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 연대기 1~3 세트 - 전3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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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키의 기억  

                                                -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제목이 꽤 낯설다. 새가 시간의 태엽을 감고 있는데, 그 새가 시대를 넘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직장을 그만두고 파스타를 끓이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루키 특유의 세밀한 묘사와 비유, 간결한 문장을 읽는 재미로 읽어 나가다가 기묘한 무속인이 등장하면 이상해진다. 여기에  관동군의 기억이 더해지고 파스타 남자가 무속인이 되어가면 당혹하게 된다. 이 소설은 무속이 이끌어가는데 이 무속은 전통적이지 않다. 일본의 그 흔한 신사도 하나 나오지 않고 어떤 신에게도 의지하지도 않는데도, 미래를 말하고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기도 하고 일종의 심리 치료도 한다. 무속의 도구도 특이하다. 물이 말라버린 우물과 야구방망이, 얼굴에  생긴 얼룩 반점이다. 더욱 당혹스런 것은 이 도구들의 조합에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 작가는 현대 일본을 살아가는 주류와 비주류 인물의 계보를 관동군의 기억에서 찾고 일본을 치유할 길을 찾으려 한다. 이들 사이의 연결과 치유를 위해 작가가 동원한 방식이 무속이다. 내가 보기에 이 연결은 성공하지 못했고 기괴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일본 작가가 관동군과 전쟁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는지를 따라 가 보는 것은 꽤 흥미가 있었다.


 소설의 주요 장소는 마른 우물이 있는 빈집이다.  관동군의 육군 대령으로 엘리트였던 ‘모모’가 살던 집인데 그는 공훈도 많이 세웠고 몹쓸 짓도 많이 했다. 전쟁 포로를 500명 가까이 한꺼번에 처형하고 농민을 몇만 명이나 끌어 모아 강제 노역을 시키다가 절반을 죽어나가게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지 않다 한다. 그는 전쟁후 전범 재판을 피하려 이 집에서 자살을 했다. 그런데 그 후로 이집은 일종의 마가 끼어 이사 들어온 사람들이 목을 메달아 죽고 우물의 물도 말라 버려 빈집이 되었다 한다. 

 관동군의 기억은 평범한 군인(마미야 중위)과 동물원 수의사의 것이다. 마미야 중위는 관동군에서는 별 하는 일 없이 평화롭게 있다가  어떤 임무를 띤 인물(야마모토)은 호위하기 위해  동료 혼다와 함께 몽골 사막에 가게 된다. 그들은 소련 군 장교가 지휘하는 몽골군에게 잡힌다. 소련군 장교는 몽골군을 시켜  야마모토에게 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하게 하여 죽인다. 소련군 장교에 의해 마미야는 물이 없는 우물에 버려졌다가 기적으로 살아남는다. 전후에는 소련군의 포로수용소에 갖힌다. 그런데 여기서  고문을 행한 소련군 장교를 비밀경찰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비밀경찰은 불법 권력을 사용하여 수용소를 지배한다. 마미야는 그를 위해 일하게 되지만 그를 죽이려 한다. 마미야는 실패하지만 비밀 경찰은 자신의 비리를 함구하는 조건으로 마미야를 살려준다.

 수의사의 기억은 누구도 전한 사람은 없다. 단지 그의 딸이 신비적 경험으로 알게 된다. 얼굴에 반점이 있는 수의사는 대륙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위해 만주에 설립한 동물원에 가게 된다. 그는 소련군의 진주를 앞두고 동물원의 맹수를 처리하기 위해 온 군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 군인들을 이끈 장교는 명령대로 총을 사용하지 않고는 맹수를 죽일 수 없다고 깨닫고 맹수를 사살하지만 코끼리는 살려 둔다. 다음날 군인들은 만주군 군사학교의 일본인 교관을 야구방망이로 때려 죽인 중국인 생도들을 끌고 온다. 이번에는 명령 그대로 수행한다. 총을 사용하지 않고 칼로 찔러 죽이고 , 주도자는 살인의 무기였던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죽여서 구덩이에 묻는다.

 귀국하는 수송선을 탔던 수의사의 어린 딸은 미군의 잠수함을 만나게 된다. 미군은 비무장 상태에 민간인을 실은 수송선을 함포로 침몰시키려한다. 그 극적인 순간에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공격을 멈춘다. 

