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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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읽어서는 안되는 소설이 있다면 바로 이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힘들었다. 소설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과 같이 우울의 늪에 깊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읽는다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욘 포세의 문체는 우울을 묘사하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단문으로 반복하여 서술하는 문체는  소설의 줄거리가 아니라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독자는 더 어렵다. 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은데다가 화자가 주절거리는 말 속에서 단서를 건져 올려서 줄거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스는 가난한 데다가 노르웨이 출신이고 퀘이커교 집안 출신이다. 가난한데 시리아 출신이고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라 생각하면 조건은 비슷하다. 그래서 그는 소외되고 배척당한다. 그의 세계는 빛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도 이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또 다른 희망의 빛으로 발견한 사랑에서 마저 버려지고 그것으로 인해 내쫓기고 만다. 세상에서 내쫓기면 그 사람의 세계는 우울함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정신병원의 규칙을 따르면 그림을 그릴 수 없고, 어기면 병원에서 나갈 수 없다. 그의 선택은 병원에서 탈출하는 것 뿐이다. 사회적 위생의 관점에서 보면 라스의 머리와 수염을 잘라야 하지만 라스에게는 자존심이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올리네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올리네는 노인이 된 라스의 누나이다. 가까운 기억은 사라지고 먼 과거만 기억한다. 독자는 그녀가 떠올리는 라스의 기억에서 라스의 삶을 조각을 맞출 수 있다. 오전에 동생이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지만 기억하지 못해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다리가 너무 아파 걷기 힘들어 생선을 가져오기가 어렵다. 더구나  용변을 조절할 수 없어서 생선을 화장실에 걸어두고 용변을 봐야 한다. 자신의 상태에 당혹해하지만, 이웃의 도움을 구하지 못한다. 어쩌면 라스는 특별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올리네의 경우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미래다. 사회적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면 자존심은 무너지고 생존은 어려워지고 죽음을 갈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치매 환자의 시각에서 그들을 보기가 어렵다. 그들에게 생각 능력이 없어졌거나 현저히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어려움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욘포세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사람의 의식을 들추어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치매 환자의 당혹과 절망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 나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고 내가 다리에 힘이 없어질 때를 상상하고 바지에 오줌을 지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세계를 가진 인간은 주류세계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라스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그림은 권위자로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의사는 그의 건강을 위해 자위도 하면 안 된다고 하고 보조원은 그의 자위를 감시한다. 그래서 그는 본능과도 싸워야 한다. 프로이트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올리네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는 타인과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거의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예정되어 있다. 우울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실존했던 노르웨이의 화가다. 그의 그림을 그의 고향 바다를 그린 것 같았다. 풍경화인데 아주 무겁고 둔탁한 것으로 툭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빛은 멀리서 오는데 짙은 어둠이 스멀스멀 감돌고 있다. 구름과 바위는 무언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하고 꿈틀꿈틀 움직일 것 같다. 역동하는 에너지와 짓누르는 어떤 힘이 충돌하는 긴장이 느껴졌다. 우울도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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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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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트 하우스 - 불안에 갇히는 곳



 피요르에서 태어나 자라면 어떤 사람이 될까? 험준한 암벽 사이로 짙푸른 바다가 길게 들어와 있고 마을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아름답지만 척박한 곳이다.  드라마 바이킹에 나오는 인물들은 너무나 용감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에 애착이 적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신 오딘은 외눈의 우울한 신인데 그의 전사를 죽게 해서 발할라로 부른다. 그래서 그들에겐 죽음이 늘 가까이 있어 보였다. 보트하우스는  피요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여기에는 바이킹처럼 용맹한 인물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잘 못하는 소심한 남자가 나온다. 그는 서른이 되도록 어머니 집에 얹혀살고, 가끔 임시직 일과 기타 연주를 한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바이킹처럼 피요르를 떠날 용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불안하다. 혼자 피요르에 나가 낚시를 하거나 불안이 심해지면 자기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쓸 뿐이다.


 그는 단문을 쉼표로 이어가는 글을 쓴다. 사건을 반복하여 말하고 같은 사건을 다른 이의 관점에서 말하기도 한다.


