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자전거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과 사물의 풍경을 담아내는 김훈의 시선은 언제인가부터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듯 하다. 때문에 그가 바라보는 그만의 풍경은, 그에게서 이미 닳고 달아 진부하고 상투적인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난 내 두발로 닿지 못하는 세계의 넘치도록 많은 풍경들을 그와 그의 자전거가 닿아서 내게 보여주길 바라지만, 그의 사유체계 안에 갇혀 있는 풍경은 좁다. 그는 새로운 풍경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이미 점유했던 풍경 안에 자신을 가둔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그의 손끝에 걸리는 그 진부한 풍경들이 새로운 질감으로 더욱 아름답게 다시 살아난다. 그것은 그 무엇도 아닌, 풍경을 언어로 그려내는, 언어로 풍경을 살아 있게 만드는 '김훈만의 문체'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체는 힘있다. 그 힘은 바로 세계와 소통하는 힘이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 기호로서 세계에 교접의 신호를 보내고, 세계는 그 신호를 받아들여 자신을 그에게 고스란히 열어 보여준다. 자신만의 언어를 이용해 풍경들과 소통하고 그 소통으로 끌어낸 '풍경의 안쪽'을 우리에게 보여주기에 그의 글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 매혹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그가 글 위에 펼쳐 놓은 진부한 풍경의 바깥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풍경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

 

 그가 꼭 쥔 연필의 끝은 종이와 만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고, 풍경과 풍경 사이를 넘나든다. 그 넘나듦의 행위 속에서 풍경은 저마다의 개체성을 띠며 끊임없이 생동하는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이 풍경들은 다시 하나의 전체성으로 인간의 삶과 조화를 이룬다.


 또한, 그가 행하는 시간과 공간의 가로지름은 역사로 하여금 그 안쪽의 풍경을 펼쳐보이게 한다. 그의 연필이 닿은 역사는 더이상 사물화된, 박제화된 역사가 아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가려져 있는 과거의 시간을 살아있는 현재형으로 바꾸는 데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글재주를 보여준다. 그에 의해 역사는 다시 숨을 쉬고, 그 들숨과 날숨 속에서 옛사람들의 다양한, 그리고 질곡의 삶의 무늬가 새겨진다.


 자전거 여행 2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행은 '남한 산성 기행'이다. 남한 산성은 200년이 훨씬 지난 과거를, 그 말하여 질수 없는 것들을 품은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김훈은 병자호란이라는 그 맥없었던 항전의 역사를 남한 산성의 서문을 걸으며 생각한다. 삼전도로 향하던 임금의 발길을 따르며 생각한다. 47일동안 산성에 갇혀 자신에게 주어진 뚜렷한 길인 삶과 치욕의 길과 죽음의 길에서 결국 삶을 선택했던 임금을 생각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은 없기에 그는 치욕의 역사, 고통의 역사가 아닌 삶 자체의 역사를 생각한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이 따로 있지 않은 인간의 인생은 왕이던, 신하던, 백성이던간에 모두에게 똑같은 보편성으로 주어진다는 그 명징한 진리를 생각한다.


 삶은 고통이자 치욕이고, 다시 삶은 고통도, 치욕도, 그 무엇도 아니다.

 삶은 삶 그 자체일 뿐이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지음 / 세계사 / 199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우연히 꺼낸 책에서 한쪽 갈피에 꽂아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종이 조각엔 작은 글씨로 무언가 쓰여있었다. [하이데거- '현존재의 존재는 자신의 의미를 시간성에서 발견한다.' (존재와 시간 中에서)... 99. 11. 13] 책표지에 얇게 덮여 있는 먼지를 불어내고, 가만히 책을 쓸어내렸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의 감촉, 그 잊혀졌던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으며 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난날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던 윤대녕의 소설『남쪽계단을 보라』를, 지난날의 내 방황을.

