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이야기 -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120
제프리 초서 지음, 최예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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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제가 하는 조언을 마음에 새겨 두십시오.

죄가 그대를 망쳐 버리기 전에 죄를 버리라.

/의사의 이야기


여기서 당신은 아실 수 있죠, 만약 여성이 선한 존재가 아니고, 여자의 조언이 선하고 유익하지 않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고, 여자를 남자의 돕는 자라고 부르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오히려 남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라고 부르셨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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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멜리비, 즉 '꿀을 마시는 자'라는 뜻이지요. 당신은 세상의 달콤한 부유함, 이 세상의 즐거움과 명예라는 꿀을 너무 많이 마시고 거기에 취해 당신의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를 잊었어요. 당신이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을 그분께 바치지 않았고 경외하지도 않았습니다.

/ 멜리비 이야기


내 아들아, 이야기를 덜하는 것이 좋단다.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해를 당한단다.

이렇게 나는 듣고 배웠어.

말을 많이 하면 죄를 짓기 쉬워.

혀를 경솔하게 굴리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알고 있니?

/ 식품 조달업자의 이야기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실 때마다 사람은 분명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들도 모두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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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여자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는데, 이는 여자가 남자의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 교구 주임 신부의 이야기



상권을 읽고는 재미있는 이야기 모음집 정도로 생각했다. 천일야화 같은. 그런데 하권을 읽으면서 마주치는 성경 구절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용구 앞에서, 이 이야기들은 어쩌면 이래서 살아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성의 강인함과 지혜가 드러나는 곳곳 좋다고 상권 리뷰에도 언급했었는데, 하권의 '멜리비 이야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먼 발치에서 보면 교훈적이라는 말로 깎아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남편의 판단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유하고도 단단하게 전달하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 멋졌다. 깊이 있는 지혜와 따뜻하고도 올곧은 태도. 자고로 아내란 이래야 할 것 같아. 바로 다음 장에 이어지던 불같이 화내는 아내의 모습이 친숙하지만….

과연 마음에 드는 이야기 하나를 고를 수 있을까 했는데, 나중에 투표할 수 있다면 완전 이거다, 마음 속으로 찜해두었다.


마지막을 갈무리하던 '교구 주임 신부의 이야기'는 한 편의 긴 설교문 같았다. 그렇지 하며 읽다가 호되게 혼나는 기분도 들었고 참 묘했다. 성경 읽고 싶어졌다. 플래그를 가장 많이 붙였지 싶다.


초서의 '철회문'에서 강하게 한 방 맞은 것 같았는데, 이야기 가운데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으셨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시기를 바란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지혜와 선함이 그리스도에게 나오므로.


갑자기 아멘 했고.

아, 700년을 살아남아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런 것이구나. 이래야지. 절로 끄덕여졌다.


아주 오랜만에 문학 해설 꼼꼼히 읽었다.

이 작품이 쓰여진 당시 영국의 문학은 주로 프랑스어로 된 것이었으며, 영어는 그 위상이 상당히 낮아 영어의 문학적 가능성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봤을 정도라 한다. 그래서 영문학의 아버지라 하는구나….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 같은 옛 표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학적 언어로의 격상을 이루어낸 셈이다.


그저 궁금했던 책 한 권 잘 읽었다는 말로 끝날 줄 알았는데, 보다 의미가 큰 독서였다.


"여기에 하느님의 풍성함이 있다(Here is God's Plenty)" (존 드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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