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꽃 황금알 시인선 185
한성례 지음 / 황금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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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례 시집 『웃는 꽃』에 실린 시「산정호수」에서 전개되는 분위기는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의 화자 ‘나’는 스무 살에 올랐던 산정호수에 다시 올라 ‘그 광경’을 떠올린다. 서울 근교의 공동묘지에서 관에 넣지 않은 젊은 여자의 시체를, 그 젊은 여자가 하늘을 향해 무방비로 누워 있던 모습을 생각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 삶임을 감안할 때, 오랜만에 산정호수에 오른 화자가 젊은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 젊은 여자’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죽음’과 연결된다. 아니다. ‘아직은 죽지 않았다’ ‘이제 죽음마저도 견딜만하다’ ‘쌓인 추억과 꿈을 더하면 생은 그리 짧지도 않다’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시는 오히려 생과 삶을 이야기한다. 즉 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주고받는 대화이자 ‘고통’과 ‘쾌락’과 ‘사랑’이 뒤섞인 ‘무지개’이다.
깊이 감동을 주는 시들로 가득한 좋은 시집이다.
 

 
산정호수
 
 

아직은 죽지 않았다
상처에서 타고 있는 불꽃을 남들이 볼까 두렵기도 하지만
도시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이제 죽음마저도 견딜만하다
산을 뚫고 바위를 깎아 길이 단축되었듯이
말은 그만큼 단순해지고 예리해졌다
쌓인 추억과 꿈을 더하면 생은 그리 짧지도 않다
가장 아름다운 말을 촉각만으로 읽을 줄도 알게 되었다
 

하늘을 가져다 알코르에 재어 놓은 듯한 물빛
새들이 날아와 수면에 글씨를 쓰고
구름이 몰려와 이불을 덮어 주고
눈발이 수면 위에 덧칠해 놓은 그림을
종종 바람이 훔쳐간다
 

스무 살에 올랐던 산정호수에 다시 올라 문득 왜 그 광경이 떠올랐을까.
아주 오래 전, 서른세 살에 요절한 내 아버지의 사촌동생이 아버지보다 세 배는 더 오래 살다 세상을 떠나 매장하러 간 서울 근교의 공동묘지에서 바로 옆 자리에 들어갈 젊은 여자. 정확하게는 관에 넣지 않은 젊은 여자의 시체. 어서 빨리 썩어 흙으로 돌아가라고 관에 넣지 않았다던 그 젊은 여자가 하늘을 향해 무방비로 누워 있던 모습이.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이 하늘을 품고 누워 있는 이 산정호수에서.

 
정상에 오르자
당돌하게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거울이
고통과 쾌락을 무지개로 그려낸다
 

스무 살 무렵의 사랑은 조금도 진화하지 않았다
그저 퇴적층처럼 쌓여갈 뿐이다
 

눈발 흩날리는 물가에서
과거에서 전달받아 미래의 나에게 발신한
그 전언을
청명하게 받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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