'누가 나를 <세계>의 바깥으로 슬쩍 밀어 놓은 것일까. 누가 그날 아침에 하늘색 한 조각을 그 후미진 전철역 남쪽 계단에 떨어뜨려 놓았던 것일까'(본문中에서)

<남쪽 계단을 보라>는 여성의류 판매기획 당담자인 '나'가 하루동안 겪는 '세계와 나의 갈등'을 그린다. 어느날, 불쑥 '저쪽'의 세계를 본 자들이 '이쪽'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나'를 찾아온다. 출근길에 '하늘색 원피스'의 여자를 우연히 목격한 '나'는 <세계>와 <나> 사이에 틈이 생겼음을 느낀다. 십 분이라는 시간 차이는 <세계>와 <나> 사이의 단절된 흐름 속에 갖혀 어긋나 있다. '저쪽' 세계로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고교 동창생의 방문으로-더욱 심해지고, '나'는 '나만이 정든 세계에서 추방돼 낯선 어둠 속에 버려져 있다는 참담한 외로움'을 느낀다. 다른 세계-'저쪽'의 틈입(闖入)을 지연시키기 위해 '나'는 애인인 세희를 만나지만, 그녀 또한 세계와의 틈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나'와 '세희'는 다른 세계로 탈출하려는 자신의 불안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의 시간을 맞추지만, 이미 시작된 혼돈은 막을 수 없다.

<남쪽 계단을 보라>는 '시간'이라는 물리적 현상을 매개로 <세계>와 <나> 사이의 단절, 타자와의 단절을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시간'은 인간에게만 존재의미를 갖는다. 니체는 모든 동물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시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가리켜 '병든 동물'이라 했다.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순간순간의 감각과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삶을 성찰한다. 소설『남쪽계단을 보라』는 이러한 시간의 속성을 통해 현대인이 겪고 있는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새로운 각도로 섬세하게 묘파해낸다.

<세계>와 <나> 사이의 시차(時差)의 발견은 '물리적으로 보면 아주 미세한 차이'지만, 지금까지 시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현실 세계에 자연스럽게 종속되어 왔던 '나'에게 용납하기 어려운 혼돈을 안겨준다. 예기치 못했던 만남은 현실에 가려져 무의식의 세계에 내재해 있던 욕망을 충동질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 속에 매몰되어 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행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세계>와 <나> 사이의 벌어진 틈은 '지금부터 조금은 달리 살아보고 싶다는 은밀한' 현실 탈출의 욕망이 부추긴 결과가 아닐까?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쪽' 세계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저쪽' 세계를 향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인가?

▶ 사족 [우연히 발견한 '쪽지'에 관한 단상(斷想)]- 윤대녕의 두 번째 소설집<남쪽 계단을 보라>에 깊게 빠졌던 적이 있었다. 왕십리 철길 옆 점멸하는 가로등의 흐릿한 불빛에 의지한 채, 어깨동무를 한 친구들과 절규하듯 노래를 지르며, 질펀한 밤 골목의 맨 끝 구석으로 스물스물 사라지던 때가 있었다. 우리는 허름한 술집의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소주를 마셨다. 시끌벅적한 실내의 풍경을 뒤로하고, 알싸아한 소주 냄새에 신경을 마비당했고, 언제나 기억은 그쯤에서 웅웅거리며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무엇을 꿈꿨던 것일까? 혹시 세계의 '저쪽'? 알 수 없다. 다만, <남쪽 계단을 보라>가 나의 일기장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오늘 난 <남쪽 계단을 보라>를 다시 읽으며, 그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던 1999년의 마지막 겨울로 돌아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4
윤흥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속에서 무언가 부글거리며 끓고 있다. 울컥이며 목을 치고 오르는 응어리. 뇌관이 터진 폭탄을 가슴에 안고 살았던 것일까. 무엇을 향해 이토록 분노하는가. 철저하게 왜곡되고 뒤틀린 세상을 향해. 세상을 닮아가는 내 자신을 향해.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몫을 찾아 투쟁하는 사람과 자기가 가진 어떤 것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과 열을 가지고도 부족해 다른 이의 하나마저도 빼앗는 사람이 있다. 토지에 담장을 치고 `이것이 내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된 인류의 사회적 불평등. 그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졌다. 세상은 두 부류의 간극 사이에 중간자라는 완충지대를 허용치 않으려 한다.`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다. `너`가 아니면 `나` 다라는 식의 이분법적 구도로 세계의 윤곽을 그린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했던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뜨의 말을 기억하는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이해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이기적 동기에서 나온 알량한 자비심이 아닌,마음으로 우러나오는 공감으로 이해할수 있는가 말이다.

