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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외딴방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기억을 봉인시켜 놓은 곳. ‘숨김’이 아닌 ‘봉인’.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털어 놓고 싶지 않은 그것들은 살아가는 그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한 찰나에 찾아와 삶을 흔들어 놓고 다시 그 외딴방으로 스며든다. 누구의 외딴방에는 좋은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 고? 그러면 ‘외딴방’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고.
“넌, 우리들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더라.”( p.37)
다른 삶. 다르다. 무엇이? 다르다? 신문에 나고 유명해지면 다른 삶인가? ‘성공’이라는 글자로 표현되는 삶이면 다른 것인가? 다른 삶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 그리고 질투. 사는 동안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감정들이다.
오랜 후, 열입곱의 나와 친해진 미서가 헤겔에 대해서 말한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만 내가 너희들하고 다른 것 같아. 나는 너희들이 싫어.(p. 192)
글이 아닌 글자를 읽으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미서. 벗어나고 싶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다른 삶’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나’의 이야기를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함께 읽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체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졸업도 하기 전 회사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떠나던 날의 기억. 제법 성적이 좋아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동생들을 위해 산업체에 지원했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는 뭐라 말 한 마디를 제대로 해 주지도 못하고, 배웅도 해 주지 못한 나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모범생이던 오라비가 대학에 간 후로 정치이야기로 언성을 높이고, 데모 대열에 들어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날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가 살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와 함께였다.
희재 언니의 죽음, 그녀의 방 자물쇠를 잠근 ‘나’. 그러나 ‘나’에게 책임이 없다. ‘나’에게 가혹했던 것은 그녀다. 자신의 편안한,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완전한 죽음을 위해 동의하지 않은 공범자로 그녀가 ‘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외딴방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이 ‘나’로 하여금 ‘다른 삶’을 살게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삶’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삶의 어느 찰나 외딴방으로부터 밀려오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삶을 흔들어 놓았으므로.
오래도록 ‘나’의 외딴방에 봉인되었던 희재 언니 방 자물쇠가 열렸다. 마주하기 힘들지만 마주해야 하는 이야기. 제대로 대면해야 비로소 입 밖으로 낼 수 있고, 견딜 수 있게 된다.
자, 망설이지 말고 날아가라, 저 숲속으로. 눈앞을 가로막는 능선을 넘어서 가라. 아득한 밤하늘 아래 별을 향해 높고 아름다이 잠들어라.(p.493)
잘가…… 나를 아껴주고 보살펴준 일 소중히 간직할게.(p.494)
이제 되었다. 희재 언니가 외딴방에서 구더기와 함께 누워있던 날이 찰나를 스쳐도 희재 언니와 함께 한 옥상의 포근한 햇살과 희재 언니의 뜨끈한 국수 가락이 ‘나’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와 어루만져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