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독립운동가 최재형 - 시베리아의 난로 최 페치카
문영숙 지음 / 서울셀렉션 / 2014년 4월
평점 :
1895년 함경도 경흥의 양반 집 노비로 태어나 가난한 삶을 살던 한 소년이 가족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지신허로 이주해왔다.
가난한 이주민의 삶이 그렇듯이 소년은 늘 허기에 시달렸고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형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12세가 되던 해 가출, 배고픔에 지쳐 쓰러진 그를 구해준 것은 러시아 선장 부부였다.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으로 러시아어와 문학, 예술을 배우면서 선장 부부와 6년 동안 항해하면서 장사를 배우게 된다.
소년은 이제 러시아로 귀화한 후 청년 사업가로 변신해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극동정책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개발을 추친했고, 마침 일본의 침탈을 피해온 10만 여 한인들이 이 개발 과정에 노동자로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청년은 이 과정에서 러시아 당국과 한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면서 한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게 되면서 러시아와 한인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청년은 나아가 한인들의 주요 거주지인 연추에 들어서는 군사 기질르 둘러싼 군납 사업에 뛰어들어 큰 이익을 얻고, 한인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34살의 나이에 러시아 정부에 의해 지금의 군수 격인 도헌에 선출되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석하게 된다. (당시 대관식에 초대된 조선 사절단은 갓을 벗지 않아 대관식 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을 잊고 사업가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항거해 의병을 조직, 게릴라 전을 펼쳤으며, 32개의 학교를 세웠으며 해조신문, 대동공보와 같은 신문을 만들어 러시아와 간도의 한인들에게 애국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았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역사적인 하얼빈 의거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배후에서 지원한 이가 그였다.
그가 바로 함흥의 노비 출신으로 러시아 한인들로 부터 시베리아의 최 페치카라 불리우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그러나 우리는 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요즘 아이들은 안중근도 잘 모르는데 말이다.
사업가로서의 탁원한 능력 뿐만 아니라 교육가와 언론인으로도, 러시아 관료로도 충분히 성공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텐데 그는 왜 그런 안락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가로 쫓기다 결국은 일본군에 의해 사살 당하는 삶을 택했을까?
나는 그가 노비 출신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양반에 의해 착취당했던 그의 유년의 삶이, 일본에 의해 침탈 당하고 살아가는 한인의 고통을 눈감을 수 없게했던 것이 아닐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삶과 죽음을 청소년들의 눈높이로 새롭게 정리한 문영숙 작가가 많은 수고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오해할 수 있을 듯한 대목은 짚고 넘어가자.
이 책 속에서의 박영효는 지나치게 좋은 인물이다.
그가 조선의 국가 장학생으로 유학을 통해 남들보다 먼저 선진문물을 깨우친 개화 사상가요 정치가였던 한때가 있었으나, 일본제국의 후작의 작위를 얻었으며 이후 그의 반민족적인 친일행위와 매국적인 폐악을 생각한다면, 모든것을 버리고 독립운동가로서의 고단한 삶을 선택한 최재형의 삶에 비추어 부끄럽다 기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친일파 박영효>
같은 돈과 권력과 지식을 가졌으나 내 민족은 어떻게 살든지 자신의 안락과 호사만을 누린 박영효처럼 죽어서도 후대에까지 손가락질 당하는 치욕스런 삶을 살 것인지, 정반대의 최재형과 같은 삶을 살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읽는 내내 불편을 넘어 불쾌해지는 대목이었다.
우리에게 너무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삶을 기록한 좋은 글이 있어 추천해 본다.
http://www.cyworld.com/eunayoon/3969039
*****북카페 한우리의 서평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