`가진 자인가`아니면`못 가진 자인가`, 어느 쪽인가를 강요하는 세상 앞에서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고 양쪽의 경계에서 망설였던 두 사람이 있다.집주인 `오선생`과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권씨`가 바로 그들이다. `오선생`과 `권씨`의 마음속에는 천칭이 있다. 천칭의 양쪽에는 찰스 램과 찰스 디킨스가 서로 엇비슷한 무게로 메달려 있다. `오선생`과 `권씨`는 알 거 다 아는 지식인이기에 어느 쪽에 무게를 더 두어야 할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지식인이란 작자들은 세상을 향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깨어있는 정신의 소유자들이기는커녕, 당연한 것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청맹과니일뿐이다.

작가는`오선생`을 통해 지식인의 위선과 자기기만을 비판한다. `부자는 경멸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빈자는 절대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고 그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외면하지 말자`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오선생`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권씨에게 향하는 `오선생`의 마음은 항상 램과 디킨스 사이에서 갈등한다.

`사회의 안녕과질서를 위협`한다는 권씨는 어떤가. 광주 대단지 사건이 있기 전만해도 그는 `오선생`과 같은 -램과 디킨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벌어지던 날, 권씨는 경찰과 대치하며 투쟁을 벌이던 사람들이 삼륜차에서 땅바닥으로 쏟아진 참외 더미를 쪽으로 달려들어 그걸 다투어 먹는 모습을 보았다. 가난한 자들의 생존의 절실함을 느끼는 순간 이 세계의 모순에 대한 분노가 권씨로 하여금 디킨스의 궁둥이를 걷어차게 만든다. 세상은 권씨에게 전과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낙인은 가문도 학력도 모두 무시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무능력자 권씨는 가장의 의무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건 열 켤레의 구두뿐이다. 그에게 있어 구두는 마지막 남은 체면과 자존심이다. 구두를 닦는건 현실의 냉혹한 폭력 속에서 상처받고 소외된 자신을 지키기위해 권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소설을 읽고 무지근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눌수 없었던 건 내 안에도 `오선생`과 `권씨`의 그것과 같은 천칭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가 만든 악(惡)이란 사실을알면서도 나 자신은 가진 자가 되기를 원하는 위선과 이중성. 인간은 이기적이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했던 홉스가 옳았던 것인가. 위선으로 뭉친 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수록 가슴을 파고드는 자괴감, 난 고의적으로 현실의 절박하고 처절한 생존 문제를 아득한 의식 속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정작 실제적인 갈등과 대립에서 눈을 돌린 것은 아닐까. 이십여 년의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소설은 지금의 지식인에게 물음을 던진다.
넌 진정한 휴머니스트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은 人間學이다.문학은 인간의 본질과 그들이 지향하는 유토피아에 대해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끊임없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의 답을 구하는 것은 개인 각자에 달려있다. 문학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고민의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체적 질문의 형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본질을 천착해 들어가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각한다. 그것은 삶의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하기에 문학은 계속하여 되풀이된다.『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에서 벌이는'새 낙토 건설의 꿈과 연이은 좌절의 사연'을 담고 있다. 이청준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려 했던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했던 문제는 아직까지 유효한가?

섬 바깥에서 볼 때만 아름다운 땅, 안으로 들어가 마주할때에야 비로소 가려졌던 어두운 진실이 드러나는 버림받은 자들의 땅 소록도에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질병을 지닌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사회의 낙인때문에 절망과 체념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환자로서의 특수한 처지를 동시에 자각하며 괴로워한다.그 '치열하고 눈물겨운 몸부림' 끝에 섬사람들은 차가운 밤바다에 몸을 던지고, 섬 전체는 '커다란 한(恨)의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소설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천국'은 당시 우리의 묵시적 현실 상황과 인간의 기본적 존재 조건들에 상도한 역설적 우의성(寓意性)에 근거한 말이었다.」『당신들의 천국』은 '새마을 운동'을 구호로 새 국가 건설을 앞세운 박정희 정권의 유신(維新)시대 하의 현실을 '소록도'와 조백헌 원장의 '천국만들기'로 알레고리(allegory)하여 쓴 소설이다. 소설은 권력과 대중과의 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우의적(寓意的)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록도에서 건강인과 원생간의 관계는 수평적 평등의 자리에 놓인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소록도의 이런 특수한 계층적 단절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의 억압적 관계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인간 사회 보편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천국』의 '당신들의'는 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나와 타자 간의 단절된 관계의 상징이다.