 불안이 엄습해 온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나는 적어도 10년을 보지 못했던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크누텐과 나 우리는 늘 함께였다. 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 중략)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은 바로 지난 여름이었다. 난 크누텐과 다시 마주쳤다. 그는 결혼 했고, 두 딸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크누텐과 나는 늘 함께 였다.

 (중략)

 나는 크누텐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게 내가 두려워해 왔던 거지,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옛 친구를 마주치는 건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난 예전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여, 하고 크누텐은 생각한다.


 원어(노르웨이어)로 읽으면 운율이 느껴진다는 이 낯선 문체는 자폐 아동의 반복하는 혼잣말과 비슷하다. 생각하여 정리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의식 속에 떠오르는 사건은 의지로 제어하기 어려워  여러 사건이 섞이고 시간도 제멋대로다. 어떤 사건은 떨쳐 버리려 애를 써도 자꾸 반복된다. 이 반복하는 사건이 의식의 주류가 된다. 이 소설의 화자에게 그것은 불안을 야기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는 왜 불안한 걸까? 그는 불안의 이유를 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 독자는 정신과 의사처럼 화자의 주절거리는 말속에 실마리를 찾아가야 한다. 피요르에 사는 두 소년(화자와 크누텐)은 보트하우스에서 놀았다. 주인이 방치하여 몰래 들어가 구축한 그들의 아지트. 병, 조개껍데기와 같은 수집물이 있고, 어른들이 모르는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도 불안은 있다. 주인이 와서 바깥에서 빗장을 걸어버리면 갇히게 되는 불안. 밴드를 하는 두 친구에게 관심을 가진 소녀. 두 친구와 그 소녀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는데 두 소년만 진실을 알고 있다. 이 일 때문에 크누텐은 밴드를 그만두고 마을을 떠났고 마을을 방문할 때도 사람을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크누텐은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왔다가 보트하우스 옆 길에서 십수 년 만에 화자를 만난다. 이때 화자에게 불안이 엄습한다. 화자는 크누텐의 아내가 신경 쓰이고, 크누텐의 아내는 화자를 유혹하고, 크누텐은 아내를 의심한다. 불안한 화자는 연주도 그만두고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서 글만 쓴다. 여름이 지났을 때 또 다른 사건은 일어나고 진실을 아는 것은 두 사람뿐이다. 불안은 해결되지 않고 이제는 글조차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보트하우스에 영원히 갇히게 된 셈이다.


 그는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불안했을 때를 반복하여 말한다. 마음을 흔드는 이가 다가오면 불안하다. 그녀와 함께할까 봐 불안하고 그렇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이 불안은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한다. 화자에게는 음악을 하게 된 힘이었다. 마음을 흔드는 이가 다른 이에게 눈길을 준다면? 또 불안하다. 그녀와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할 수 없다. 친구는 떠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사건을 다시 떠올릴 만남이 두렵다. 비슷한 일이 또 생길까 불안하다. 이제  불안에 영영 갇히어 살게 되었으니 불안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이킹은 나침반도 없이 막막한 바다로 나아갔는데,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사는 화자는 왜 불안에 갇히는 것일까? 삶의 척박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크기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바이킹과 같은 불멸의 서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모험은 불멸의 이야기로 남으며 전장에서 죽으면 오딘이 있는 발하라에 간다. 그래서 벽에 똥칠하다 죽을 날을 기다리지 않고 방패를 두드리며 달려 나간다. 하지만 거대 서사가 거짓임이 밝혀진 지금 보트하우스와 자기만의 은밀한 세계에 사는 화자는 불안을 벗어날 마땅한 방법이 없다.

 피요르에 살지도 않는데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존재로 인한 근원적 불안은 현대인만 졌던 무게가 아니다. 현대인의 특수한 불안은 무거운 이야기에서 해방된 자유의 대가다. 사르트르는 이 불안을 내던져졌다고 표현했지만 우리는 마냥 내던져진게 아니라 충분히 관리를 받는 편이다. 현대에는 막막함 보다는 유혹이 오히려 많은 편이다. 그래서 자유는 달콤하고 불안은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더욱 질주하는 21C의 세계를 보면 인간의 욕망은 불안에 눌려서 제어될 만큼 그리 약하지도 않다.


