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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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오래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방이 많은 캄캄한 집에 벽에 붙어 있는 작은 등을 하나씩 켜는 일과 비숫하다. 스위치를  잘 찾을 수 있거나 우연히 손에 걸리면 방을 환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기억은 소환되지만 스위치를 찾지 못한다면 다시 소환될 수 없다.

 내게 있어서 기억은 대부분 흑백 필림 같았다. 꿈 속에서 보는 풍경같이 색을 알 수 없는 배경은 희미한 그런 풍경 같은 것이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그 배경을 화려하게 채색했을 뿐만 아니라 맛과 냄새까지 부활시켰다. 베르그송은 망각이야 말로 기억을 완벽한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기억은 원초 사건 그대로가 아니다. 살아온 과정에 의해서 기억은 왜곡되고 편집되며 오묘하게 덧칠되기도 한다. 푸르스트를 따라 읽다보면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따지면서 읽게 되지만 결국 이런 것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자각할 때 공간에 대한 지각과 기억의 연결점을 찾게 된다. 프루스트가 잠에서 깬 사건에서 시작하는 것은 나의 현존재는 과거의 기억과 어떤 연결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나의 이름, 가족, 나이, 신체 모두는 과거로 부터 현 존재인 나에게 연결된 것이다. 적어도 어제 밤에 잠들기 전의 ‘나’와 잠에서 깨고 있는 ‘나’와 연결 점을 찾아야만 나는 어떤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적어도 1권-은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 꿈속을 헤메이는 것 처럼 기억을 따라 움직인다. 인과에 따른 줄거리의 전개가 아니라 기억의 연상작용에 따라 흐르는 전개라 처음에는 당혹 스럽다. 줄거리를 따라 읽는다면 처음 일 권의 줄거리는 너무 간단하다. 잠을 자다가 자정에 깨어서 아침이 될 때까지 기억의 흐름이 전부다. 그래서 이 책은 줄거리로 읽어서는 안된다. 이 책은 기억 그 자체의 흐름을 관한 묘사이다. 침대에서 어머니를 저녁 키스를 기다리는 소년으로 넘어가고 마들렌에서 콩브레의 아주머니 집과 그 아주머니의 병에 따른 습관과  콩브레 마을을 연결하고 손님 스완과 사교계, 산책길과 소녀들, 그리고 다시 어머니로 연결하여 침대에서 다시 아침을 맞는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억 자체가 꼭 정확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며 어쩌면 꿈을 헤매는 것과 비숫하기에  이 집의 친가와 외가가 아주머니집에 모여 사는 이상한 가계도 설명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프루스트는 앞 서 말했듯이 기억을 화려한 문장으로 채색했다. 만연체의 문장으로 각종 비유를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아주 구체적으로 살려냈다. 줄거리를 따라 읽으려 할 때 지루하기만 하고 눈에 보이지 않던 문장이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읽게되면 눈에 들어온다. 정적인  묘사와 운동감이 강한 묘사를 구분할 수 있게 되면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화가가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지만 글로 묘사하는 것이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 그것이 화자가 구성한 세계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규정한다. 그는 누구를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문제가 중요했고 일차세계 대전 전의 파리 근처에 살았던 살만한 가문의 소년이 구성한 세계는 성당의 종탑과 산책길과 아가씨가 있는 아름다운 세계였다.


 

 이 책을 읽는데 또 다른 어려움은 화자의 문제다.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시점인지 40대 남성의 시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40대 남성이 사춘기 시절을 기억하는 것인데 기억이 가공되는 것처럼 시점도 가공되어 물리적으로 구분짓기 어렵다. 예를 들어서 어머니의 저녁 키스를 기다리는 간절함을 갖고 있는 소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소년의 시점에서 기술인지 40대 남자가 다시 해석한 기술인지 구분할 수 없다. 더구나 꽃을 보며 우는 아이에서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같은 화자이니  어려움은 더하다.   


