른 내가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여행에는 끝이 있고, 약간 더 낮은 가능성은 (나도 나이를 먹었으므로) 나의 세계는 더 느려지고 침침해져 갈 것이라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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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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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질서라는 외형만 갖추었다면 어떤 체계나 대칭도 - 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 - 인류를 매료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틀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목을 보고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다. 알고 보면 우크바르는 브래트니커 백과사전의 한 복제판에 이상하게 삽입되어 있는 허구의 지명이름이고 틀뢴은 우크바르의 문학 중에 서사시에 나오는 행성의 이름이다. 이 행성에 관한 백과사전의 이름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다.

 ‘틀뢴~’은 보르헤스의 소설집<픽션들>에 나오는 첫단편이다. 추리소설의 형식에 행성 규모의 방대한 지식체계를 담고 있어 미궁을 헤매고 나서도 많은 숙제를 남긴다. 작가가 서문에 써 놓은대로 방대한 양의 가상의 책을 요약 논평하는 것과 이 책이 만들어진 비밀과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병행하는 구조다. 비밀만 보면 장미십자회의 아류인 것 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행성의 문명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의심해야 한다.


 첫 문장은 우크바르를 발견한 동기가 거울과 백과사전을 연관시킨 덕분이라고 시작한다. 친구와 일인칭 시점 소설에 대해 토론하다가 복도 끝에 있는 거울을 인식하게 되고 친구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다’라는 표현을 백과사전에서 봤다고 하고 그 백과사전을 찾아 나서는데 백과사전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리고 화자의 아버지 친구인  애시의 책에서 발견된 편지에서 비밀이 드러난다. 17세기 어떤  비밀결사에 의해서 하나의 국가로 고안되어 만들려 한 것이 후대에서 행성 규모로 백과사전을 만들게 된다. 그후 틀뢴에 관한 백과사전과 유물이 모종의 계획으로  ‘발견’되어져 틀뢴은 세상에 알려진다. 나치즘에도 열광했던 세상은 더욱 정교한 체계와 대칭을 갖춘 틀뢴에 열광한다. 세상은 틀뢴의 세계관으로 채워지고 더 많은 틀뢴의 세계가 생성되고 풍성해진다.  그리고 앞으로 백년 후에서는 틀뢴 제2 백과사전이 나올 것이며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라 예언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개의치 않고 옛책을 옛문체로 번역해 놓고 출판할 생각도 없이 원고를 손보고 있다.


 접속사는 거의 없는 간결한 문장인데도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 난다.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규모와 고대와 현대를 왔다갔다하는 다양한 인물의 등장, 넓게 언급되는  철학과 문학, 환상적인 시간과 공간, 서양 사회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곳인 이슬람과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는 우선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간결한 문장 중에는 다음과 같은 화려함도 있다.

 

 ‘ 밤 중의 밤’이라는 이슬람의 어느 날 밤에 천국의 비밀의 문들이 활짝 열리고, 항아리에 담긴 물은 평상시의 밤보다 더욱 달콤해진다. 하지만 그런 천국의 문이 열렸다 할지라도 내가 그날 저녁에 느꼈던 그런 황홀함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자가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발견했을 때를 표현한 문장이다. 저자의 주에 의하면 밤중의 밤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천국이 내려왔다고 하는 성스러운 밤,  라마단의 마지막 밤이다. 내게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떠오르며 더욱 신비하고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어떤 지식들은 그 사람의 세계와 감성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음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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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고 나면 책 표지를 보지 않더라도 <그림 그리는 손>이 생각난다. 그림을 그리는 손을 따라가면 또 다른 손이 그 손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 안에 있으면 이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미로에 갖힌 듯하지만 외부에서 보면 손이 서로 그리고 있는 그림이란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우크바르로 만들려한 것이 틀뢴이 되고 사본이 나올 때마다 어떤 것은 지워지거나 희미해지고 또 덧 붙혀진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그 엄밀함 때문에 인간의 모습은 잊혀지고 틀뢴의 세계만 계속하여 풍성해진다. 실존하는 인물과 작품이 허구와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허구와 실재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그러다 머리가 무거워질 때 고개를 들고 다시 보면, 그림 그리는 손 자체가 그림인 것 처럼 이 세계는 보르헤스가 만든 픽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백과사전의 제작은 계몽주의 시절의 백과사전학파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백과사전학파는 ‘올바른’ 지식을 대중이 알게 된다면 세상은 합리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열망을 가졌지만 틀뢴의 제작자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했는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우크바르에서 틀뢴이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중 인물 버클리는 ‘필멸의 인간들도 우주를 구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백과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작가는 단지 백과사전 11권 만을 요약하여 틀뢴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틀륀의 세계는 로크-버클리-흄-스피노자로 이어지는 철학과 비유클리드 기하,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영역을 볼 수 있다. 관념론이 지배하고 따라서 심리학이 가장 기본 학문이다.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범신론이 주류가 된다. 언어에서는 명사보다 형용사가 우선이 되며 사본은 계속 만들어지며 차이를 갖는다. 