 피요르가 나오는 다큐를 보았다. 육지보다 바다로 가는 것이 더 쉬워 보이는 피요르 가장자리에 형성된 작은 마을 하나가 지나갔다. 그 보트하우스가 있음 직한 마을이었다. 외딴 마을의 낡은 보트하우스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불안 때문은 아니다. 불안을 느꼈던 처음 장소,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정확한 그곳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애틋함. 이것만으로 불안을 이길 만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 앉아 있다. 나는 혼자다. 나는 여기 존재한다. 그것이 이 불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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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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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욘 포세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작가의 작가다. 호기심에 찾아 읽은 작품인데 읽은 처음부터 매우 당황했다. 그가 구사하는 문장 때문이다.  단문이 마침표 없이 쉼표로 이어지는데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그대로인데 다른 이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시 진술하면 이게 뭔가 한다. 그러다가 결말에 이르면 추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소설은 매우 단순한 것 같아 던져두어도 될 것 같은데 다시 읽게 된다. 그러면 그 단문들이 힘 있게 살아나고 나는 오히려 긴장한다.


욘 포세의 문장은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을 그대로 기술한 듯하다. 머릿속의 생각은 대개 단문으로 이루어지며 반복을 계속한다. 머릿속 생각은 시간 순서로 흐르지 않는다. 돌출하고 뒤섞인다. 불안과 강박이 되는 사건은 떨칠 수 없고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이 반복은 조금씩 차이를 만든다. 생각이 사건을 반복하여 기억할 때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화자의 강박을 드러내면서도 기억의 시간대를 섞으며 아주 단순할 수 있는 줄거리에 긴장을 만들어 낸다. 독자는 이 차이에서 퍼즐을 맞추듯 사건을 추리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절대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치밀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방치된 보트하우스에서 초등학교 때 아지트를 만들고 밴드를 시작한 두 친구(화자와 크누텐)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비슷하게 반복되는 3번의 삼각관계가 있다. 특히 두 번째 소녀와 무슨 일인가 있었고 그 때문인지 크누텐은 고등학교에 가면서 마을을 떠났다. 결혼하여 가족과 여름 휴가를 와서도 화자나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해한다. 화자는 마을 떠나지 않고 제대로된 직업도 없이 어머니와 함께 산다. 화자는 휴가온 크누텐과 마주친다. 크누텐은 아내와 화자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화자는 크누텐의 아내가 유혹하자 불안해한다.


이 소설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불안일 것이다. 화자는 불안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글을 쓴다. 불안의 계기는 분명한데 이유는 불명확하다. 화자의 처음 불안은 좋아하는 동급생이 나타났을 때였다. 이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 수 없어 불안해 했고 보트하우스에서 키스 놀이를 할 때 그녀가 크누텐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할까 두려워했다. 다음 불안은 밴드가 연주할 때 소녀가 화자에게 눈길을 보냈을 때다. 소녀는 처음에는 화자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크누텐을 보고 그와 이야기 한다. 다음이 10년도 더 넘은 후에 크누텐과 그의 아내를 보았을 때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보트하우스에서 화자를 유혹할 때 불안해 하고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자 불안에 견딜 수 없어 글쓰기 마저 그만둔다. 작가가 사건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은 것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사건의 폭을 넓혀서 보편적 불안을 다루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다. 어구와 행동을 반복함으로 표현할 뿐이다.


 욕망의 실현 또는 좌절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을 유발한다. 이 불안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화자의 경우처럼 음악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 불안은 넓게 보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되고 존재 자체의 문제로 발전되기도 한다.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불안은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또 그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이유도 모른채 불안해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화자가 마음을 두었던 소녀와 크누 텐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고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본인도 이유를 모르는 불안이 증폭된다. 불안은 틀리지 않아서 마침내 사건은 일어난다. 보트하우스에 있었던 일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처럼 화자만 지게 되는 기억의 짐이 더해졌다. 그래서 화자는 더 큰 불안을 안게 된다. 


