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지음 / 세계사 / 199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우연히 꺼낸 책에서 한쪽 갈피에 꽂아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종이 조각엔 작은 글씨로 무언가 쓰여있었다. [하이데거- '현존재의 존재는 자신의 의미를 시간성에서 발견한다.' (존재와 시간 中에서)... 99. 11. 13] 책표지에 얇게 덮여 있는 먼지를 불어내고, 가만히 책을 쓸어내렸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의 감촉, 그 잊혀졌던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으며 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난날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던 윤대녕의 소설『남쪽계단을 보라』를, 지난날의 내 방황을.

'누가 나를 <세계>의 바깥으로 슬쩍 밀어 놓은 것일까. 누가 그날 아침에 하늘색 한 조각을 그 후미진 전철역 남쪽 계단에 떨어뜨려 놓았던 것일까'(본문中에서)

<남쪽 계단을 보라>는 여성의류 판매기획 당담자인 '나'가 하루동안 겪는 '세계와 나의 갈등'을 그린다. 어느날, 불쑥 '저쪽'의 세계를 본 자들이 '이쪽'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나'를 찾아온다. 출근길에 '하늘색 원피스'의 여자를 우연히 목격한 '나'는 <세계>와 <나> 사이에 틈이 생겼음을 느낀다. 십 분이라는 시간 차이는 <세계>와 <나> 사이의 단절된 흐름 속에 갖혀 어긋나 있다. '저쪽' 세계로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고교 동창생의 방문으로-더욱 심해지고, '나'는 '나만이 정든 세계에서 추방돼 낯선 어둠 속에 버려져 있다는 참담한 외로움'을 느낀다. 다른 세계-'저쪽'의 틈입(闖入)을 지연시키기 위해 '나'는 애인인 세희를 만나지만, 그녀 또한 세계와의 틈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나'와 '세희'는 다른 세계로 탈출하려는 자신의 불안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의 시간을 맞추지만, 이미 시작된 혼돈은 막을 수 없다.

<남쪽 계단을 보라>는 '시간'이라는 물리적 현상을 매개로 <세계>와 <나> 사이의 단절, 타자와의 단절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시간'은 인간에게만 존재의미를 갖는다. 니체는 모든 동물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시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가리켜 '병든 동물'이라 했다.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순간순간의 감각과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삶을 성찰한다. 소설『남쪽계단을 보라』는 이러한 시간의 속성을 통해 현대인이 겪고 있는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새로운 각도로 섬세하게 묘파해낸다.

<세계>와 <나> 사이의 시차(時差)의 발견은 '물리적으로 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지금까지 시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현실 세계에 자연스럽게 종속되어 왔던 '나'에게 용납하기 어려운 혼돈을 안겨준다. 예기치 못했던 만남은 현실에 가려져 무의식의 세계에 내재해 있던 욕망을 충동질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 속에 매몰되어 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행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세계>와 <나> 사이의 벌어진 틈은 '지금부터 조금은 달리 살아보고 싶다는 은밀한' 현실 탈출의 욕망이 부추긴 결과가 아닐까?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쪽' 세계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저쪽' 세계를 향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인가?

▶ 사족 [우연히 발견한 '쪽지'에 관한 단상(斷想)]- 윤대녕의 두 번째 소설집<남쪽 계단을 보라>에 깊게 빠졌던 적이 있었다. 왕십리 철길 옆 점멸하는 가로등의 흐릿한 불빛에 의지한 채, 어깨동무를 한 친구들과 절규하듯 노래를 지르며, 질펀한 밤 골목의 맨 끝 구석으로 스물스물 사라지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허름한 술집의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시끌벅적한 실내의 풍경을 뒤로하고, 알싸아한 소주 냄새에 신경을 마비당했고, 언제나 기억은 그쯤에서 웅웅거리며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무엇을 꿈꿨던 것일까? 혹시 세계의 '저쪽'? 알 수 없다. 다만, <남쪽 계단을 보라>가 나의 일기장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오늘 난 <남쪽 계단을 보라>를 다시 읽으며, 그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던 1999년의 마지막 겨울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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