 

 10여년 전에 이 책을 읽다가 2권 즈음에서 그만두었다. 앞에서 말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어서이다. 그러다가 2년 전 쯤 불면에 시달릴 때 이 책을 수면제로 읽었던 기억이 나서 전자책으로들으며 잠을 잤다. 그랬더니 자꾸 우울해 지는 느낌으로 잠들게 되어서 그만 두었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읽게 되었다. 이제는 어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제대로 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을 복원하거나 다시 의미를 두게 되면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내가 어머니의 기억을 제대로 정리해서 다시 구성해둔다면 문득 울컥하거나 어떤 매개체로 기억이 소환될 때 좀 더 나은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나를 조금 더 잘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잃어버린 시간은 찾지 못해도 새로운 나의 출발점을 좀 더 분명히 할 수 있을테고, 인간의 역사를 아는 것만큼이나 풍부하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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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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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겨우 20세기 초의 작품을 읽는데 많은 낯섦이 있는 책이었다. 고전이란 것에 손대어 본 일이 오래되어서 인지는 모르나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구분하는 것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극 중 인물들 방식이 특히 그러했다. 한 인물의 대사가 무척 길어서 마치 설교를 하는 듯한 것도 그러했고 화자의 태도나 문체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꼼짝없이 2주간 병원 침대에 잡혀있어야 했고 ,그래서 고른 책인데 상황에 맞았다. 물론 나는 알프스의 경치나 눈보라, 시간을 정해 반복되는 식사와 사교, 산책은 없지만 의사의 처리를 기다리며 침대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비슷했다.
책을 읽으며 흥미롭게 본 것은 1차세계대전 전의 세계였다. 신분이 엄연히 존재했고, X선으로 신체를 투영해 보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정신분석은 아직 낯설었고 비과학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인간의 신체, 물질, 우주에 관한 새로운 과학이 보급되고 지식에 대한 열정이 존중 받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바꾸는 인물은 없었다. 공화국과 세계국가, 개인의 자유가 논의되고 공산주의는 변방의 유령처럼 취급되거나 어이없게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가톨릭의 교의를 입고 등장하기도 했다.
<마의 산>은 알프스 고산지대에 있는 요양병원이 있는 산을 말한다. 주인공 한스는 엔지니어로 취업을 하기 전에 사촌 요하힘이 결핵으로 요양하고 있는 요양병원에 3주간을 방문하러 와서 7년간 있다가 1 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참전하여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이야기이다. 한스는 여기서 자신에게 배움을 주는 3명을 만나고 고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하고 모험을 한다. 이 요양병원은 부자들이 요양하고 치료하는 곳이라 충분한 양의 식사와 즐길 거리와 지켜야 하는 생활 규칙이 있다.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충직한 요하임 같은 이는 간절히 내려가고 싶어 하다가가 내려가서 군이되지만 병이 악화하여 돌아와서 죽는다. 한스가 사랑하는 소샤부인처럼 병으로 자유를 얻어 여행하듯이 머물다가 갔다가 왔다가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나이에 이곳에서 죽는 이들도 있다.
이곳의 시간은 분절되어 지나지 않고 통째로 지나간다. 7년을 있게 되는 한스는 나중에는 시계가 고장 나지만 고치지도 않고 담배가 타는 것으로 시간을 구분할 정도다.
병으로 이곳에 갇혀있지만, 세상을 위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논쟁한다. 정신과 육체, 선과 악, 정치체제에 대해 각을 세워 자신의 편을 더 만들기 위해 싸운다. 세상과 격리되어 따로 돌아가는 것 같은 이곳도 세계대전을 앞서 예고하듯이 논쟁을 넘어서 결투를 하고 전쟁이 나자 모든 것이 끝난다.
작자는 육체를 욕망과 죽음이 함께 결합하여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한스의 엑스선 사진에 나온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상처를 과거 사랑했던 그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그녀(소샤부인)에 대한 욕망으로 보고 있다. 한스는 그와 그녀를 동일 인물로 본다. 한스는 소년 시절 학교에서 만난 그를 사랑했고 그 표현은 연필을 빌린 것이었는데 그와 똑같은 눈을 가진 소샤부인을 문을 쾅 닫고 상류 사회의 예절을 잘 모른다고 해도 사랑하고 그녀에게 연필을 빌린다. 그리고 떠난 그녀를 한스는 산을 내려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고 기다린다. 결국 사랑은 병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한스는 병은 나았지만 열은 떨어지지 않는데 원장은 혈액에 있는 균 때문이라 진단한다. 그리고 균은 죽은 요하임에 대한 사랑에 대응한다. 그는 요하임이 원했던 전장에서 안식을 찾는 것처럼 겨울 나그네의 보리수를 부르며 죽음으로 달려간다.
연대를 보면 토마스만은 프루스트의 20년쯤 뒤의 사람이다. 프루스트가 음악 하나를 표현할 때 만연체로 수 페이지를 넘길 때 기겁을 했었는데 토마스만도 만만하지는 않다. 프루스트는 섬세하게 묘사하고 비약이 없었지만 토마스만은 비약이 있고 높은 산을 급히 오르는 것처럼 호흡도 급하다.
나는 매일 의사의 선언을 기다린다. 여기에서 해방되면 괜찮은 삶이 있는 것처럼. 어제는 러시아 정찰기가 영공을 침범해서 우리 전투기가 출동을 했다고 하고 일본은 또 독도는 자기 땅이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하던 일을 하고, 책을 읽고 가끔 글을 쓰고, 산책도 하고 미드도 볼 것이다. 나에게 격렬한 열병이란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세계대전은 없기를 바란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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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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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마침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나서 커피를 시켜 놓고 e북에서 채식주의자를 호출했다. 이미 오래 된 소문과 평가에 비하면 늦게 읽은 편이라 연수를 떠날 때 구매해 두었다. 커피의 고소함과 모처럼의 여유를 소설은 처음부터 봐주지 않았다.