  기억은 아마도 보트하우스와 비슷할 것이다. 화자의 보트하우스는 주인이 방치한 틈을 타서 구축한 아지트와 같은 비밀스러운 낙원이다. 하지만 이곳은 주인에 의해 빗장이 걸려 자칫하면 갇히게 될 수도 있는 불안한 곳이다.  기억의 어떤 곳에서는 조개껍데기나 유리병 같은 수집물이 남아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은 떨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반복하여 불쑥불쑥 솟아나 우리를  불안의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쉽게 던져 버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화자가 안 됐다는 생각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작가가 사용한 문체는 불안만이 아니라 피요르를 잘 드러낸다. 피요르에 대한 묘사도 제대로 없는데도 파도 소리와 바람이 중요한 곳에 효과음이 들리는 듯 나타난다.  그 효과로 화자의 외로움과 불안이 낭만적 감성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울한데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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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연대기 1~3 세트 - 전3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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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의 기억  

                                                -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제목이 꽤 낯설다. 새가 시간의 태엽을 감고 있는데, 그 새가 시대를 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직장을 그만두고 파스타를 끓이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루키 특유의 세밀한 묘사와 비유, 간결한 문장을 읽는 재미로 읽어 나가다가 기묘한 무속인이 등장하면 이상해진다. 여기에  관동군의 기억이 더해지고 파스타 남자가 무속인이 되어가면 당혹하게 된다. 이 소설은 무속이 이끌어가는데 이 무속은 전통적이지 않다. 일본의 그 흔한 신사도 하나 나오지 않고 어떤 신에게도 의지하지도 않는데도, 미래를 말하고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기도 하고 일종의 심리 치료도 한다. 무속의 도구도 특이하다. 물이 말라버린 우물과 야구방망이, 얼굴에  생긴 얼룩 반점이다. 더욱 당혹스런 것은 이 도구들의 조합에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작가는 현대 일본을 살아가는 주류와 비주류 인물의 계보를 관동군의 기억에서 찾고 일본을 치유할 길을 찾으려 한다. 이들 사이의 연결과 치유를 위해 작가가 동원한 방식이 무속이다. 내가 보기에 이 연결은 성공하지 못했고 기괴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일본 작가가 관동군과 전쟁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를 따라 가 보는 것은 꽤 흥미가 있었다.


 소설의 주요 장소는 마른 우물이 있는 빈집이다.  관동군의 육군 대령으로 엘리트였던 ‘모모’가 살던 집인데 그는 공훈도 많이 세웠고 몹쓸 짓도 많이 했다. 전쟁 포로를 500명 가까이 한꺼번에 처형하고 농민을 몇만 명이나 끌어 모아 강제 노역을 시키다가 절반을 죽어나가게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지 않다 한다. 그는 전쟁후 전범 재판을 피하려 이 집에서 자살을 했다. 그런데 그 후로 이집은 일종의 마가 끼어 이사 들어온 사람들이 목을 메달아 죽고 우물의 물도 말라 버려 빈집이 되었다 한다. 

 관동군의 기억은 평범한 군인(마미야 중위)과 동물원 수의사의 것이다. 마미야 중위는 관동군에서는 별 하는 일 없이 평화롭게 있다가  어떤 임무를 띤 인물(야마모토)은 호위하기 위해  동료 혼다와 함께 몽골 사막에 가게 된다. 그들은 소련 군 장교가 지휘하는 몽골군에게 잡힌다. 소련군 장교는 몽골군을 시켜  야마모토에게 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하게 하여 죽인다. 소련군 장교에 의해 마미야는 물이 없는 우물에 버려졌다가 기적으로 살아남는다. 전후에는 소련군의 포로수용소에 갖힌다. 그런데 여기서  고문을 행한 소련군 장교를 비밀경찰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비밀경찰은 불법 권력을 사용하여 수용소를 지배한다. 마미야는 그를 위해 일하게 되지만 그를 죽이려 한다. 마미야는 실패하지만 비밀 경찰은 자신의 비리를 함구하는 조건으로 마미야를 살려준다.

