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은유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마음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하룻밤 지나면, 생각을 안하면, 먹고 사는게 바빠서 생각이나 하겠어 했건만.

 

고였던 보처럼 눈물이라도 터져버리면 차라리 나을까?

마흔도 중반인 아직도 분노하고, 실망하고, 좌절할 감정이 남아있을 줄이야.

 

창 밖으로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면서도 슬퍼진다.

마음 나눌 이를 찾아 전화번호를 검색해보지만, 마땅히 전화할 곳이 없어 전화기만 폈다 접었다를 반복할 뿐.

 

이런 기분을 남편한테 전하니 배가 불렀단다.

왜? 배가 고프면 그런 감정이 일지 않는단 말인가.

 

남편 못지 않게 바쁘고 어깨에 지워진 짐 또한 무겁다.

 

아이들에게 엄마 얼굴은 밥으로 보이고,

엄마 지갑은 마르지 않는 샘이고,

지들이 어진 집안 청소하고 빨래하는건 지극히 당연한 임무,

퇴근 시간 없는 항시 대기 도우미다.

 

남편에겐 완벽한 주부에,

재테크 달인,

맞벌이는 당연하면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완벽한 모습으로 대기 중일 것.

거기에 외모 또한 55 사이즈를 넘지 않는 동안녀여야 한다.

 

고분고분한 며느리,

늘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딸.

 

이쯤 살고보니,

가슴을 설레게 했던 내 꿈은 어디로 갔는지,

남자친구보다 좋았던 내 동무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내가 아직도 누군가에겐 여자인지,

나도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설레는 감정이란 것이 조금이나마 남았는지,

 

그리고,이젠 내 이름 ㅇㅇㅇ로 불려지고 싶다.

 

올드 보이는 있어도 올드 걸은 없는 세상.

아주머니로도 할머니로도 불리기 부담스러운, 여자로 불리고 싶은 올드 걸에게 보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또다른 나, 올드 걸이, 올드 걸을 위해 들려주는 시에 귀를 기울여 본다.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 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고정희의 사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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