“더워서 벗은 것 뿐이야”
“...그러면 안돼?”
읽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가 계속 머리를 맴돈다. 그리고 마치 호러 영화를 본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엇인가? 그녀와 그의 꿈에 나온 잔혹한 이미지 때문일까? 소설 속 장면 중의 가장 잔혹한 장면은 주인공의 엄마가 흑염소를 먹이는 장면이다. 모성이라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정서가 잔인한 폭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오랜 폭력의 습관은 가족 안에 더욱 무섭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옳다고 믿어 온 것에 어긋나면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은 그대로 이행된다. 말로 해서 안되면 때리고 강제로 먹인다. 그리고 모두가 공범의 위치에 있다.
남편과의 사이도 예외가 아니다. 아내의 트라우마를 들어주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나 도구일 뿐이다. 그는 땀구멍 하나하나 마다 폭력의 기호를 가진 자다.
주인공은 답답해서 브레지어를 풀어 놓거나 가슴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의 오래된 폭력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기제로 가슴을 생각한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드러나면 성적인 기호가 되고 타자에게 드러나면 자신의 체면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

주인공은 꿈속에서 폭력의 트라우마를 발견하지만 작가는 우리의 일상이 끔찍한 폭력의 공간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내 입에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것은 그 피가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의 것이라는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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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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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유전자

과학 팟캐스트를 듣다가 최재천 교수로 부터 이 책의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 유학을 가서 이 책을 영문판으로 밤새워 읽고 새벽 안개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인식의 새지평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몇 날을 걸쳐 읽었고 인식의 새지평이 열리지는 않았고 좀 더 보충 심화 되었다.