 수의사의 기억은 누구도 전한 사람은 없다. 단지 그의 딸이 신비적 경험으로 알게 된다. 얼굴에 반점이 있는 수의사는 대륙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위해 만주에 설립한 동물원에 가게 된다. 그는 소련군의 진주를 앞두고 동물원의 맹수를 처리하기 위해 온 군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 군인들을 이끈 장교는 명령대로 총을 사용하지 않고는 맹수를 죽일 수 없다고 깨닫고 맹수를 사살하지만 코끼리는 살려 둔다. 다음날 군인들은 만주군 군사학교의 일본인 교관을 야구방망이로 때려 죽인 중국인 생도들을 끌고 온다. 이번에는 명령 그대로 수행한다. 총을 사용하지 않고 칼로 찔러 죽이고 , 주도자는 살인의 무기였던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죽여서 구덩이에 묻는다.

 귀국하는 수송선을 탔던 수의사의 어린 딸은 미군의 잠수함을 만나게 된다. 미군은 비무장 상태에 민간인을 실은 수송선을 함포로 침몰시키려한다. 그 극적인 순간에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공격을 멈춘다. 

 

 하루키에게 관동군의 학살은 전해들은 분명치 않은 이야기이지만 받은 피해는 몹시 구체적인 기억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는데도 관동군 엘리트 군인은 이름 없이 그냥 ‘모모’다. 평범한 군인인 마미야에게 생생하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소련의 비밀경찰이 된 군인에게 당한 끔찍한 고문이다. (하루키는 이 고문과 살해를 아주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비밀경찰의 폭력적 강압이 지배하는 수용소를 겪었다. 어린 여자 아이는 미군의 잠수함의  함포 앞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의 평범한 군인들은 인간으로 자존심을 갖고 살려했다고 기억한다. 평범한 관동군은 대부분 별 하는 일 없이 있었고, 맹수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장교는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다. 마미야는 포로 수용소에서 군림하는 소련의 비밀경찰을 죽이려고 하는(소련인들도 꼼짝 못하는데) 결기가 있었고, 동물원에서 장교는 명령을 거역하고 맹수를 총으로 죽이고 코끼리는 놓아 주었다. 그러니까 잘못이 있다면 일부 엘리트 군인들에게 있었고 평범한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으로 살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끔찍한 학살과 폭압, 군수물자를 위한 수탈은 다 누구의 손으로 했을까?

 다음은 국국주의에 복무한 자들도 사무라이 전통의 결기를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야마모토는 가죽을 벗기는 고문 속에서도 끝내 발설하지 않고 죽는 용감한 정보원이었다. 또 관동군의 엘리트 군인은 활복을 하려 했으나 미군이 나타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권총 자살을 했다 한다. 군국주의의 폭압은 분명치 않지만 군인의 결기는 분명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저택의 저주로 남아 거주자를 자살하게 하고 심지어 우물까지 마르게 한다. 주인공은 이 주택을 사서 고치고 다시 물이 나오게 한다. 일본인의 전통적 결기를 이어야 일본이 제대로 간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군부보다 더 잔혹한 나쁜 집단이 있었다 한다. 고문을 자행하고 폭력으로 지배하고 비리까지 저지르는 소련의 비밀 경찰과 야만스런 몽골군, 어린 여자 아이에게 함포를 겨눈 미군이 있었다. 하나 더 덧붙이면 미군과 소련군에 대해서는 매우 편향된 기억도 있다. 관동군이 소련군을 만난 것은 전쟁 종료 1주전이었다. 관동군은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했기에 소련군은 아주 신속하게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관동군은 전후에 일본으로 돌아갔고 강제 수용소에서 노동을 한 부류는 소수였다. 일본군이 전쟁동안 비참한 전투를 치른 적은 미군이었다. 더구나 미군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히로시마에만 한 순간에 14만명이 죽었는데 미군과의 기억은 어린 여자 아이를 위협한 잠수함 정도였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던 소련군은 고문을 자행하고 가혹하게 지배하고 비리까지 있는 비밀 경찰의 기억으로 관동군 기억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빈집의 우물에서 생긴 얼룩으로 사람들을 치유한다. 우물은 마미야 중위의 우물이며 얼룩은 수의사의 것이다. 이 연결이 많이 이상하지만 일단 받아 들이면, 어떤 기억(또는 흔적)을 만나는 것으로 치유에 이른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왜곡된 기억으로 치유에 이를 수 있을까? 치유의 가능성은 몹시 의심스럽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이런 기억이 유지되는 한 일본은 변함없이 군국주의자들의 나라일 것이다.

