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 아우또노미아총서 2
쎄르지오 띠쉴러.워너 본펠드 외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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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속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가로지르는 물음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1990년대 초반에 전위 운동의 후퇴와 대중운동의 약진 속에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고, 1990년대 중반 군대의 직접적이 억압과 가족에의 속박으로부터 독립적 삶을 구성해 갈 때쯤 사회주의자의 삶을 고민하면서 체르니쉐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다. 그리고 올해 초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게 되었다. 1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난 아직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끓어오르고 온 몸이 닳아오른다. 왜?

'무엇을 할 것인가?'는 너무도 선명한 태도를 요구하는 물음이면서도 바로 그 이유로 목적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물음이기도 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 자체만으로 해방의 목적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실천에서의 분명한 태도를 요구했던 이유는 해방의 목적을 긴급한 물음으로 제기하지 않고 희미하게 제기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목적' 보다 '수단'이 더 절실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1990년대 초반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의 목적은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였고 그 해답은 너무도 선명하고 분명하게도 '사회주의 혁명정당을 건설'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혁명 그 자체는 나에게 애매하고 모호한 대상이기 보다는 당위였고, 얼마나 올바르고 과학적인 혁명정당을 건설할 것인가가 더 큰 문제였다. 1990년대 중반도 자유롭지는 않다. 당시 물음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난 무엇을 할 것인가'였지만,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스스로의 해방'은 '나'를 경계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당장의 실천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제기하는 물음이기는 하지만 '왜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나가지 못하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질문 방식이었다.

요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앞에 있어야 할 '왜'를 더 많이 묻는다. 그것이 해방의 목적을 탐구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지금 이곳'으로 끌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해방을 상상하고 실천하기 보다는 삶을 억압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왜' 우리의 노력은 우리 스스로를 더 크게 억압하는 것들을 생산하는가?' '삶을 억압하는 것들을 생산하는 우리들에 맞서서 바로 그 우리들은 삶을 해방하는 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1990년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목적을 상실했으면서도 실천상의 태도를 더 중요하게 제기했었다면, 요즘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는 ‘왜’라는 그 목적에 더 많은 물음을 던지게 하고, 실천상의 태도 이전에 실천상의 태도를 만드는 실천적 관계들에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책 <무엇을 할 것인가?>는 '해방의 목적'과 '해방의 수단'을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생각할 것을 제기한다. '수단'이 '목적'을 억압하거나 '목적'이 '수단'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수단'은 '목적'을 예비해야 하고 '목적'은 '수단'을 창출해야 한다. '수단'과 '목적'은 다중의 자율성이 나날이 갱신되며 창출하는 공통성의 두 양태라고 이 책은 들려준다.

'여하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레닌의 위대한 질문은 오늘날 100년 전보다 훨씬 더 긴급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수단으로부터 목적을 분리시킨다... 공산주의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건 정당화된다. 이 개념화는 수단들을 목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수단들로부터 그것들의 해방적 내용을 박탈한다... 그렇게 해서 그 관계는 역전된다. 왜냐하면 목적은 수단들의 생산물 이상의 다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모두다 꺼져버려! 반란; 어떻게 살아갈까? 혁명)의 두 요소 사이의 관계를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으로 본다.'(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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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피닉스문예 3
이헌 지음 / 갈무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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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드를 키고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세 에필로그를 읽고 있었다. 나처럼 책 읽기보다는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볼프>를 하루만에 다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를 조금씩 며칠에 나누어 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일본 에니메에션 '인랑'을 보는 느낌이기도 했고, 유태인 학살을 다룬 '쉰들러 리스트'를 보는 느낌이기도 하고, 아나키즘을 소재로한 '아나키즘'이나 그외 독립운동을 소재로한 영화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소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처음에는 역사적 리얼리즘 소설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3부 투쟁을 읽고 책을 덮으면서는 혁명적 낭만주의 소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덮으면서 조금은 허무한 느낌이 들었지만 더 이야기 하면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것 같다. 이 책의 후반부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식스 센스'를 상영하는 영화관에 가서 '브루스 윌리스는 귀신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책의 끝까지 보아야 <볼프>의 재미를 느낄수 있다.

<볼프>의 앞 부분의 느낌과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보면 대략 이렇다.

톰 쿠르즈가 주연한 영화 '마이너리티'에서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것의 역사가 히틀러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볼프>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긴급 명령 ‘방어적 구금’을 내린다. 새 체제에 반대 활동을 할 지도 모른다고 의심받는 자들이 미리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채 6개월도 되기 전에 2만 명을 넘어섰고 수용소와 거리에서 약 500 명이 살해당했다. 게쉬타포는 당과 국가의 적을 모조리 제거하라는 지령을 받았고, 대전 발발 이전에 이미 독일 내에 6개의 수용소가 있었다.'

누구나 한 번은 생각했을 것 같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그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경외스러울 정도로 깊고도 복잡다단한 현실에 몰입할수록, 끝없이 부딪치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사람마다 다르면서도, 누구에게나 가장 강력한 객체인 현실 속에서, 아버지의 행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의 존재는 나처럼 투명하지 않았으니, 그가 바로 현실이었다, 그것도 치명적인... 그것이 아버지의 힘이었다.'

삼일절과 고종을 바라보는 시각도 새롭다. '내 민족의 패배를 견디고 살아남지 않겠다는 그런 말이, 고종의 입에서 나올 성 싶은가? 그 한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큰 반향을 낳았을 것인가. 그런 것이야말로 황제의 은덕이 아닌가? 괜한 독살설이나 낳아 삼일절의 통곡으로 이어진 어정쩡한 죽음을 보면 뒷골이 아파온다... 총칼로 위협받아 눈물만 흘리는 힘없는 황제의 모습이란, 일제가 학살한 백성의 참상에 비하면 가련치도 않다.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백성이 죽어나고 국토가 빼앗겨도, 종묘의 위패 쪼가리와 황가의 혈통만 이어가면, 나라가 보전된단 말인가. 조선 황실의 눈으로 보면 야만인에 불과할 이디오피아 황제들도 제 나라 구하려 싸울 줄은 안다. 헤이그에 이준열사를 보내 항의했다는 것도, 제 통치권을 수호함인지, 제 백성을 보호함인지 수상쩍기 그지 없다.'

유태인 확살을 바라보는 시각은 역설적이다. '6백만이 죽었다. 많은 이들이 그 숫자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실이라면, 그 얼마나 다행인가! 유태인과 독일인,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좀더 적은 숫자를 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좀더 덜 죽었기를 원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 숫자가 절반이나 혹은 십분지 일로 준다 해서 학살이 학살이 아니게 될 수는 도저히 없지 않은가? 설사 60명이 죽었더라도 그 중 한 명도 살려낼 수 없는 것을, 태어나 죽어야 하는 인간이 어찌 모를 수 있는가. 누구나 좀더 적은 숫자를 원한다. 그러나, 덜 죽은 한국인이 유태인들처럼 보상이나 사죄받기는커녕, 세계로부터 잊혀지는 현상에 얼마나 무수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히틀러나 히로히토의 개인은 그나마 이해가능한 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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