들뢰즈는 인간의 신체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불렀는데 도킨즈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기계라 부른다. 개체를 중심으로 한 생명인식보다는 그 보다 더 유전자에 근본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원시수프를 돌아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세포라는 막을 만들어서 자신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은 자기 복제자인 유전자가 자신을 효율적으로 복제하고 확산하기 위한 과정의 자연선택이다. 유전자는 자신을 운반하는 기게에 프로그램을 해 놓았고 그것의 성공여부는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게임이론과 확율을 동원하고 경제성을 이용하여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SS)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윤리적 잣대 없이 단지 수치로 가능성을 나타내고 시물레이션하여 결과를 나타낸다. 역사란 거대한 뜻이 있다고 역설하는 이들은 아마도 이 부분에서 아연실색할 것이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그 결과다. 어떤 유토피아로 가능 과정보다 희망적이다. 단지 자기 자신을 더 많이 복제하기를 원하는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유전자의 ESS가 매파적인 것보다는 비둘기적이며 배반하는 것보다는 협력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진화적으로 보면 유전자들은 우연히 변이를 했고 뭉쳤으며 그들이 조정하는 운반체가 자연에 의해 선택되어 유전자는 많이, 오래, 정확하게 복제되었다. 13층이라는 영화에 보면 컴퓨터 게임속에 있는 인간이 자신이 프로그램인 것을 깨닫고 황망해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단지 우리가 욕망또는 본능이라고 불러왔던 것의 기원이 어디로 부터인지를 좀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베틀스타겔럭티카(미드)에 보면 사일런이라는 인조인간이 나온다. 이 인조인간들은 너무나 인간과 비슷하여 구분할 수 없는데 인간과 섞이어 존재한다. 본인도 인간인 줄 알고 살고있다가 특정 시점에 스위치가 켜지면 자신이 사일런임을 자각하게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여 사령관을 총으로 쏜다. 또 다른 사일런은 인간과 사랑을 하고 아이를 놓아서 자발적으로 사일런에서 이탈하여 인간의 편에서 싸운다. 여기서 다시 물어 볼 수 밖에 없다. 사일런이 인간이 프로그램하여 만든 개체라면 우린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 되고 자연선택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러면 인간과 사일런의 구분이 있는가?
지금 우리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생존기계임을 알게 되었다. 13층의 프로그램속의 인간은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에게 항의라도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어디에 항의할 곳도 없다. 자신의 프로그램을 넘어 자기 삶을 선택해 나갔던 사일런 처럼 우리의 의지를 담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나의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프로그램인지 구분이 잘 되지는 않는 것이다. 나의 주체는 프로그램인가? 유전자인가? 이 모든 것이 총체화된 개체인가? 유전자와 나는 분리되는가?
알파고가 프로그램이면 알파고가 바둑을 이긴 것인가? 프로그래머가 바둑을 이긴 것인가? 알파고는 프로그램인가? 기계장치의 총체인가? 프로그래머의 도구에 불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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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 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 선집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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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지난 겨울 내내 나는 100쪽 내의 짧은 분량의 이 책과 함께 보냈다. 오래 전에 사두었고 처음 30여쪽을 읽다가 쳐박아둔 책이었다. 마침 <천 개의 고원> 4장 언어학의 기본전제들을 읽고 뭔가 해제가 필요했던 터에 팟캐스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의 남자가 진행하는 이 내용은 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깊이도 모자란듯했지만 비트겐슈타인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1월초 가족과 함께 보수동에 갔을 때 엄정식이 쓴 오래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구했기 때문에 좀 더 쉬우리라 생각했다.
엄정식이 쓴 책의 내용은 간단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은 그림이론이고 후기 철학은 게임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림이론은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고 언어는 세계와 같은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보여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의 명제는 항진명제로 의미를 가지 못하고 과학명제는 말해질 수 있고 철학적명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후기의 철학은 언어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가족유사성 정도를 가지는 집합과 같은 것이다. 각기 다른 언어에는 다른 종류의 게임처럼 유사성도 있지만 각각의 양식이 존재하고 언어는 그것에 따라 맥락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단순히 보면 유클리드 기하와 비유클리드 기하의 차이와 비슷하다. 비유클리드 기하 전의 세계는 유클리드 기하의 공준에 의해 구축된 단일한 세계라면 비유클리드기하는 공준을 바꾼 세계는 존재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실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기철학에서는 요소명제를 정하고 요소명제가 결합된 결합된 복합명제로 세계를 그린다는 것이었지만 후기 철학에서는 하나의 단어(요소명재)는 본질적인 것이란 없으며 상이한 언어게임에 따라서 다양하게 맥락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엄정식이 쓴 이 내용을 아는 것이라면 이 논고를 읽는 것은 거의 헛수고에 가깝다. 하루에 한 두 페이지를 읽을 수 없는 날도 있었고 마인드맵을 하여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이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지난 겨울을 거의 헛수고를 한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평전을 구입하고 후기 철학인 쓰여진 철학탐구도 구입하고 영문판 논고도 구입했다. 그래서 뒷 부분은 영문판과 함께 읽었다. 영문판을 읽는 것은 일종의 암호풀이지만 더디 간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번역판 자체의 문장이 암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문장이 거의 단문으로 쓰여져 있기에 문장자체가 어렵지 않았다.
평전에서 논고의 후기 부분을 찾아서 보니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쓰고 이해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몹시 걱정한 부분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두 사람이 프레게와 러셀이었다. 그런데 프레게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고 러셀 역시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제대로 출판하고 싶었지만 출판사를 찾지 못하여 좌절하고 있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신은 '수정처럼' 이해하고 있지만 이 책이 단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다고 그래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 나면 한 편으로 다행인 생각은 든다. 논리학의 대가인 프레게나 러셀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내가 이렇게 끙끙거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이지만 한 편으로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단지 처음과 달라진 것은 장의 구분없이 숫자의 나열로 시작하는 문장이 처음에는 기가 질렸으나 이제는 친절한 안내로 보이고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 문장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지 다시 펼쳐 본 첫 구절 "세계는 일어나는 일의 모든 것이다"로 시작하는 문장이 무슨 예언서를 대하듯이 웅장해 보인다.
후기 철학을 다룬 '철학적 탐구'는 아주 두터운 책이다. 저것을 언제 읽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바쁘게 가지 않을 것이다. 일단 평전의 논고가 나오는 부분을 읽어 보고 철학일기를 읽고 영문판과 대조해 가며 다시 읽어 볼 것이다. 헛수고를 반복할지 모르나 내 문장이 깨끗해지기라도 하면 뭐 괜찮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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