  하루키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음악을 듣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며, 특정한 해에 부르고뉴에서 생산된 와인을 찾는다. 손수건까지 갖추어 입는 세련된 양복을 입고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싶어한다. 심지어 그의 무속은 몰타섬에서 비롯되었고 구원이 크레타 섬에 있을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서양 문화를 소비할 뿐(더구나 이 소설을 쓸 때 하루키는 미국에 있었다한다. 그것도 4년 동안), 그의 세계는 여전히 자신의 우물안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처럼 편집된 기억인 우물에 쭈그리고 앉아 구원을 찾고 있는 격이다. 

 기억은 무의식 속에 정돈되지 않는 상태로 불쑥불쑥 솟아나기도 한다. 기억은 쉽게 왜곡되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잘 의심하지 않는다. 악보를 외워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날 자신이 악보와 다르게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찰하는 사람은 기억을 의심한다. 기억을 분석하고 인과를 찾고 일관된 체계를 갖추려 한다. 더구나 그 기억이 공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계보를 분석하고 정의를 구하는 것이라면 더 철저해야 한다. 하루키는 낯선 경험을 주는 작가인지는 모르지만 큰 이야기를 제대로 다룰만큼 기억을 성찰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일본인 다수가 그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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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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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태어남, 그 후

 -보르헤스의 남부-

 

  열병을 앓다가 새로 깨어난 아침은 모든 것이 새롭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나 따사로운 햇볕이나 가볍게 들리는 새소리까지 예사롭지 않다. 아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고 새로 시작하려 한다. 그런데 삶의 기쁨은 잠시일 뿐, 새로 드러나는 삶의 비밀에 마주한다면? 그 것으로 자신이 파멸할 수 있다면 어떨까? <남부>는 이런 당혹감을 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줄거리는 보르헤스의 다른 소설처럼 아주 단순하다. 달만의 조부는 이민 온 목사이고 외조부는 아르헨티나의 군인으로 원주민의 창에 죽은 사람이다. 그는 부계의 영향을 받은 직업인 시립도서관 비서로 일하지만 자신을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생각했고 ‘낭만적’ 죽음을 맞은 외조부의 혈통을 선택했다. 그는 비록 도시에서 일하지만 외조부쪽의 재산인 ‘남부’에 있는 농장을 구해 둘 수 있었고 가보고 싶어하지만 가지 못한다. 어느날 천하루밤 이야기의 독일어판을 빨리 읽으려다 머리를 다치고 폐혈증에 걸려 거의 죽다가 병원에서 살아난다. 회복 후 그는 휴양을 위해 기차를 타고 남부의 농장으로 간다. 하지만 기차의 차장은 그에게 가야할 기차역보다 앞 선 곳에 내리라한다. 그는 기차역 근처의 가게에서 만난 원주민은 달만과 결투를 원한다. 가게 안에 있던 ‘남부;를 상징하는 것 같은 늙은 가우초가 달만에게 칼을 던져 준다. 그는 이것을 ‘남부’의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칼을 들고 들판으로 나간다.

 

 그런데 소설에 숨어있는 장치는 단순하지 않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시처럼 함축적이라 각 장치간의 연결과 의미를 알아내려면 긴장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특수성보다는 전형성을 뛰고 있고 단순하다. 배경 또한 마찬가지다. 병원, 기차, 가게, 남부 모두 특별하지 않고 전형성을 뛰고 있다. 그래서 다큐를 보듯이 거리를 두고 읽지만, 남부에서 벌어지는 반전에 당혹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남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달만이 여행을 시작할 때와 여행에서 마주치는 남부는 아주 달라진다.