죽어 있는 섬 소록도를 위해 몇 년 동안 피나는 정력을 쏟았던 조백헌 원장의 '천국 만들기'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의 계획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섬을 그냥 누구나 살기 좋은 인간의 천국이 아니라 쫓기고 학대받아온 문둥이들을 위한, 문둥이들만의 천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조원장의 생각에서부터 천국의 한계와 정체는 분명해진다. 섬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함께 하지 못한 조원장의 선의는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가하는 또다른 억압의 행사였던 것이다. 결국, 원장 개인의 일사분란한 통제와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소록도의 천국은 원장 한 사람을 위한 '당신들의' 천국일 수밖에 없었고, 섬사람들의 '자생적인 운명에 근거한 힘'으로 일구어낸 '우리들의' 천국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행'해지는 진정한 천국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소록도에서, 아니 이 사회에서 그런 천국이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이청준은 건강인 서미연과 음성환자 윤해원의 결혼을 설정함으로써 마지막 희망의 가닥을 남겨 놓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도 앞으로 계속될 천국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일뿐이다. 그 까닭은 서미연은 완전한 건강인이 아닌, 미감아로서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섬의 또다른 운명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청준은 소설을 통해 병자와 건강인의 완전한 결합, 나아가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의 완전한 해방은 아직까지 현실에서는 가능할 수 없음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이 출간된 지 30 여년이 지났고, 오만한 독선적 통치의 시대도 끝난 지 오래지만,지배 권력에 대한 맹신과 그로 인한 타자와의 단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에세이 - 개정4판 동녘선서 1
조성오 지음, 이우일 그림 / 동녘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 '모든 권력은 폭력을 동반하는가?', '자유란 거부권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앎은 과학적 지식에 국한되는가?' 위에 써 놓은 철학적 담론(談論)들은 올해 프랑스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시험)'의 논술 문제이다. 위의 문제를 읽은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가슴 한 구석이 뜨끔해 지지는 않는지, 변변한 철학서 하나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내 머리를 꽉 채운 건 오로지 하얀 백지뿐이다. 과연 우리에게 철학적 사유(思惟)란 무엇일까?

우리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의 빈곤(貧困)'에 허덕이고 있다. '철학은 철학자들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다. 이 땅의 교육은 사유할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철학이란 학문과 담을 쌓게 만든다. 철학적 사유마저도 단답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 더 이상의 기대는 불가능한 바램일 뿐일까?

사람들은 저마다의 깜냥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가진 인식의 범위 안에서 삶을 산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철학(哲學)이다. 철학은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본 인식과 근본 태도' 즉, 세계관이다. 삶 속에 체화된 철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공허한 담론이 아닌 '생활의 나침반'이자 '삶의 조타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여기에 철학을 현실로, 대중 속으로 끌어들인 책 한 권이 있다. 80년대 사회과학 서적으로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고수했던 <철학에세이>.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던 조성오(변호사)씨가 철학의 대중화를 실현하기 위해 쓴 <철학에세이>는 <전태일 평전>과 함께 당시 대학가의 필독서(必讀書) 목록이었다.

<철학에세이>는 '삶과 철학'의 의미를 일상의 여러 문제들을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책은 철학의 여러 이론 중 변증법적 유물론(唯物論)을 택해 세상을 바라본다. 유물론자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를 맺으며 변하기 때문에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전제 하에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채택하여 사회의 객관적 법칙을 밝혀내려는 것이 바로 유물론이 말하는 철학이다. 물론, 관념론자들이 이 책을 본다면, 제한된 시공간의 현상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본질을 억지로 짜 맞추는 편협한 사고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에세이>의 의의는 '관념론(觀念論)'이냐 '유물론(唯物論)'이냐의 문제를 떠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로서의 철학을 대중의 삶 속으로 끌어내린 데에 있다.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 『철학에세이』가 말하려는 바는 철학은 현실을 떠날 수 없기에 우리는 생활 속에서 철학을 이해하고 스스로 철학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를 꿰뚫어 보고 세상과 사물들간의 관계들 속에서 다양한 삶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철학의 틀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정관념부터 없애야 한다. 난해하고 현학적인 담론만으로 가득 찬 '구름 위의 철학'이 아닌 우리가 겪게 되는 현실의 문제, 삶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 땅 위의 철학'이 진정한 철학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철학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철학이란 머무는 철학이 아닌 앞으로 나가는 철학」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철학에세이'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해주는 지팡이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