 19~ 20C전반에는 절대적 진리가 무너지고 심리학이 대두되었고, 유클리드 공간이 유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임을 알게 되고, 지식은 확실성과 객관성이 의심되었다.  더불어 제국주의, 공산주의 혁명, 나치즘이 광풍처럼 지나갔다. 이런 시대를 인간이 만든 하나의 미로체계라는 것을 더 정밀한 체계인 틀뢴으로 구성하여 보여 준다.  우리는 여러 개의 틀뢴을 알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같은 종교적 틀뢴과 절대왕정과 전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같은 정치 경제적 틀뢴이 그것이다. 유발할라리는 종교와 이념을  많은 사람이 믿는 가짜뉴스라고 했는데 <그림 그리는 손> 처럼 자기 증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표현하려면 틀뢴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기독교의 세계는 전형적인 틀뢴이다. 여러 곳에서 발견된 고문서와 구전되는 이야기와 유물의 적절한 편집으로 기독교의 세계가 나타나고 철학, 문학, 예술, 정치 등의 영역으로 더욱 풍성해진다. 인간은 두루마리 따위는 잊어버리고 구전은 계시가 되고 권위를 가진 성서와 장엄한 성당 그리고 신이 주관하는 우주가 인간을 둘러싼다.  


 틀뢴의 세계에서 본 흥미있는 부분은 사물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표현하는 것이다. 명사는 사물의 관념을 낳는데 형용사는 사물의 속성이다. 형용사가 추가될수록 사물의 속성은 확장된다. 그러나 형용사 역시 언어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에 끝없이 가까워질 수 있지만 닿을 수 없다. 다음은 사본의 개념이다. 사본은 계속 만들어지고 창조된다. 틀뢴 자체가 사본이며 창조물이다. 현실이며 또 허구다. 기원은 아예 없거나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형용사 부분은 라캉, 반복과 기원은 들뢰즈와 데리다, 틀뢴은 푸코에서 그 비슷한 개념을 본 것 같은데, 이 책의 서문이 1941년 이고 그들은 1968년 이후에 주로 활동했으니 그들이 보르헤스를 자주 언급한데는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보르헤스는 대담에서 자신이 불가지론자라고 말한다.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허구 속에서 구축된 틀뢴일 뿐이라고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계는 허구로 구축된 틀뢴일 수밖에 없으므로 더 미적 완성도가 있는 허구에 빠져드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일까? 

 푸코는 시대의 어항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우리는 각 시대의 어항에 갇혀있어 늘 그 시대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말이다. 인간이 만든 허구인 틀뢴에 갇히는 것이나, 그 시대의 인식의 한계로 세상을 이해하는 어항이나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나 회의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이 소설에서도 종교와 나치즘 등을 정교하게 만들어진 틀뢴이 붕괴시켰다고 한다. 인간이 지나 온 역사는 여러가지 틀뢴을 깨뜨리는 역사였다. 설사 그 결과로 또 다른 틀뢴을 만나거나 또 다른 반복의 이야기라 해도, 그것은 시대를 극복해 온 결과물이다. 불가지론으로 우리는 세계에 대해 어차피 알 수 없으므로 허무에 머무를 수도 있지만, 인류는 혁명적 지식을 만들고 영역을 넓혔으며 허무를 극복해 내었왔다. 그리고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 더욱 관용적이 되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양자역학이 측정하는 정밀도는 엄청나다. 그냥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좀 더 과학적인 확실성으로 다가가고 있고 실제로 그 만큼 인간의 삶을 개선했다. 적어도 현대의 인간의 다수는 신분과 종교,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않다. 

  보르헤스는 관념의 세계나 범신론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 세계를 좋아하는 이유는 꿈, 상상력, 아름다움에서 더 풍부한 세계이기 때문일 것 같다. 나는 유물론자이지만 판타지를 좋아한다. 낮의 세상은 더 건조해 지기를 원한다. 맑은 바람이 머리 속으로 불어오는 것같은 세계를 원한다. 밤에는 더 재미있는 상상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다양한 틀뢴에서 살아가며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며,  닿지 않는 세계를 꿈꾸거나 잠들 수 없어서 거리를 헤맬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2.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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