  ‘남부’가 라바다비아 거리 맞은편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달만은 그것이 그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며, 그 거리를 건너는 사람은 오래되고 안정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달만이 오래되고 안정적인 세계라고 여기고 있는 ‘남부’는 아르헨티나 남쪽에 있는 평원지대다. 달만의 외조부가 전사한 사막진공작전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가우초를 동원해 평원의 인디오를 몰아내는 전쟁이었다. 남부에는 주로 평원지역인데 사막이라 칭했던 이유는 문명이 없는 사막 같은 곳을 문명화한다는 백인들의 인종적 사고 때문이다. 이 전쟁에 가우초와 인디오들이 거의 몰살되었고 빈자리는 달만의 조부와 같은 백인 이민자로 대체했다. 이후 평원은 목축과 농업지역이 되어 아르헨티나의 경제의 큰 버팀목이 되었다.  사막진공작전과 작전을 주도했던 로카 장군이 아르헨티나 지폐 100페소에 나올만큼 아르헨티나인에게 사막진공작전은 영토를 확정 지은 자랑스런 역사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남부가 품은 비밀이다. 달만에게 남부는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고 외조부의 전리품인 농장이 있는 곳이다. 달만은 새로 태어난 기쁨으로 남부로 가지만, 기차에서  남부의 낯선 비밀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이 광활했지만 동시에 은밀했고, 어떤 점에서는 비밀스럽기까지 했다.⋯고독은 완벽했고, 아마도 적의에 차 있는 것 같았다. 달만은 자기가 ‘남부’를 향해 가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동시에 과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소설 어디에도 사막진공작전을 언급하지 않는다. 누구도 달만에게 비밀을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달만은 남부의 풍경에서 비밀과 적의가 있음을 느낀다. 이어서 그는 강제로 차에 내려야 했고 가게에서 결투를 요구받는다. 달만은 이 사건으로  남부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된다.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있던 노인이, 그러니까 달만이 ‘남부’의 상징을 보았던 사람이 칼집에서 칼을 뽑아 달만에게 던졌고, 그 칼이 달만의 발치에 떨어진 것이다. 그건 마치 ‘남부’가 달만에게 결투를 받아들이라고 결정한 것 같았다.


 달만은 운명을 받아들이듯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를 칼을 굳게 움켜쥐고 평원으로 나갔다.’그러면서 병원에서 죽을 뻔 했을 때 ‘더 넓은 하늘아래 칼싸움을 벌이며 죽었다면 해방이고 축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그가 맞게 될 죽음은 외조부의  ‘낭만적’ 죽음도 아니고 해방이나 축제는 더욱 아니며 단지 복수의 제물이 된다. 천일밤의 이야기에 나오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자신의 회생에 기뻐하고 남부에서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던 달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낙담도 저항도 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기가 ‘선택했거나 꿈꾸었을 죽음’이라 생각했다. 이제 남부는 달만에게 ‘오래되고 안정된 세계’가 아니라 비밀을 품은 곳이다. 자랑스런 조상의 농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농장의 지붕색처럼 폭력의 흔적이 남아 있고 적의를 가진 인디오와 가우초의 가게가 있는 곳이다.


 보르헤스는 달만이 ‘비밀’로 다가가게 하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마련한다. 우연과 거듭남이다. 달만은 ‘조금만 한 눈을 팔아도 무자비해지는 운명’때문에 사고를 당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겨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단지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만 음미하기로 했을 때, 비밀과 적의가 드러났다. 왜 이런 통과의례가 필요할까? 달만에게는 메트릭스의 레오처럼 빨간약과 파란약을 선택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삶의 기쁨에 차서 일상에 밀려 가지 못했던 남부의 농장으로 가는 일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그가 당한 우연한 사고처럼 남부에서 운명에 휘말리듯 비밀을 느끼고 적의를 맞이한다. 비밀과 적의의 엄중함은 개인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다음의 장치는 모호함과 단순함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달만이 남부로 간 것인지 그가 열에 들뜬 환상 속에서 남부를 만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작가는 군대군대 그런 모호함을 유지하는 장치를 해두었다. 사건에 대한 묘사는 그림자 극과 같이 단순하다. 무슨 일이 왜 있었는지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인물은 큰 동양 풍경화 속의 작은 인물처럼 특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남부의 평원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달만은 원하지 않는 역에서 내리고 결투를 받아드리게 되고 그게 남부의 뜻이라는 것이 전부다. 