 

 하루키에게 관동군의 학살은 전해들은 분명치 않은 이야기이지만 받은 피해는 몹시 구체적인 기억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는데도 관동군 엘리트 군인은 이름 없이 그냥 ‘모모’다. 평범한 군인인 마미야에게 생생하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소련의 비밀경찰이 된 군인에게 당한 끔찍한 고문이다. (하루키는 이 고문과 살해를 아주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비밀경찰의 폭력적 강압이 지배하는 수용소를 겪었다. 어린 여자 아이는 미군의 잠수함의  함포 앞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의 평범한 군인들은 인간으로 자존심을 갖고 살려했다고 기억한다. 평범한 관동군은 대부분 별 하는 일 없이 있었고, 맹수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장교는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다. 마미야는 포로 수용소에서 군림하는 소련의 비밀경찰을 죽이려고 하는(소련인들도 꼼짝 못하는데) 결기가 있었고, 동물원에서 장교는 명령을 거역하고 맹수를 총으로 죽이고 코끼리는 놓아 주었다. 그러니까 잘못이 있다면 일부 엘리트 군인들에게 있었고 평범한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으로 살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끔찍한 학살과 폭압, 군수물자를 위한 수탈은 다 누구의 손으로 했을까?

 다음은 국국주의에 복무한 자들도 사무라이 전통의 결기를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야마모토는 가죽을 벗기는 고문 속에서도 끝내 발설하지 않고 죽는 용감한 정보원이었다. 또 관동군의 엘리트 군인은 활복을 하려 했으나 미군이 나타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권총 자살을 했다 한다. 군국주의의 폭압은 분명치 않지만 군인의 결기는 분명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저택의 저주로 남아 거주자를 자살하게 하고 심지어 우물까지 마르게 한다. 주인공은 이 주택을 사서 고치고 다시 물이 나오게 한다. 일본인의 전통적 결기를 이어야 일본이 제대로 간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군부보다 더 잔혹한 나쁜 집단이 있었다 한다. 고문을 자행하고 폭력으로 지배하고 비리까지 저지르는 소련의 비밀 경찰과 야만스런 몽골군, 어린 여자 아이에게 함포를 겨눈 미군이 있었다. 하나 더 덧붙이면 미군과 소련군에 대해서는 매우 편향된 기억도 있다. 관동군이 소련군을 만난 것은 전쟁 종료 1주전이었다. 관동군은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했기에 소련군은 아주 신속하게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관동군은 전후에 일본으로 돌아갔고 강제 수용소에서 노동을 한 부류는 소수였다. 일본군이 전쟁동안 비참한 전투를 치른 적은 미군이었다. 더구나 미군에 투하한 원자폭탄에 히로시마에만 한 순간에 14만명이 죽었는데 미군과의 기억은 어린 여자 아이를 위협한 잠수함 정도였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던 소련군은 고문을 자행하고 가혹하게 지배하고 비리까지 있는 비밀 경찰의 기억으로 관동군 기억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빈집의 우물에서 생긴 얼룩으로 사람들을 치유한다. 우물은 마미야 중위의 우물이며 얼룩은 수의사의 것이다. 이 연결이 많이 이상하지만 일단 받아 들이면, 어떤 기억(또는 흔적)을 만나는 것으로 치유에 이른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왜곡된 기억으로 치유에 이를 수 있을까? 치유의 가능성은 몹시 의심스럽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이런 기억이 유지되는 한 일본은 변함없이 군국주의자들의 나라일 것이다.

  하루키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음악을 듣고,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며, 특정한 해에 부르고뉴에서 생산된 와인을 찾는다. 손수건까지 갖추어 입는 세련된 양복을 입고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싶어한다. 심지어 그의 무속은 몰타섬에서 비롯되었고 구원이 크레타 섬에 있을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서양 문화를 소비할 뿐(더구나 이 소설을 쓸 때 하루키는 미국에 있었다한다. 그것도 4년 동안), 그의 세계는 여전히 자신의 우물안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처럼 편집된 기억인 우물에 쭈그리고 앉아 구원을 찾고 있는 격이다. 

 기억은 무의식 속에 정돈되지 않는 상태로 불쑥불쑥 솟아나기도 한다. 기억은 쉽게 왜곡되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잘 의심하지 않는다. 악보를 외워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날 자신이 악보와 다르게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찰하는 사람은 기억을 의심한다. 기억을 분석하고 인과를 찾고 일관된 체계를 갖추려 한다. 더구나 그 기억이 공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계보를 분석하고 정의를 구하는 것이라면 더 철저해야 한다. 하루키는 낯선 경험을 주는 작가인지는 모르지만 큰 이야기를 제대로 다룰만큼 기억을 성찰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일본인 다수가 그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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