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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과 사물의 풍경을 담아내는 김훈의 시선은 언제인가부터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듯 하다. 때문에 그가 바라보는 그만의 풍경은, 그에게서 이미 닳고 달아 진부하고 상투적인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난 내 두발로 닿지 못하는 세계의 넘치도록 많은 풍경들을 그와 그의 자전거가 닿아서 내게 보여주길 바라지만, 그의 사유체계 안에 갇혀 있는 풍경은 좁다. 그는 새로운 풍경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이미 점유했던 풍경 안에 자신을 가둔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그의 손끝에 걸리는 그 진부한 풍경들이 새로운 질감으로 더욱 아름답게 다시 살아난다. 그것은 그 무엇도 아닌, 풍경을 언어로 그려내는, 언어로 풍경을 살아 있게 만드는 '김훈만의 문체'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체는 힘있다. 그 힘은 바로 세계와 소통하는 힘이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 기호로서 세계에 교접의 신호를 보내고, 세계는 그 신호를 받아들여 자신을 그에게 고스란히 열어 보여준다. 자신만의 언어를 이용해 풍경들과 소통하고 그 소통으로 끌어낸 '풍경의 안쪽'을 우리에게 보여주기에 그의 글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 매혹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그가 글 위에 펼쳐 놓은 진부한 풍경의 바깥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풍경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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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꼭 쥔 연필의 끝은 종이와 만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풍경과 풍경 사이를 넘나든다. 그 넘나듦의 행위 속에서 풍경은 저마다의 개체성을 띠며 끊임없이 생동하는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이 풍경들은 다시 하나의 전체성으로 인간의 삶과 조화를 이룬다.
또한, 그가 행하는 시간과 공간의 가로지름은 역사로 하여금 그 안쪽의 풍경을 펼쳐보이게 한다. 그의 연필이 닿은 역사는 더이상 사물화된, 박제화된 역사가 아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가려져 있는 과거의 시간을 살아있는 현재형으로 바꾸는 데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글재주를 보여준다. 그에 의해 역사는 다시 숨을 쉬고, 그 들숨과 날숨 속에서 옛사람들의 다양한, 그리고 질곡의 삶의 무늬가 새겨진다.
자전거 여행 2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행은 '남한 산성 기행'이다. 남한 산성은 200년이 훨씬 지난 과거를, 그 말하여 질수 없는 것들을 품은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김훈은 병자호란이라는 그 맥없었던 항전의 역사를 남한 산성의 서문을 걸으며 생각한다. 삼전도로 향하던 임금의 발길을 따르며 생각한다. 47일동안 산성에 갇혀 자신에게 주어진 뚜렷한 길인 삶과 치욕의 길과 죽음의 길에서 결국 삶을 선택했던 임금을 생각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은 없기에 그는 치욕의 역사, 고통의 역사가 아닌 삶 자체의 역사를 생각한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이 따로 있지 않은 인간의 인생은 왕이던, 신하던, 백성이던간에 모두에게 똑같은 보편성으로 주어진다는 그 명징한 진리를 생각한다.
삶은 고통이자 치욕이고, 다시 삶은 고통도, 치욕도, 그 무엇도 아니다.
삶은 삶 그 자체일 뿐이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