 보르헤스가 자주 다루는 시간의 문제는 여기서도 나타난다. 달만은 브라질의 카페에서 만났던 고양이를 통해 연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순간의 시간을 말한다. 그리고 가게에서 만나 노인에게도 영원의 시간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은 시간 가운데, 즉 연속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마술적인 동물은 현재에, 즉 영원이 순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브라질 카페의 고양이를 언급하는 부분)

    오랜 세월이 그를 왜소하고 지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자그마했고 거무스름했으며 삐쩍 말라 있었다. 노인은 마치 시간을 벗어나 영원 속에 있는 것 같았다.(가게의 노인을 언급하는 부분)


 고양이와 노인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영원히 진행형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파우스트가 외쳤던 영원히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다. 노인에게는 남부의 학살은 지나간 과거가 될 수 없고 현재 진행형인 고통이다. 그는 가게의 가구처럼 있다가 달만에게 칼을 던져 준다. 어떤 사건이  진행형이라면 그 사건은 순간의 영원 속에 있다. 일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지나간 사건은 잊혀지거나 주류의 기억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지만, 새로 태어난 사람, 최소한 주류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은 드러나고 그 사건은 현재진행형이 된다. 콜롬비아 드라마 <예감>의 주인공 처럼 심장 이식 수술을 하여 기적적으로 살았고 새로운 사랑도 만났는데 그 심장이 계획적 살인의 결과물이라니!  예감의 주인공은 남편을 고발해야 하고 , 사건의 비밀을 알게 된 자는 부모와 조상을 고발해야 한다. 최소한 전과 같이 살 수 없고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피해자는 말한다. 4.3은, 거창, 광주, 4.16, 이태원은 끝나지 않았다고. 적당히 기념관을 세우고 추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애써 그 소리에서 멀어지려고 해도 제주도를 떠올리거나 88고속도로를 지날 때 기억은 중력처럼 우리를 끓어 당긴다. 뿐만 아니라 뉴스만 봐도 사건을 진행형으로 만드는 괴물들 거의 매일 볼 수 있다. “ 4.3은 김일성의 지령이다” “광주에 간첩이 있었다” “ 유족들은 시체 장사를 한다.” 역사는 청산되어 봉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온전한 해방이란 없다.


 간 밤에 내렸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여름 나무를 비춘다. 연초록이 싱그럽게 되살아난다. 순간 마음이 환해지지만 오토바이의 거친 소음에 다시 인상을 쓰게 된다. 굳이 생각을 하고 살지 않아도 삶은 이리저리 얽혀 온전히 아름답지 않다. 더구나 우연한 사고는 한 번에 우리의 모든 것을 흔들 수 있다. 다시 태어나지 않더라도 조금의 생각을 하고 살게 뒤면 깨달음의 기쁨 뒤에 복잡하게 얽힌 뿌리처럼 우리의 발을 잡고 있는 세계를 보게 된다. 누군가 자꾸 칼을 던져주고 점점 그것을 피하기 어려워진다면 삶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뭔가 살아갈 융통성을 찾는 나는 생각해 본다. 세상을 구해야 할 때 구하더라도 산책할 수 있을 때, 향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때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임시 변통일 뿐일까?


 병원에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넓은 하늘 아래 죽을 것인가? 보르헤스가 묻는다면 나는 웃으면 답해줄 것이다. 선택한다고 그대로 되냐고? 

모든 것이 광활했지만 동시에 은밀했고, 어떤 점에서는 비밀스럽기까지 했다.⋯고독은 완벽했고, 아마도 적의에 차 있는 것 같았다. 달만은 자기가 ‘남부’를 향해 가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동시에 과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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